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4)
윤리오와 윤리타는 윤사해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2층에서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곧장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는 소리 질렀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나도 아빠랑 전화할래!”
“리사, 그러다 넘어질라!”
윤리오가 나를 타이르고는 내 손에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나는 색색 숨을 몰아 내쉬며 물었다.
“아빠?”
-응, 리사.
“아빠!”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빠, 왜 그동안 전화 안 했어? 아빠 전화 엄청 기다렸는데!”
-미안하구나, 처리할 일이…….
윤사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아빠?”
-잠깐, 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딸?
“……엄마?”
-오, 내 목소리 안 잊었구나? 오빠들은 어디 있어?
“옆에 있는데.”
나는 윤리오와 윤리타를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바꿔 드릴까요?”
조심스럽게 묻기 무섭게 에일린 리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어차피 네 오빠들도 엄마 전화 그렇게 안 반길걸?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윤리오라면 몰라도 윤리타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에일린 리와 통화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엄마.”
-자기야, 우리 딸이 나보고 엄마래, 엄마. 기특하지 않아? 아줌마라고 불러도 모자랄 판에 꼬박꼬박 엄마라고 불러 주는 게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전화 내놔!
-딸, 들었지? 아빠가 휴대폰 내놓으라네? 할 말 있으면 어서 해.
우리 아빠, 아무래도 미국에 가서 엄마랑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몰라보게 가까워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어쨌든 나는 에일린 리의 물음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 바꿔 줄게요.”
-응? 누구 오빠?
“리타 오빠요.”
내 대답에 윤리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곧장 윤리타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나한테서 휴대폰을 받아든 윤리타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흠, 엄마?”
그는 곧 자리를 피해 에일린 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윤리오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랑 좋은 추억도 없으면서 되게 반가워하네.”
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청해진이 말했다.
“너희 어머니라면 에일린 리 맞지? 미국의 각성자 특별 관리국인 ASMO의 워싱턴 지부장.”
“청해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중학생 때인가?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일하고 싶었거든.”
“영어도 못하면서.”
“시끄러.”
청해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쨌든, 그때 네 어머니를 알게 됐는데 너랑 완전 똑같이 생겼더라?”
그 말에 이번에는 윤리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나는 미간을 한껏 좁히며 고개를 기울었다.
에일린 리와 똑같이 생긴 건 윤리오가 아니라 윤리타였기 때문이다.
윤리오가 에일린 리와 닮은 건 벚꽃잎을 닮은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때, 윤리타가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윤리사, 엄마가 너 바꿔 달래.”
“엄마가?”
“응, 자 어서 가져가.”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고는 목소리를 내었다.
“여보세요, 엄마?”
-딸, 네 큰 오빠는 뭐하고 있니?
“리사 옆에서 해진이 오빠랑 놀고 있는데요.”
-해진이?
윤사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린 리에게 청해진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 설명이 끝나자마자 에일린 리가 말했다.
-딸, 네 큰 오빠랑 작은 오빠한테 청(淸)의 아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해.
“왜요?”
-그냥, ‘네, 알겠습니다’하고 답해 주면 안 될까?
“네, 안 돼요.”
까르르,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일린 리는 한참을 웃고 난 뒤에야 내게 말했다.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당돌한 거야?
“아빠요.”
-미안하지만 네 아빠는 당돌함과는 거리가 멀단다? 숫기가 없다면 몰라도 말이지.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리 내놔!
우당탕,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목소리가 바뀌었다.
-리사?
“아빠!”
-후우, 미안하다. 네 엄마가 한 소리는 무시하렴.
“응.”
무시하라면 무시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윤사해가 기특하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내게 물었다.
-오빠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있니?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오늘 친구들이랑 모래성 쌓으면서 즐겁게 놀았어! 세상이 오빠는 단아하고 도윤이랑 물놀이 했고!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는 해진이 오빠랑 물놀이 했어!”
-그래, 즐겁게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응! 아빠가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윤사해에게 물었다.
“아빠, 언제 돌아와?”
-으음, 리사가 열 밤만 더 자고 나면 아빠가 돌아와 있을 거야.
“아빠, 리사 열 살인 거 알지?”
그러니까 열 밤만 자면 된다거나 그런 소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
아니나 다를까? 윤사해가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미안하구나, 리사.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빠도 잘 모르겠네.
나는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이어진 윤사해의 말에 나는 곧장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리사. 아빠가 우리 리사랑 오빠들 선물을 보내 놨단다. 친구들과 다 놀고 집에 가면 도착해 있을 거야.
“진짜?”
-응, 그러니까 아빠 돌아갈 때까지 오빠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단다. 알았지?
“응!”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다 보고 말았다. 윤사해와 통화를 하고 싶어 안절부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고 있는 저세상을.
어떻게 할까? 이대로 전화를 끊고 저세상을 놀릴까? 아니면…….
‘에휴, 나는 너무 착하다니까?’
저세상을 놀리기는 개뿔, 나는 윤사해에게 말했다.
“아빠, 세상이 오빠 바꿔 줄게!”
저세상이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세상이 오빠, 뭐해? 아빠 전화 안 받을 거야? 이대로 끊으면 돼?”
“아니! 바, 받을 거야!”
저세상이 황급히 나한테서 휴대폰을 빼앗아갔다.
그는 윤사해에게 얼마나 재미있게 놀고 있는지를 말해 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윤리사는 제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요!”
저 자식이 누구를 잘 보고 있다는 거야?
어쨌든 저세상은 그렇게 윤사해와의 전화를 끝냈다.
이후, 마지막으로 윤리오가 윤사해와 대화를 나누고는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뚝, 전화가 끊기자마자 윤리타가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한테 괜히 아빠 보낸 것 같아.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을 줄이야.”
“언제는 엄마 걱정 엄청 하더니?”
“내가 언제!”
“아빠가 엄마 소식 알려 줬을 때부터 그랬잖아.”
“아니거든!”
윤리오와 윤리타가 시답잖은 일로 싸우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있던 청해진이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만.’
나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내 웃음소리가 에일린 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에이! 아니겠지!’
에일린 리에게 물려받은 건 뛰어난 외모뿐이어야만 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데 난데없는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고마워.”
“……?”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세상이 오빠, 나한테 그런 거야?”
“그럼, 내가 고맙다고 할 사람이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우리 저세상이 무슨 일이래!
나는 활짝 웃음을 터트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빠, 리사가 조금 전에 잘 못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 줘!”
“싫어!”
저세상이 질색했다. 아니, 그렇게 싫어할 일은 아니잖아.
불퉁하게 그를 쳐다보는데 아래쪽에서 류화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길드장님이랑 전화 잘 끝냈니?”
“네에!”
“그럼 내려와! 해솔이가 아이스크림 사 왔다고 먹으러 오라네?!”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고요? 어디에서요?”
“몰라, 해솔이 보좌관이 사 왔던데? 어쨌든 빨리 내려와!”
청해솔의 보좌관이라면 가람이 푹 빠져 있는 ‘정하 아씨’지?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초랭이일 거라고 추측되는 남자이기도 하고.
‘초랭이가 아닌가?’
초랭이라면 그 성격에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다녀왔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뱀 섬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인 남해까지는 배로도 1시간 거리인데 말이지.
“리사, 아이스크림 안 먹을 거야?”
“아니 먹을 거야!”
나는 후다닥, 오빠들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리사 아씨.〗
때마침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있는 가람과 마주쳤다.
〖이것 참 맛이 있소. 쇤네가 이 섬에 갇혀 있을 동안 문명이 배로는 발전했구만.〗
뭐, 쭈쭈바가 문명의 이기이기는 하죠.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뱀 섬에서 지낸 지 이제 삼 일째.
앞으로 남은 나흘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남은 나흘 내내 비가 쭉쭉 내릴지도 모르고 말이지.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