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뱀 섬(4)
앗싸! 성공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이무기를 바라보았다.
“됐죠?”
그런데 이 망할 이무기가 커다란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또 왜 우는 거예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이무기가 부서진 비석으로 스르륵 몸을 움직였다.
〖쇤네는 정인이 왜 그렇게 가 버렸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오.〗
비석 사이로 구슬이 보였다. 가람의 기다란 혀와 똑같은 붉은 빛을 띠는 구슬이.
〖그런데 이제 알겠구려. 왜 정인이 청(淸)의 품으로 가 버렸는지. 왜 이 비석을 세워 쇤네를 이 섬에 묶어 두었는지 말이오.〗
이무기가 기다란 혀로 산산이 조각난 비석 사이에 있던 작은 구슬을 들어 올렸다.
그걸 왜 굳이 혀로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거, 가람 님 거예요?”
〖그렇다오, 리사 아씨. 쇤네의 여의주지.〗
여의주라면……
“가람 님, 용이었어요?”
용만이 가지고 있다는 신묘한 구슬이잖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가람이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 옛 일이오.〗
어쨌든 용이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이무기가 됐어요? 아니, 어떻게 이무기가 된 거예요?”
너무 실례인 질문인가 싶었지만 가람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하며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여의주를 정인께 드렸다가 그대로 잃어버렸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 비석 안에 있었구려.〗
가람의 큰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뚝뚝 흐르는 중이었다. 사연이 아주 많아 보였다. 듣기에 아주 곤란한 사연이 말이지.
평소라면 사연이 많아 보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내 할 일 끝냈다며 돌려보내달라고 했겠지만.
“정인 분께 왜 드렸는데요?”
아주 오랫동안 이 섬에 묶여 있었을 이무기의 말동무를 한 번 해 주기로 했다.
나는 젖은 수풀 위에 털썩 앉고선 이무기에게 물었다. 이무기가 혀로 들고 있던 여의주를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소원을 빌었으면 했다오. 내가 인간이 되기를, 그렇게 하여 정인의 곁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오.〗
“이무기인 채로, 아니. 용인 채로도 그럴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결국 나만 남게 되지 않겠소? 하다못해 나는 바랐다오. 정인께서 자신의 병을 내 여의주로 고치기를 말이오.〗
가람은 말했다.
자신의 정인은 불치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고.
〖정인께서는 병으로 인해 약해진 몸으로 이 섬에 요양을 왔었다오.〗
그렇게 해서 가람은 제 정인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뻔했다.
가람은 자신의 정인에게 한 눈에 반했고, 작고 가녀린 손에 여의주를 쥐여 주었다.
여의주의 주인은 상대에게 소원을 강요할 수 없기에, 가람은 바라기만 해야 했다.
제 정인이 자신의 소원을 알아 주기를 말이다.
하지만 정인은 가람의 바람을 알아 주지 못했고, 그대로 여의주를 쥐고 섬을 떠나게 됐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 비석 안에 쇤네의 여의주가 있었다니.〗
“정인 분께서 가람이 많이 걱정됐나 봐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람을 인간으로 만들자고 소원을 빌자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치병이 걱정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치병을 낫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자니…….”
결국, 가람은 또 혼자 남게 될 게 뻔했다.
가람이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가는 제 병이 결국 저를 죽일 텐데, 그때도 가람은 혼자 남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 가람이 걱정됐나 봐요.”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홀로 남겨진 슬픔에 그 역시 세상을 저버릴까 봐.
내 말에 가람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희미해지는 얼굴이었는데 어떻게 하오, 리사 아씨. 너무 보고 싶소. 바보같이 착했던 나의 정인이 너무나도 보고 싶소.〗
이무기가 얼굴을 땅에 처박고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가람의 동그란 이마를 토닥여줬다.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가람은 이제 자유롭게 이 섬을 나갈 수 있잖아요? 한 번 정인을 찾는 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때요?”
그 정인이란 분께서 환생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람에게는 삶의 목표가 될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가녀린 이무기께서는 거주자의 공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나 역시 거주자의 공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랑야나 태랑.
윤사해와 계약을 한 도깨비에게 이 이무기를 거주자의 공간에 데려갈 수 없겠냐고 묻고 싶어도 말이지.
‘아빠는 지금 미국에 있는걸.’
더욱이 윤사해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명해도 문제일 것 같았다.
아마, 엄청 혼이 나겠지.
‘겁도 없이 밤에 웬 갯지렁이를 따라 나갔느냐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가람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 주는 거였다.
다행히도 내 말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그래야겠소, 리사 아씨.〗
가람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정인께서도 나를 그리워할 게 분명할 테니, 찾으러 떠나봐야겠소.〗
정말 죄송하지만, 가람 님의 정인 분께서는 당신을 잊지 않았을까요?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 치미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가는 눈물 많은 이무기는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게 분명했다.
‘그럼, 나는 또 달래 줘야겠지.’
상상만으로도 싫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방긋 웃으며 가람에게 말했다.
“그럼, 가람. 이제 저를 숙소에 데려다주지 않을래요?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아무렴,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겠소. 정말 고마웠소이다.〗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뻐요.”
살다 살다 이무기를 돕게 되다니.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이무기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만이 기억할, 이무기와의 소중한 추억이 생기게 됐다.
그래, 그렇게 될 줄 알았었지.
***
온종일 몰아친다던 폭풍우는 아침이 되기 무섭게 수그러들었다.
“오늘 폭풍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못 놀 거라더니! 최화백, 예언 모두 틀렸대요!”
“폭풍우가 몰아친 건 맞잖아. 그리고 날씨는 원래 시시때때로 변하는 거라 맞추기 어렵다고.”
류화홍과 최화백이 아침부터 기운 좋게 티격태격했다.
최화백의 말대로 날씨란 것은 원래 시시때때로 변하는 거였다. 하지만 아침까지 몰아쳤던 폭풍우가 수그러든 것은…….
‘가람 때문이겠지?’
늦은 밤, 가람은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며 말했었다. 저를 도와준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을 해 주겠다고.
그게 이건가 보다.
“날씨 좋다…….”
나는 난간에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지난밤을 거의 새다시피 해서 피곤했다.
그렇게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러게, 날씨 좋네. 계속 폭풍우가 몰아치면 억지로라도 날씨를 잠재우려고 했는데 말이야.”
단조로운 목소리.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해솔이? 우와 해솔이다!”
최화백가 티격태격 싸우고 있던 류화홍이 밝게 외쳤다. 마찬가지로 그와 입씨름 중이었던 최화백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청 가문의 가주님께서 귀한 걸음을 해 주셨네.”
“놀리지 마, 최화백.”
어깨 위로 푸른 두루마기 코트를 걸친 청해솔이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때마침 숙소 밖으로 나오던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솔이 누나?”
“안녕, 리오.”
“네, 누나. 안녕하세요? 저희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 다행이네. 불편한 점은 없니, 리오?”
“없어요. 그런데…….”
윤리오의 시선이 청해솔 뒤로 향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해솔의 뒤에 그녀보다 한 뼘 작은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을 알아차린 청해솔이 제 뒤에 있던 남자를 소개해 줬다.
“얘는 내 보좌관.”
보좌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것 아닌가? 나이를 암만 높게 잡아 봐도 고등학생 같은데?
그때, 윤리오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청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못 본 얼굴인데?”
“그럴 수밖에. 내가 훗날을 위해 꽁꽁 숨겨 뒀던 녀석이거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청해진이 눈가를 찡그렸다.
“누나, 어릴 적부터 가주 자리는 줘도 안 가진다고 했잖아. 그런데 뭔 훗날을 위해.”
“그랬다면 그럴 줄 알렴, 동생아.”
청해솔이 동생의 말을 매섭게 끊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게 놀고 있니, 리사?”
“네? 네, 언니!”
나는 활짝 웃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엄청 즐겁게 놀고 있어요!”
이무기도 봤고 말이죠.
나는 뒷말을 삼키며 배시시 웃었다. 그에 청해솔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 참 다행이네.”
그러고는 숙소 밖에 나와 있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놀도록 해. 너희 얼굴 보러 온 건 맞지만, 섬에 대해 조사할 게 있어서 온 거기도 하거든.”
그러고는 청해진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조사인지 말해 줄 생각 없으니까 궁금해하지 말고.”
청해진이 뜨끔하는 얼굴을 보였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청해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살랑이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청해솔과 그녀가 데리고 온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다니, 참으로 청해솔다웠다.
“멋지다……!”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옆을 쳐다봤다.
“단아야?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단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윤리사, 저 언니 그 언니지? 청 가문에서 재수탱이 멋지게 엿 먹였던 언니!”
재수탱이라면 청류하를 말하는 거겠지.
청류하는 청해솔을 죽이고자 유랑단에게 사주한 것이 들켜 가문 내에서 재판 중이라고 들었다.
‘아주 혼쭐이 났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단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저 언니처럼 되고 싶다!”
단아가 청해솔과 같은 카리스마라.
상상이 잘 되지 않아 나는 말없이 미소만 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아는 청해솔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웃고 있는데, 숙소 뒤로 웬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움직인 그림자. 분명, 가람의 것이 분명했다.
“윤리사? 야, 어디가!”
“금방 돌아올게!”
나는 후다닥 숙소 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람!”
지난밤보다 작아진 가람이 똬리를 틀고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또 왜 울고 있어요? 그보다 섬 안 떠났던 거예요?”
〖떠나려고 했다오. 리사 아씨에게 인사한 후 내 정인을 찾아 나서려고 했는데.〗
“그런데요?”
〖보고 말았소, 내 정인 님을.〗
“……!”
저게 무슨 소리래?
나는 동그랗게 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