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7)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듯 팽팽해진 분위기 속에서 선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초랭이, 저는 당신과 놀 생각으로 온 게 아닙니다.”
“오, 그래? 그럼 왜 왔을까? 내가 걱정돼서 온 건 아닐 텐데.”
그에 선비가 그걸 질문이라고 던진 거냐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초랭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모르겠는데?”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
선비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보며 초랭이가 키득거렸다.
“그래서 선비 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자신의 배신을 유랑단에 알릴지, 그러지 않을지를 묻는 소리였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수장에게 알린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라면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럼에도 자신들에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건…….
‘초랭이가 배신을 하든 그러지 않든 상관없다는 거겠지.’
그가 그리는 뜻에 반할 건 아무것도 없기에 그러는 것이리라.
‘어쩌면 초랭이가 그 뜻을 반한다고 할지라도 해결책이 있어서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새로운 각시가 태어나지 않았던가? 그녀로부터 미래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괜히 왔군.’
선비가 짧게 혀를 찼다.
‘수장님께 오랜만에 아양이나 떨어 보려고 왔더니.’
그는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이왕 유랑단을 벗어나기로 한 거, 목숨 간수 잘 하셨으면 합니다.”
“설마 선비 님께서 내 걱정을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 죽으면 공석만 몇 자리입니까? 수장님 마음에 드는 적합자 찾기가 쉬운 줄 압니까?”
“적합자를 찾는 건 대부분 이매의 역할일 텐데 더럽게 생색을 내시네.”
“시끄럽습니다.”
선비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선 몸을 돌렸다.
“탈 간수나 잘 하십시오.”
“네가 가지러 올 때까지 잘 간수하고 있을게, 선비 님.”
선비는 유랑단의 아홉 탈 중 가장 약한 존재였다.
다를 줄 아는 무기라고는 어릴 적에 몇 번 배웠던 무기뿐. 선비가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재수가 없는 남자였다.
선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간을 열어 젖혔다. 이내 사라진 그의 모습에 초랭이가 미간을 좁혔다.
“재수 없어.”
그러니까 동족 혐오였다.
***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쏟아질 듯 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별을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는데 말이지. 정말 낭만적이다 싶었다.
“윤리사! 백도윤이 네 고기 다 먹고 있어!”
내 낭만, 도윤이가 다 깨뜨려 버렸다. 나는 단아의 말에 허겁지겁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고기는 도윤이의 배 속으로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도윤이가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해, 리사.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다 먹어 버렸어.”
“어쩔 수 없지.”
도윤이를 키워서 잡아먹는 수밖에!
이런 나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도윤이가 다소 겁에 질린 얼굴을 보였다.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저세상이 속닥거렸다.
“윤리사, 네 얼굴 지금 진짜 무서워. 표정 좀 풀지?”
“헉, 그래?”
도윤이의 10년 후 미래를 그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입가를 스윽 닦았다. 그때, 고기 굽기 담당인 청해진이 우리에게 물었다.
“얘들아, 고기 다 먹었어? 다른 거 구워 줄까? 지금 장어 구울 건데 장어 먹는 사람?”
단아를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다. 단아가 우리를 보고는 느릿하게 한 손을 들었다.
청해진이 그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그래, 알았어! 장어 구워 줄게! 조금만 기다려!”
“네에!”
우리는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리사 아씨.〗
갑작스럽게 찾아온 가람만 아니었더라면 이번 주제의 이야기는 두 자리 수 곱셈에 대해서였을 테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울린 고운 미성에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소리 질렀다.
“노, 놀랐잖아요!”
〖미안하오,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시간이요? 무슨 일인데요?”
가람이 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우물쭈물했다. 나 참, 나한테만 목소리 내줄 수 있으면서 그러네.
결국,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네, 알겠어요. 모두 리사 고기 남겨 둬야 해? 금방 올 테니까!”
“생각해 볼게!”
“단아야~!”
내가 우는 소리를 내자 단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그, 그러니까 빨리 돌아오라는 거야!”
단아가 빼액 소리 지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겠다면서 웃어 주고는 가람의 뒤를 따랐다.
“가람, 이제 말해 봐요.”
인적 드문 숲길에서 나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가람은 그제야 자리에 멈춰 서서는 내게 말했다.
〖쇤네가 준 여의주를 지금 부숴 주실 수 있으시겠소?〗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내게 가람이 말했다.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해 주시오. 쇤네가 원한다면 곧장 이곳에 나타날 터이니.〗
“아니요! 여의주는 지금 가지고 있어요!”
다만, 부서뜨리는 것이 아까웠을 뿐이다. 여의주는 용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신묘한 물건.
더욱이 가람은 말했다.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물건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단 말이지.’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겠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내 손으로…….
‘부서뜨릴 수 없어!’
나는 결국 입을 열고서 말했다.
“가람, 한 가지 제안해도 될까요?”
〖무슨 제안을 하실 생각이오?〗
다행히도 가람의 반응은 나쁘지가 않았다. 흥미를 보이는 태도에 나는 곧장 말을 쏟아냈다.
“오빠. 여의주에는 원래 신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잖아요.”
〖세간에는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들었소.〗
“하지만 여의주는 원래 소원을 들어주는 물건이잖아요. 그렇죠?”
가람이 놀란 눈을 보였다. 설마, 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나 보다.
세상에, 가람! 정인 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그렇게 힌트를 흘려놓고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다면 나를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네!’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가람에게 물었다.
“가람이 원한 건, 그 연인 분을 닮은 분의 행복이시죠?”
〖정하 아씨는 정하 아씨를 닮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정인이 맞소.〗
아니, 글쎄! 그 사람은 남자라고 해도 그렇다고 하네! 나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나름대로 격한 의사를 표현했다고 생각했지만 가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언제 여의주를 부숴 줄지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듯한 몸집이었다.
결국, 나는 말했다.
“가람이 원하는 게 그 분의 행복이라면 저는 제 주변 사람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원해요.”
내 말에 가람이 미간을 좁혔다.
〖리사 아씨, 그건.〗
“알아요, 소원의 범위가 너무 넓으면 이뤄질 확률이 적다는 것.”
그래도 바라고 싶었다.
『각성, 그 후』에서와는 다른 모두의 행복을, 모두가 울고 웃으며 여느 날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일상을.
가람이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 속에 정말 연인께서 있으시오? 리사 아씨, 쇤네는 걱정이 되오. 그리 평탄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 같은 쇤네의 연인께서 리사 아씨께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봐.〗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정하 아씨가 걱정되면 지금 같이 있어 주지 그래요? 혼자 있으신 것 같은데.”
“친구 분을 만나는 것 같아서 내 자리를 피해 줬다오.”
“친구……?”
청해솔과 마찬가지로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청정하가 친구라니?
‘그것도 뱀 섬까지 왔다고?’
뭐 그런 우정이 다 있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 친구란 분이 유랑단의 남은 아홉 탈 중 한 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 말이다.
‘일리가 있기는 하지.’
하지만 무작정 의심은 금물.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가람, 저는 여의주를 부수는 것보다는 모두의 행복을 바라고 싶어요.”
내 말에 가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의주가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소, 무리수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렇다고 해도 좋아요.”
나는 배시시 웃고는 말했다.
“모두의 행복이잖아.”
가람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나는 내뱉은 말에 후회 따윈 없었다.
모두의 행복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나는 정말 즐거울 것 같았다. 그때, 가람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리사 아씨. 리사 아씨 마음대로 하여 주시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품에서 붉은 구슬을 꺼내들었다. 이후,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결심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야, 윤리사. 다른 마음 품지 마!’
그랬다가는 여의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소원을 빌었다.
손에 쥔 붉은 구슬이 왜인지 모르게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