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용이기를 포기한 이무기(1)
청정하는 이무기가 있을 법한 곳을 꼼꼼하게 확인해 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청해솔한테서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아예 찾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
그 성격으로 생각해 보건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청정하가 바다 속을 탐험할 때였다.
〖……씨! 아씨!〗
“뭐야?”
저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라니.
충분히 두려워할 상황이었으나 청정하는 유랑단의 아홉탈, 초랭이인 몸이었다.
그런 걸 무서워할 리가 없었다는 거다.
하지만.
〖아씨! 정하 아씨!〗
“우왁! 미친!”
웬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정하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선 물었다.
“뭐야? 청(淸)의 사람이야?”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는 청(淸)의 색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얄 뿐이었다.
청정하가 미간을 좁혔다.
“너 뭐야?”
〖아씨…….〗
“아씨고 나발이고 너 뭐냐고.”
청정하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부채가 쥐여 있었다.
청정하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웬 남자를 향해 당장에라도 부채를 휘두르려는 찰나.
“그만.”
청해솔이 나타났다.
“어르신을 아는 것 같은데 위협은 하지 말지 그래?”
“나는 모르는 인간인데? 그보다.”
청정하가 미간을 한껏 좁히며 남자에게 물었다.
“너 인간 맞아?”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뱀 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이무기, ‘가람’이었다.
청정하의 날선 목소리에 가람이 울먹이며 말했다.
〖정하 아씨, 쇤네요.〗
“쉰 내?”
“쇤네라고 멍청아. 어르신, 그새 청력이 떨어졌어?”
“놀리지 말지?”
청해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옆의 어르신은 생각 외로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더 놀리고 싶지마는.’
지금은 눈앞의 남자에 집중해야할 때였다. 이곳을 위협할 것 같으면 처리해야했으니까.
청해솔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정체를 밝혀 줬으면 하는데, 이름이 어떻게 될까요?”
〖가람이라고 하오.〗
“가람?”
청해솔이 청정하를 바라보았다. 저 이름을 아느냐는 얼굴이었다. 청정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신 도대체 누구야?”
〖쇤네요.〗
“아니,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고 해도 그러네! 나를 누구랑 착각하는 거야?!”
〖당신은 정하 아씨 아니요?〗
“내 이름이 청정하인 건 맞아!”
청정하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내 어디를 보고 ‘아씨’라고 하는 거야? 나는 남자거든?!”
그 말에 가람이 울상을 지었다. 뒤늦게 윤리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윤리사는 자신이 누구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지 알고선 말했었다.
‘……그 사람은 남자였는데요?’
‘곱상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남자였잖아요.’
그때는 ‘남자라도 좋다’고 했었다. 사실,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정말 제 정인을 닮아 있었다. 아주 똑.
그렇기에 가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청정하에게 물었다.
〖언제 남자가 되었소?〗
“뭐라는 거야?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어! 얘 진짜 뭐야? 야, 청해솔! 가주님! 청(淸)의 영토에 웬 미치광이가 들어와 있는데 처단 안 해? 처단해주시죠?”
“우리 어르신께서 많이 당황하셨나 봐? 말이 많아졌어.”
“아, 어쨌든!”
청정하가 저 미치광이 좀 어떻게 해달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에 청해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흥분 가라앉히고 저 분께서 어떻게 말을 하고 계셨는지 생각을 좀 해 보지 그래?”
청정하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말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니.
그야…….
“너 뭐야.”
자신을 ‘가람’이라고 밝힌 남자는 단 한 번도 입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는 거다.
그러나 가람의 목소리는 분명 자신에게 닿았었다. 이게 가능한 경우는 단 하나.
〖정하 아씨께서 이 땅에 가둬 두셨던 이무기, 가람이오.〗
거주자뿐.
청정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청해솔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
“우와! 단이야, 단예야! 바다 좀 봐! 이제야 알았는데 바닷물이 엄청 맑아! 원래 이렇게 맑지는 않았었던 것 같은데!”
“뱀 섬의 바다는 폭풍우가 몰아친 후면 깨끗해진다고 해, 도윤아.”
“그렇구나! 단이 똑똑해!”
화기애애한 목소리 뒤로 단아가 구시렁거렸다.
“흥, 한단이가 뭐가 똑똑해? 내가 훨씬 더 똑똑해!”
단아야, 그건 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모래를 열심히 쌓았다. 우리 초등학생들은 지금 두 편으로 나누어져 모래성을 쌓는 중이었다.
지는 쪽이 뭘 하기로 했더라? 아, 오빠들 앞에서 엉덩이로 이름 쓰기 하기로 했었다.
쌍둥이는 청해진과 함께 어제 하지 못했던 물놀이를 신나게 하는 중이었다.
최화백과 류화홍, 우리의 보호자 분들께서는 더위에 지쳐 모래사장에 늘어져 버렸다.
같은 20대인 다섯 사람인데 왜 저렇게 다른지 모를 일이었다.
“류화홍, 나중에 청해솔한테 바람 좀 일으켜달라고 하자.”
“해솔이가 화낼걸.”
많이 더운 모양이었다. 하긴, 한 낮의 온도가 37도인 지금 땡볕의 아래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윤리사, 모자.”
“응?”
“모자 비뚤어졌어.”
아마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저세상이 내 머리에 씌여 있던 것을 바로 고쳐 주었다. 나는 모자챙을 한 번 매만지고선 웃었다.
“고마워, 세상이 오빠!”
저세상은 내 인사에 심드렁한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위로 금이 간 것은 금방이었다.
“저세상! 나랑 바다에 들어가서 놀자! 모래성 쌓는 거 지겨워!”
“뭐? 우리 내기 했잖아.”
“없던 일로 해!”
모래성을 쌓는 게 많이 지루했는지, 단아가 빼액 소리 지르고는 저세상을 잡아 이끌었다.
“백도윤! 너도 이리와!”
“응? 응!”
도윤이가 모래성을 쌓는 걸 멈추고는 단아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저세상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은 뭐.
“푸훕! 아, 짜!”
단아의 힘에 못 이겨 바닷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단아가 연신 기침을 터트리고 있는 저세상을 보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화가 났는지, 저세상이 단아를 향해 바닷물을 튕기기 시작했다.
즐겁게 노네, 우리 주인공님.
나는 모래성을 쌓는 걸 그만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사야.”
“단예야.”
단예도 모래성 쌓는 걸 그만뒀나 보다. 단예가 내 옆에 앉으며 미소를 그렸다.
“우리 셋째는 도대체 언제 철이 들지 모르겠구나.”
단예의 말을 뒤이어 단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아이답고 보기 좋은걸?”
단이야, 너도 애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쨌거나 보기 좋은 광경인 건 맞았다.
나는 그렇게 단이와 단예와 함께 나란히 파라솔 아래에 앉아서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 우리가 최화백은 신기했던 모양이다.
“너희는 가서 안 놀아?”
“네, 오늘은 물놀이하지 않고 친구들 노는 거 구경만 하려고요.”
“물놀이 해야지 저녁에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다는데?”
최화백은 우리에게 저런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리는 나란히 사이좋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최화백에게 보여 줬다. 최화백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아니면 말고.”
그 옆에서 류화홍이 키득거렸다.
“우리 화백이, 애들 놀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았네!”
“누가 본전도 못 찾았대?”
최화백이 불퉁하게 말했다.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고는 다시 친구들이 놀고 있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가서 안 노니?”
최화백과 똑같은 질문이 머리 위에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거참, 안 논다고 해도 그렇네, 또 누군가 하여 고개를 들었는데.
“언니!”
조사를 한답시고 자리를 떠났던 청해솔이 우리 뒤에 있었다. 초랭이로 추정되는 남자도 함께였다.
그리고…….
〖리사 아씨.〗
가람도 그들의 옆에 당당히 어깨를 펴고 서 있었다. 정확히는, 청해솔의 보좌관이라는 남자의 옆에서.
가람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나만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리고선 가람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상황이느냐는 소리 없는 나의 물음에 가람은 말했다.
〖리사 아씨, 눈이 너무 무섭소.〗
무섭다고만 하지 말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줘요! 내가 거주자였다면 당장 가람에게 남몰래 물어봤을 텐데!
아니, 잠깐만.
“해솔이 언니.”
“응?”
무슨 상황인지는 청해솔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저 오빠 옆에 있는 잘생긴 오빠는 누구에요? 없었던 것 같은데.”
기다렸다는 듯이 류화홍과 최화백이 말을 덧붙였다.
“맞아, 해솔아. 그 사람 누구야?”
“조사할 게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더니 그게 아니었나 봐?”
그 질문들에 청해솔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 분은 가람이라고 해.”
〖안녕하시오, 가람이오. 잠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느라 가주님의 손님 분들께 인사가 늦었어.〗
가람이 어색하게 입을 뻐금거리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다행히도 그것을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아, 가람. 청(淸)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청(淸)의 가신이겠지.”
“아하.”
이 자리에서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저 사람 청(淸)의 가신 아니라고.
우리보다 몇 배는 더 오래 산 갯지렁이라고 말이다.
정말이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