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뱀 섬(5)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초랭이.
지금은 ‘청정하’라는 제 이름으로 청해솔과 함께 하고 있는 그는 코를 훌쩍였다.
“감기?”
“그럴 리가.”
청해솔과 마찬가지로 청(淸)의 후손인 그가 감기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였다.
청정하가 손등을 들어 코 밑을 한 번 닦고는 말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탈쟁이들이 네 욕 하고 있나 보네. 배신했다고.”
청정하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누가 배신했다고? 애초에 우리는 동료였던 적 없거든.”
더욱이 청정하는 원래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탈이었다. 소속감 역시 별로 없었고.
그럼에도 유랑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건 단순했다.
원하기만 하면 청(淸)의 사람들을 마음껏 해칠 수 있었으니까. 이 탈 아래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서, 마음껏 복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청정하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청해솔을 쳐다봤다.
“뭘 봐.”
정말이지, 싸가지 없는 청의 가주님이셨다.
청정하가 찌푸린 얼굴로 청해솔한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그보다 왜 이렇게 으슬으슬하지? 진짜 감기가 오려나?”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우리 어르신께서는 개였나 보네.”
망할 가주님께서는 말 한 마디 역시 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청해솔을 불쾌하게 만들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청정하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장난해, 누나?”
“징그럽게 누나라고 부르지 말지?”
청해솔이 눈가를 찡그렸다. 청정하는 그에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나잇값도 못하고.
***
“정인을 봤다니요? 어디에서요?”
〖리사 아씨를 찾아온 처자가 있지 않소.〗
“해솔이 언니요?”
내 말에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새로 청(淸)의 가주가 되셨다는 그 아씨는 아니오.〗
“그럼, 누구요?”
청해솔 말고 나를 찾아온 처자는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질문에 가람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진달래꽃을 닮은 처자가 있지 않았소? 그분이었소. 그분이 내 정인이었소, 리사 아씨.〗
진달래꽃이라니.
그 순간 떠오른 건, 청해솔이 자신의 보좌관이라고 소개한 남자였다. 분명 짙은 분홍색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지?
그런데 가람이 착각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사람은 남자였는데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가람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곱상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남자였잖아요.”
〖그, 그런……!〗
가람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듯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라도 좋소.〗
아니, 그 남자 분께서 당신을 거절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가 없어져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 정인을 꼭 닮은 처자를, 아니 사내를 내 이리 놓칠 수는 없소.〗
“그래서요?”
〖곁을 지키겠소.〗
“……어떻게요?”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 그 곁을 지키겠소.〗
그거 완전 스토킹이잖아!
순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급히 팔을 들어 ‘X’자로 교차하며 빼액 소리 질렀다.
“안 돼요, 절대 안 돼!”
가람은 이제 여의주를 되찾은 용이었다. 그런 귀한 분께서 스토커라니! 그것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 수상쩍은 사람을 따라다니겠다니!
“다르게 접근해 봐요, 가람!”
걱정이 되어 그렇게 말했지만,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우나, 리사 아씨. 갑작스럽게 다가가면 내 정인께서는 놀라실 거요.〗
“그래서 몰래 다가가겠다고요?”
나는 질색하며 말을 덧붙였다.
“저라면 몰래 다가오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아요. 놀라기도 하고요.”
〖아…….〗
“그보다 그 사람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요? 그냥 닮은 사람일 수도 있고요.”
그냥 다가가지 마요, 가람.
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가람의 몸이 환하게 빛이 났다.
“가, 가람?”
〖그럼, 이럼 어떻소?〗
가람의 몸을 환하게 감쌌던 빛이 이내 사람의 형태를 띠었다.
“……가람이에요?”
〖그렇소이다, 리사 아씨.〗
빛이 걷히고 드러난 사람은 끝내주는 미남이었다. 윤사해 뺨을 가볍게 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끝내주는 미남이었다.
“와…….”
나는 멍하니 감탄했다.
가람, 그냥 새로운 여자 만나면 안 되나요? 제가 아는 사람은 없어도 소개시켜 줄게요.
가람의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봤기 때문일까? 그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리사 아씨? 이상하오?〗
“아니요! 이상할 리가 없잖아요!”
가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눈이 삔 사람일 거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젓고는 말했다.
“가람이 너무 아까워서요.”
〖그 말은 쇤네가 정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오?〗
은방울꽃을 닮은 눈망울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가람에게 정인이라는 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가람이 너무 잘생겨서요!”
〖정인 역시 아름답다오.〗
네네, 그러시겠죠.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귀가 멀어진다더니…….
어쨌든간에!
“뭐, 정인 분 곁을 지키고 싶다면야 그 모습으로 다가가는 게 좋겠네요. 몰래 말고요.”
〖정인께서 놀라지는 않겠소?〗
“가람의 외모를 보고 놀랄 것 같기는 해요. 너무 잘생기고 너무 아름다워서요.”
내 칭찬에 가람이 쑥스럽게 두 뺨을 붉히며 말했다.
〖과찬이오, 리사 아씨.〗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뭘요. 저는 사실만을 말한 것뿐인데요.”
그때였다.
“리사? 윤리사!”
청해솔을 끊임없이 찬양했던 단아가 나를 불렀다.
“이제 바다에 갈 거래! 어서 돌아와! 안 그러면 네 첫째 오빠가 찾으러 간다는데?! 아, 네 첫째 오빠 말고 저세상이 직접 가겠대!”
안 돼! 저세상이 가람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을 거야!
나는 황급히 외쳤다.
“알겠어, 단아야! 바로 갈게!”
그러고는 가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모쪼록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요, 가람.”
〖여러모로 고맙소이다, 리사 아씨.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소.〗
나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에요! 폭풍우를 걷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걸요!”
가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장난 가득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다음 주까지 이 섬에 있을 테니까요!”
〖정말이오?〗
“네, 그러니까 저 보고 싶으면 놀러 오세요! 정인 분은 데려오지 말고요!”
데려왔다가는 그 고운 뺨을 때려 버릴 수도 있거든요.
나는 뒷말을 삼키며 그렇게 가람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알겠소이다, 리사 아씨. 그 걸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오.〗
가람이 고운 얼굴에 미소를 걸치며 나를 향해 한껏 고개 숙인 것을.
***
가람이 정인을 닮은 사내에게 다가가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한 그 시간.
“누나.”
청정하는 청해솔을 졸래졸래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중이었다.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말지?”
청해솔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나보다 수백이나 더 먹은 몸이지 않아? 왜 자꾸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징그럽게?”
“그야, 남들이 보기에 누나가 누나처럼 보일 테니까.”
청정하가 말해 뭐하냐는 듯한 얼굴로 헤실거렸다. 그 꼴이 보기 싫어져 청해솔은 몸을 홱 돌렸다.
“아, 누나~!”
초랭이가 칭얼거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뭐.”
“이무기를 꼭 찾아야할까? 괜히 잠자고 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
“글쎄.”
바닷가 근처에 선 청해솔이 청정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너 지금 바다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들켰네.”
청정하가 짜증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청해솔이 그런 청정하가 같잖다는 듯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서 찾아봐.”
“진짜 괜히 이무기 소리를 했어!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청정하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바다 속에 풍덩 몸을 던졌다.
청해솔은 팔짱을 낀 채, 청정하가 들어간 바다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무기를 찾는 이유야 간단했다.
‘아이들이 그 심기를 건드렸다가 화를 입으면 어쩌려고.’
더욱이 일전, 큰 폐를 끼쳤던 윤사해의 아이들이 있지 않나? 예민해 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때였다.
〖정하 아씨!〗
쉬이 잊기 힘든 외모를 지닌 남자가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버렸다.
“……뭐지?”
정하라니? 그건 능글맞기 그지없는 늙은이의 이름이지 않나? 그런데 아씨라니?
청해솔이 멍하니 거품이 일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였지?”
청해솔은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