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178)화 (178/500)

178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5)

내일이면 뱀 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니지, 오늘이 마지막인가? 내일 아침 일찍 뱀 섬을 떠나기로 했으니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어쨌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투두둑, 투둑.

창밖을 두드리는 비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 삼 일째, 늦게 온 장마가 참으로 시끄러웠다.

〖리사 아씨, 왜 그렇게 힘이 없소이까?〗

“가람.”

가람은 사람 흉내를 퍽 잘 내게 되었다. 아무도 그가 거주자라고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람, 폭풍우를 그치게 만들었었지 않나?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가람에게 물었다.

“있잖아요, 가람.”

〖왜 부르오, 리사 아씨?〗

“비 좀 그치게 해 주면 안 되나요? 이틀 전인가? 그때 가람이 폭풍우를 가라앉혀 주셨잖아요.”

〖그건 리사 아씨를 위해 특별히 힘을 발휘했던 것이라오. 원래 날씨는 하늘의 뜻인지라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오.〗

“정하 아씨가 원한다면요?”

〖하늘의 뜻일지라도 내 거스를 수 있소이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활짝 웃고는 정하 아씨, 아니. 가람의 연인을 닮은 남자에게 달려갔다.

다행히도 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걸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솔의 보좌관이라면서 일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간에.

“있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나?”

“네.”

그럼 여기에서 제가 아저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있나요?

류화홍과 최화백은 청해솔과 함께 부엌에서 같이 맥주를 까는 중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청해진과 함께 고스톱을 치는 중이었고.

어쨌든 청해솔의 보좌관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가를 찡그렸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오빠라고 불러 줄게요.”

“딱히 아저씨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는데? 네 편한 대로 불러도 돼.”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줄게요. 그게 편해요.”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는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었다. 많이 잡아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남자가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속닥거렸다.

“혹시, 오빠. 그거 아세요? 가람이 날씨를 조절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거요.”

“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이 그렇게 말했어?

저 녀석이라니. 가람이 거주자인 것을 모르는 건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가람에게 비 좀 그치게 해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남자가 가람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왜?”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뚱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였다.

“가람이 오빠 말만 들어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는 두 눈을 올망졸망하게 빛내며 말했다.

“바다에서 제대로 놀아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그러니까 제발요, 네?”

남자가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고 싶으면 지금 밖에 나가서 놀아. 마침, 비도 시원하게 내리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리사, 무슨 일이야?”

청해솔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해솔이 언니!”

나는 청해솔에게 달려가 말했다.

“해솔이 언니 보좌관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요! 그런데 제 부탁을 안 들어줄 거래요!”

“그래?”

청해솔이 눈가를 찡그렸다.

“청정하.”

오호라, 보좌관의 이름이 청정하였구나. 아니, 잠깐만.

‘내가 아는 청(淸)은 아니겠지?’

물론, 남자가 청해솔과 같은 가문의 사람일 리는 없었다. 두 눈이 청(淸)의 색이기는 했지만, 머리칼이 아니었으니까.

남자가 가지고 있는 짙은 분홍색의 머리칼은 청(淸)의 색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닐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성이 겹치는 거야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자부심 높은 청(淸) 가문이 자신들과 겹치는 성씨를 내버려 뒀다고?’

순간 의문을 느꼈지만 나는 머리를 격하게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괜한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나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청해솔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서 청정하에게 말했다.

“다 큰 어른이 애 부탁 하나 못 들어줘?”

“내가 들어줄 수가 없는 부탁이라서 그런 건데.”

청해솔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 역시 그녀와 똑같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해솔이 언니 보좌관이라면서? 그런데 저 싸가지는 뭐람?

다행히도 청정하는 제 싸가지를 곧장 갈무리했다.

“하지만 가주님, 저는 억울해요. 저 꼬마 녀석이 갯지렁이한테 가서 비 좀 그치게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잖아요.”

“갯지렁이?”

청해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정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가 가리키는 건 가람이었다.

청해솔이 그것을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청정하.”

“갯지렁이 맞잖아요.”

가람은 자신이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정하 아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면 뭐든 좋다는 듯이 보였다.

가람, 정하 아씨를 정말 좋아했었나 보구나. 얼굴 하나 닮았다고 자길 갯지렁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굴다니.

그때 청해솔이 말했다.

“어쨌든, 리사가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니네. 들어줘.”

“뭐?”

청해솔이 미간을 한껏 좁혔다. 그 표정을 본 청정하가 급히 말을 고쳤다.

“뭐라고요? 진심이세요?”

“응, 진심이야. 그러니까 어서 가람한테 가서 부탁해. 나도 맑은 날 좀 보고 싶으니까.”

그에 청정하가 말했다.

“그냥 가주님이 비구름 좀 몰아 버리죠?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인간이 날씨에 함부로 손 대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청해솔이 한심하다는 듯이 청정하를 보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가람한테 부탁하고 와, 청정하.”

가람은 인간이 아니니까 말이다. 뭐, 가람 역시 날씨에 함부로 개입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마는.

‘정하 아씨의 부탁이라면 상관없다는 태도였지?’

어쨌든 간에 청정하는 썩은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곧장 가람한테 간 청정하가 입을 열었다.

“저 망할 꼬마 녀석이 비 좀 그치게 해 달래. 할 수 있어?”

가람이 크게 감격한 얼굴을 보였다. 청정하가 저한테 먼저 다가온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하긴, 청정하가 가람에게 먼저 가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여튼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아저씨, 조금 전에 리사한테 뭐라고 그랬어요? 저 망할 꼬마 녀석?

내 표정을 봤는지 청해솔이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리사, 무시해. 저 녀석 입이 좀 거칠거든.”

“네, 언니.”

착한 리사가 참아 보도록 할게요.

하지만 한 번만 더 망할 꼬마 녀석이라고 하면 리사는 참지 않을 거예요.

망할 꼬마의 손바닥 맛을 보여 주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람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당장 비를 그치게 할 모양새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얘들아!”

2층에서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렇게 놀고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니, 리사?”

“이제 곧 비가 그칠 거야! 나가서 놀 준비하자! 우리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내 말에 저세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렇게 비가 내리는데 그칠 거라고? 윤리사, 뭐 잘못 먹었어?”

잘못 먹은 거 없다, 이 자식아.

나는 저세상의 말을 무시하며 수영복을 챙겼다. 도윤이와 함께 게임을 하고 있던 단아도 수영복을 챙겼다.

“남자애들 나가!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거야!”

“한단아, 윤리사 말 믿는 거야?”

“응!”

단아가 저세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예 역시 읽고 있던 책을 덮고서 말했다.

“리사도 아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세상이 오빠?”

저세상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리사가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리사랑 내기 하자.”

“무슨 내기?”

“비가 그치면 세상이 오빠는 모래사장에 파묻히는 거야. 얼굴만 남기고. 대신 비가 안 그치고 계속 내리면 일주일 동안 세상이 오빠 동생 할게.”

“어차피 넌 내 동생이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이 오빠가 시키는 일 뭐든지 하겠다고.”

내 말에 저세상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좋아!”

저세상은 그렇게 곧장 방을 나갔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훗, 바보 같은 자식.

도윤이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저세상을 따라 나갔다. 단예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단이가 마지막으로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 전에 단이는 말했다.

“리사, 세상이 형을 모래사장에 파묻는 거 기대할게.”

우리 단이, 섬뜩한 말을 정말 부드럽게도 잘 하는구나.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단이야! 기대해!”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서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물을 마시러 방에서 나왔던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사, 갑자기 웬 수영복이야?”

“바다에서 놀려고!”

“뭐? 안 돼! 지금 밖에 비가……!”

“그쳤다!”

단아가 윤리오의 말을 끊고서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와, 윤리사! 네 말이 맞았어! 비 그쳤다고!”

단아가 펄쩍펄쩍 자리에서 뛰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리오 오빠, 이제 바다에 놀러 가도 되지?”

저세상 파묻으러 가야 하거든.

그렇게 나는 뱀 섬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쌓을 준비를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