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2)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면 상황은 이랬다.
“거주자라고?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뚜렷하지 않아?”
청해솔의 말에 청정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것도 잠시, 청정하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가람에게 물었다.
“당신 거주자야?”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고보니 리사 아씨도 ‘거주자’라는 단어를 거론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람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거주자들이 미지 영역에 거주하기 전부터 이 섬에 묶여 있었나 본데.”
“묶여 있었다고? 설마, 저 녀석이 이무기라는 거야?”
“이 섬에 있을 만한 인외의 존재는 이무기뿐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청정하가 허, 웃음을 흘리고는 중얼거렸다.
“이무기도 거주자로 취급받는구나? 용도 아니고.”
그것을 듣고서 가람이 말했다.
〖정하 아씨, 쇤네는 용이외다. 아씨에게 여의주를 건네준 후, 그것을 잃어버려 이렇게 됐지마는…….〗
“여의주? 거주자의 부산물 중에서도 가장 보기 어렵다는 그거?”
청정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있잖아. 혹시 보여 줄 수 있어?”
〖아씨께서 원하신다면 내 언제든 보여 줄 수 있소이다.〗
가람이 그렇게 말하고는 청정하에게 여의주를 보여 주었다.
붉게 빛나고 있는 여의주의 자태에 청정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청해솔 역시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원하신다면 드릴 수 있소이다, 정하 아씨.〗
“진짜?”
〖으음, 생각해 보니 안 되겠소.〗
“뭐야……?”
청정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제는 줄 수 있다더니만, 이제는 또 안 된다고 하다니.
‘왜 이렇게 줏대가 없어?’
청정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람은 심각했다.
괜히 여의주를 청정하에게 줬다가, 오래 전과 똑같이 이 섬에 묶여 버리면 어쩌나 했기 때문이다.
〖정하 아씨, 쇤네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아니.”
〖곁을 따라다니게 해 주오.〗
“부탁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게 뭐? 곁을 따라다니게 해 달라고?”
절대 싫었다.
청정하가 자리에서 펄쩍 뛰고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였다.
“좋아요, 가람.”
“야!”
청해솔이 웃는 낯으로 가람의 동행을 허락했다. 청정하가 이를 으득 갈았다.
“네가 뭔데 허락하는 거야?”
“청(淸)의 가주로서 허락하는 건데, 불만이 많나 봐?”
청해솔이 씨익 웃고는 청정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에게 속닥거렸다.
“청정하, 상대는 거주자야. 우리와 같이 청(淸)의 피를 일부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정말 거주자라고.”
“그게 왜.”
거주자는 인간을 해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청정하는 심드렁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청정하, 가람은 미지 영역에 거주하고 있는 거주자가 아니야.”
청해솔의 말에 놀란 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청해솔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가람이 과연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과 똑같이 인간을 해칠 수 없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서 뭐 어쩌자고.”
청해솔이 눈웃음을 지었다.
“옆에 두자는 거야.”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공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기껏 불러낸다고 해도, 전투에 한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제약이 걸려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울지도 모르는 거주자란다.
‘놓칠 수 없지.’
훗날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일. 청해솔은 가람을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네 옆이라면 몰라, 내 옆에 두는 거잖아! 나는 싫어!”
“그렇게 질색하지 말고, 돌아가면 ‘정하’라는 이름을 한 번 찾아 봐. 네 가문의 족보. 거의 복구가 됐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가람께서는 네 선조 중 한 명을 너한테서 떠올리고 저러는 것 같으니.”
청정하가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남해에 돌아가자마자 족보를 뒤져 볼 생각이었다.
청정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가람을 불렀다.
“이봐.”
〖네, 정하 아씨.〗
“나를 따라다녀도 좋아.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뭐든 말씀해 주시오, 정하 아씨.〗
“그 ‘아씨’ 소리 금지야!”
가람이 시무룩한 얼굴을 보였다.
〖알겠소…….〗
그것만 지키면 함께 다녀도 된다지 않나? 아쉽기는 하지만 가람은 기꺼이 남자를 ‘아씨’라고 부르는 걸 포기할 수 있었다.
가람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그와는 달리 청정하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가람은 청정하를 따라다니게 됐다.
물론, 윤리사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야…….
“해솔이 언니, 저 오빠 옆에 있는 잘생긴 오빠는 누구에요? 없었던 것 같은데.”
“맞아, 해솔아. 그 사람 누구야?”
“조사할 게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더니 그게 아니었나 봐?”
묻는 질문들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
류화홍과 최화백이 가람의 정체를 두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청해솔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청해솔이 가람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청(淸)의 가신은 아니고, 내 보좌관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야.”
그 말에 보좌관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와는 달리 가람은 꿈만 같다는 듯이 헤실거렸다.
“너도 아니고 네 보좌관과 인연이 깊은 사람을 옆에 둔다고? 그래도 되는 거야?”
“안 될 게 뭐가 있어?”
청(淸)의 가주님께서 불만이 있으면 누구든 말해 보라는 얼굴로 방긋 웃었다.
“어쨌든, 이 사람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있는 듯 없는 듯 있을 거거든.”
그게 가능한 외모가 아닌데요, 해솔이 언니.
류화홍과 최화백도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해솔은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그보다 리사, 친구들이랑 물놀이 안 하니? 어제의 폭풍우로 물이 굉장히 맑아서 놀기 좋을 텐데.”
“오늘은 구경만 하려고요! 괜히 들어갔다가 바닷물을 실컷 마실 것 같아서요!”
나는 활짝 웃으며 단아와 도윤이, 저세상이 놀고 있는 쪽을 가리켰다.
도윤이가 단아 때문에 한껏 바닷물을 마시고서 격하게 기침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청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네. 그래도 너무 앉아있지는 마.”
“네에!”
나는 힘차게 대답하며 웃었다. 청해솔이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류화홍, 최화백. 늘어져 있지만 말고 애들 잘 보고 있어.”
“네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잘 보고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볼 일 보러 가세요. 조사 아직 다 안 끝났을 거 아니야.”
최화백의 말에 청해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사는 끝났어.”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숙소.”
“숙소에는 왜?”
류화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해솔에게 물었다. 청해솔이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슬슬 저녁 준비해야지.”
그 말에 류화홍과 최화백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네가 왜 준비해?! 차라리 네가 애들 보고 있어. 나랑 류화홍이 준비할게!”
“됐어. 청(淸)의 가주면 주방에 못 들어가나? 그리고.”
청해솔이 보좌관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보좌관한테 시킬 거야.”
보좌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에게만 시킨다는 것을 보니, 청해솔은 가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가람이 청해솔의 보좌관에게 말했다.
〖쇤네가 도와주겠어.〗
보좌관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가람, 도대체 저 오빠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가람과 보좌관의 사이가 어떻든간에 청해솔은 말했다.
“그리고 내가 대접하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는 청해솔의 두 눈은 내게로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전, 가주 경합전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지.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천천히 놀다 들어와.”
청해솔은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후웅,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보좌관과 가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단예가 입을 열었다.
“언제 봐도 멋진 분이시네.”
“누구? 해솔이 언니?”
“응.”
단예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단아가 저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그리고 가주님처럼 된다고 하면 우리 쪽에서 환영이지. 할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실 거야.”
글쎄, 단아가 청해솔처럼 된다라.
“흐아앙! 단아야, 그만! 나 이제 안 놀래! 안 놀 거야!”
“백도윤, 이 울보야! 어디를 도망가? 이리 와! 어어? 저세상! 너는 또 어디 가는데!”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청해솔이 단아처럼 되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도윤이의 울음소리에 최화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거기 너. 친구랑 사이좋게 놀아야지. 왜 그렇게 괴롭혀?”
“괴롭힌 적 없는데요! 아저씨 눈은 장식이에요?”
최화백은 이번에도 본전을 찾지 못했다. 단아의 말본새에 최화백이 충격을 먹은 듯, 입을 멍하니 벌렸다.
단예와 단이는 사이좋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터넷 방송을 너무 찾아 보는 것 같더라니. 셋째가 안 좋은 말을 배워 온 것 같구나, 첫째야.”
“그러게.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인터넷을 끊거나 해야겠어.”
단아야, 미리 애도를 표할게.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숙소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자마자 가람을 붙잡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남자와 어떻게 됐고,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네? 여의주를 부서뜨릴 거라고요? 도대체 왜요?!”
나는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대신 가람의 충격적인 다짐을 듣게 되었다.
환장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