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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181)화 (181/500)

181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8)

파스슷-!

붉은 구슬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깨졌다. 이내 가루가 되어 버린 여의주를 본 나는 놀라 소리 질렀다.

“가람! 이거……!”

〖원래 그렇소이다, 리사 아씨.〗

“그럼, 제 소원은요? 소원은 제대로 이뤄진 건가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누군가의 ‘행복’이란 것은 당장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 않소?〗

“그렇기는 하지만요.”

결국, 내 소원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려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거였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가람이 말했다.

〖더욱이 ‘모두’의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여 아예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소이다.〗

가람, 자꾸 불난 집에 부채질할 거예요?

나는 뚱하게 말했다.

“어쨌든 가람의 여의주는 부서졌네요. 가람이 바라던 대로요.”

〖그러게나 말이오.〗

가람이 흐뭇하게 웃었다.

〖정하 아씨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화를 낼 것 같소이다만.〗

“당연하죠.”

옛 정인이든 지금의 청정하든 분명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가람은 좋다는 듯이 웃었다.

저세상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윤리사, 어디 있어?! 너 어제부터 자꾸 사라진다? 백도윤이 네 고기 다 먹고 있다고!”

“헉, 안 돼!”

오늘이 지나면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만찬이었다.

“가람, 저 이만 가 볼게요!”

가람이 그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가 가람에게 외쳤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무엇을 말이오?〗

“여의주요!”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저한테 괜히 부수게 했다고, 나중에 그렇게 후회하지 마시라고요!”

가람이 그런 의미였냐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리사 아씨.〗

***

윤리사가 고기를 사수하기 위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정하가 나타났다.

“여의주, 부쉈어?”

〖정하, 손님은 잘 만나고 오셨나이까?〗

청정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손님은 무슨, 그보다 내 말에 대답이나 해. 여의주 부쉈냐고.”

가람이 조용히 옛 정인을 닮은 남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소이다.〗

“그걸 왜 부숴? 청해솔이 부숴 버린 거야?”

〖그건 아니오.〗

“그럼, 도대체 누가?”

짜증 섞인 목소리에 가람은 나긋하게 대답했다.

〖말해 줄 수 없소이다. 하지만, 정하. 내게 여의주는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나한테는 아니었어!”

청정하는 훗날, 때가 되면 가람에게 여의주를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라면 자신에게 기꺼이 여의주를 줄 것 같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정하, 여의주는 소원을 이뤄 주는 물건이라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죽은 자는 살려내지 못하오. 절대로.〗

청정하가 가람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는 듯이 지껄인 저 목소리가 참으로 얄미웠다.

청정하의 날선 시선에 가람이 고개 숙였다.

〖미안하오.〗

“빌어먹을.”

미지 영역의 고귀하신 분께서 왜 저같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비 새끼 만난 것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는데!’

청정하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인 후 가람을 지나쳐 버렸다.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려는 찰나, 청해솔이 그를 붙잡았다.

“청정하, 고기 안 먹을 거야? 다 먹어가는데.”

“누가 뭐래? 그런 거 안 먹어.”

그런 그를 붙잡은 건 어린 목소리였다.

“맛있어요, 이거.”

윤리사, 윤사해의 하나뿐인 어린 딸.

이 녀석은 내가 화난 게 보이지 않나? 아니, 애초에 내가 ‘초랭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가?

청정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

청정하의 꼴을 보아하니 가람이 여의주를 부순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가람의 여의주로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던 걸까?

‘세계 정복이라던가, 우주 정복이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야?’

청정하가 초랭이라면 분명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여의주는 내가 소원을 빌어 부숴 버렸으니…….

“오빠, 한 번 먹어 봐요.”

나는 심기가 다소 불편해 보이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청정하를 ‘오빠’라고 부른 것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매서운 눈초리로 청정하를 노려보는 것을 보니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청정하에게 고기를 권했다. 청정하가 내가 내민 것을 보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다 탔는데.”

“탄 게 원래 몸에 좋대요!”

청정하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순진무구한 척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윤리사, 그 아저씨 그만 놀리고 이리 와서 마저 먹어.”

저세상이 나를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해솔도 입을 열었다.

“청정하, 너도 그만 심술 부리고 앉아서 먹어.”

“누가 심술을 부렸다고.”

청정하가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면서도 청해솔의 옆에 얌전히 앉는 그였다.

나는 기분이 풀린 것 같은 그를 흘긋거리면서 저세상에게 속닥거리며 물었다.

“저 아저씨 초랭이지?”

“쿨럭!”

저세상이 먹던 음식을 뱉어냈다. 으, 더러워. 그는 황급히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은 후 말했다.

“그걸 알면서 그런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맞다는 거지?”

“그래, 맞아.”

저세상이 청해솔의 옆에서 얌전히 고기를 주워먹고 있는 청정하를 보고는 말했다.

“해솔이 누나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 초랭이야. 내가 저 얼굴을 잊을 리가 없지.”

“탈을 쓰면 잊잖아.”

“나는 아니던데.”

툭, 젓가락 사이에서 고기가 떨어졌다.

“뭐……?”

“나는 아니라고. 분명, 나도 기억 못했던 것 맞아. 그런데 지금은 아니더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럼, 다 아는 거야?”

사이좋게 고기를 먹고 있던 친구들이 놀란 눈으로 나와 저세상을 쳐다봤다.

“목소리 좀 죽여, 윤리사.”

그게 말이 쉽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세상이 오빠도 다 먹었네?! 어서 일어나!”

“아니, 잠깐만……!”

잠깐만이고 자시고 나는 저세상을 일으켜 곧장 숙소로 들어갔다.

쾅! 방문을 닫자마자 나는 닦달하듯이 저세상에게 물었다.

“그럼, 세상이 오빠는 아홉 탈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응, 하지만 ‘중’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죽었을 테니까.”

그 자리를 누가 대신할지 모르겠다면서 저세상은 덧붙여 말했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야. 괜히 아는 척 티를 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 애잖아?”

하긴, 그랬다. 괜히 동네방네 저는 아홉 탈이 얼굴을 알고 있다고 말해 봤자 도움 될 일은 하나도 없었을 거다.

아홉 탈에게 죽지라도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윤리사, 너도 아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빼액 소리 지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가람, 불쌍해서 어떻게 해.”

“그분, 청정하가 불러들인 거주자 아니야?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쌍해?”

“가람이 거주자인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내가 놀란 눈을 보이자 저세상이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윤리사, 너는 가끔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무시할 만하니까 하는 거지. 세상이 오빠, 구구단 올해 들어서 겨우 뗐잖아.”

“그건……!”

저세상이 울컥, 소리 지르려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목소리가 입 모양과 다르게 들리더라고. 아마 한단예와 한단이도 알아차렸을 거야.”

그러면서 저세상은 덧붙여 말했다.

“리오 형이랑 리타 형도 알아차렸을걸? 아저씨 곁에서 거주자를 많이 만났을 테니까.”

그러니까 쉽게 알아차렸을 거라면서 저세상은 말했다.

“흐음.”

아무래도 나중에 가람한테 목소리를 내는 것에 맞춰서 입 모양을 맞추는 것을 제대로 하라고 해야겠다.

그때였다.

“리사, 세상이 형! 내려와서 과일 먹으래!”

“응, 도윤아! 알았어!”

나는 창 밖을 향해 외치고는 나가려고 했다.

“윤리사.”

그런 나를 저세상이 붙잡았다.

“괜히 초랭이한테 까불거리지 마. 그놈이 해솔이 누나랑 무슨 거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성격 어디 가는 거 아니니까.”

“나도 내 목숨 아까운 건 알아.”

하지만.

“아저씨, 이거 먹어 봐요! 엄청 맛있을 것 같은데?”

“벌레가 파먹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걸까?”

청정하가 어색하게 웃고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전에, 왜 다시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야?!”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까 저한테 오빠는 세상이 오빠랑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뿐이더라고요!”

원래 받은 건 배로 갚아 줘야 한다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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