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뱀 섬(3)
나는 비명을 지른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단예와 단아는 여전히 단 잠에 든 채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그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무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영 아씨?〗
“유, 유영? 그게 누군데요?”
〖아, 나이가 나이인지라 쇤네가 깜박했구려.〗
스르륵, 갯지렁이가. 아니, 이무기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영이란 이름은 버리고 지금은 사희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내 들었네만은…….〗
이무기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런데 무슨 일로 어린 모습으로 나타났소?〗
“저는 이무기… 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요…….”
〖흐음? 그게 무슨 소리요?〗
“저는 사희라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제 이름은 리사예요, 윤리사.”
〖윤리사……?〗
이무기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당신은 사희 아씨를 꼭 빼닮았소이다.〗
그러니까 사희라는 사람 모른다고 해도 그러네!
나는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는 이무기에게 말했다.
“어쨌든 리사는 사희란 사람이 아니에요!”
그 순간이었다.
후두둑, 이무기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 곤란하게 갑자기 왜 울어?!
〖그대가 사희 아씨가 아니라면, 쇤네는 어찌하면 좋소이까?〗
“네……?”
〖쇤네는 계속 이 섬에 묶여 정인을 그리워해야하는 것이오?〗
정인이라니.
아무래도 이무기와 지독하게 얽혀 있는 사랑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엮이면 굉장히 곤란한, 그런 사랑 이야기가 말이다.
때문에 나는 모른 척, 무시하려고 했다. 그래, 그러고 싶었다는 거다.
뚝뚝,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는 눈물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얀 수염이 달린 갯지렁이주제에 우는 모습이 왜 저렇게 애처로워 보이는 거야!
결국, 오지랖이 발휘되고 말았다.
“이무기 님이 사희란 사람에게 한 부탁이 뭔데요?”
〖사희 아씨 대신 쇤네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오?〗
“일단은 들어보고요. 그보다 목소리 좀 낮춰요. 제 친구들이 깨겠다고요.”
이무기가 방 안을 흘긋거리더니 혀를 길게 내빼었다.
〖그럼, 리사 아씨의 친구분들이 깨지 않도록 자리를 옮깁시다.〗
“네……?”
휘리릭, 이무기의 기다란 혀가 내 몸을 그대로 감쌌다. 말캉거리는 감촉에 입이 쩌억 벌어졌다.
“흐아악!”
나는 그렇게 숙소를 벗어나게 됐다. 내 몸을 혀로 감싼 이무기는 나를 제 등에 올려 태우고는 웃었다.
〖리사 아씨는 정말 사희 아씨가 아니구려. 사희 아씨는 쇤네가 이럴 때마다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셨는데 말이지.〗
“그 사희란 사람은 심장이 두 개였나 봐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웃었다는 거지?!”
내 말에 이무기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희 아씨의 심장은 두 개가 아니었소. 없었지. 아니, 무수히 많았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이겠구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지금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 맞지? 내 주위로 빗방울이 빗겨가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무기가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이무기는 저로 인해 부서지는 나뭇가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사희’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서 말이다.
〖사희 아씨의 심장은 그림자였으며, 그림자가 지지 않는 한 그분은 영원토록 존재할 수 있었지.〗
그림자가 지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빛이 있으나 없으나 존재하는 게 그림자잖아?
“그 사람, 무적이었겠네요.”
〖암, 그 대단하신 청(淸) 도령께서도 사희 아씨의 무위에는 혀를 내둘렀소이다.〗
청(淸) 도령이라니. 도대체 이 이무기, 몇 백 년 묵은 구렁이인거지? 몇 백 년이 아니라 몇 천 년일 수도 있었다.
생각하기 까마득한 숫자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윤리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이무기야. 나보다 수십 배는 오래 살았을 생명체라고.
그때였다.
〖도착했소이다, 리사 아씨.〗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이무기가 야트막한 동산 위에서 멈춰 섰다. 동산 위에 웬 비석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무기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닥에 내려주고는 말했다.
〖쇤네는 사희 아씨께 저 비석을 부숴 달라 부탁했소이다. 하지만 사희 아씨는 쇤네의 부탁을 잊어버렸는지, 부숴 주러 오겠다하더니 소식이 끊기고 말았지 뭐요.〗
“혼자서는 저 비석을 부서뜨릴 수 없나 봐요?”
내 말에 이무기가 비석 근처로 스르륵, 다가갔다.
하지만 이무기가 비석 근처에 다가가자마자 파지직, 전기가 튀었다.
“괘, 괜찮아요?”
이무기가 검게 그을린 비늘을 혀로 할짝거리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쇤네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소. 때문에 비석을 부술 수도 없지.〗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저 비석은 어쩌다 세워진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이무기가 말했다.
〖쇤네의 정인이 저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달라하며 세워 둔 비석이오. 그것이 저주가 되고 말았는지, 쇤네를 이 섬에 묶어 두고 있다오.〗
“정인은 어떻게 되었는데요……?”
묻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무기의 정인이라니, 못해도 수십 년 전에 죽었을 게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청(淸) 도령의 품으로 간 지 오래라오. 도령이라면 제 아이를 소중히 품고 있을 테니 다행이지만 쇤네는 그만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구려. 그러니 리사 아씨.〗
이무기가 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울먹였다.
〖쇤네를 그만 이 섬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면 하오.〗
“그걸 저한테 부탁해 봤자…….”
열 살짜리 몸뚱이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마는.
〖안 되겠소?〗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히는 이슬을 보고선 나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래, 모 아니면 도지!
나는 <[S급, 숙련 불가] 인지의 눈>과 <[S급,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사용해 비석을 부서뜨려 보기로 했다.
【각성자, ‘청해진’을 인지합니다.】
윤리오나 윤리타의 힘을 빌리고 싶지만, 두 사람의 힘을 사용하려면 무기가 있어야했다.
그러니까 무기가 필요 없는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
그렇게 정해진 게 청해진이 가지고 있는 <[특수 스킬] 청(淸) 하리다>였다. 하지만 청(淸)의 힘은 비석에 아무런 흠도 내지 못했다.
〖이 비석은 청(淸) 도령의 아이가 세운 것이오.〗
그러니까 같은 청(淸)의 힘으로는 비석을 부서뜨릴 수 없다는 거였다.
이 망할 구렁이가? 괜히 힘 빼지 않게 빨리 좀 말해 주지!
나는 청해진에게 사용했던 스킬을 모두 종료한 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누가 있을까?
최화백?
아니야, 최화백의 스킬은 보조 계열이라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아. 류화홍도 마찬가지이고.
청해솔 역시 청해진과 똑같이 청(淸)의 사람이니 힘을 써 봤자야. 자, 생각해 보자. 누가 있을까…….
“그래, 좋아!”
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각성자, ‘이운조’를 인지합니다.】
이운조도 안 되면, 바다 건너에 있는 윤사해를 한 번 인지해 보자! 과연 <[S급,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제대로 발휘될지 모르겠지마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운조를 비추고 있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이운조는 열심히 PC 게임 중이었다.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인데 게임이라니, 참으로 이운조다웠지만.
‘감탄할 때가 아니지!’
나는 <[S급,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이운조의 스킬 중 하나인 <[S급, 숙련 불가] 전력(專力)>에 사용했다.
파지직, 주변으로 전기가 튀는가 싶더니 손을 뻗자 비석 위로 곧장 전격이 내리쳤다.
“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정도 위력이면 금방 비석을 부러뜨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 정말!”
나는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잔디에 옷이 젖어드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무기 님, 이거 부서지기는 하는 거예요? 꼼짝도 안 하는데?”
내 짜증 섞인 외침에 이무기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거참, 눈물 많은 구렁이네!
“한 번 더 도전해 볼게요! 도전해 보면 되잖아요!”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무기 님.”
〖가람이라 불러 주시오.〗
“그럼, 가람 님. 가람 님은 ‘거주자’이지 않아요? 어쩌다 이렇게 묶이게 된 거예요?”
이무기, 가람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었다.
〖거주자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쇤네는 인간으로 죽기를 원했다오. 그렇기에 모두가 하늘 위로 올라갈 때 청(淸) 도령과 남았었지.〗
“사희라는 사람은요?”
〖그분은 하늘로 올라갈 자격이 되지 못했다오. 그렇기에 싫으나 좋으나 이 세상에 남았어야 했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사희’라는 사람은 결국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가람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열심히 이운조의 힘을 비석에 쏟았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운조의 힘은 비석에 효과를 발휘했다.
“가람 님! 보여요? 비석에 조금 금이 갔어요!”
이제는 다르게 힘을 써야할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람에게 물었다.
“가람 님, 혹시 검이나 검으로 쓸 만한 그런 날카로운 물건 없어요?”
〖정인이 내게 남겨 준 비녀가 하나 있기는 하오. 아니면 쇤네의 이빨을 뽑아서…….〗
“비녀 주세요.”
나는 이무기한테서 비석을 받아 들고는 곧장 휘둘렀다.
인지하고 있는 대상은 이운조한테서 술에 헤롱거리고 있는 윤리오에게로 바뀐 지 오래.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 아로새기나니.】
비녀 위에 새겨진 성언은.
[천지개벽(天地開闢), 그대 다시 내딛은 발에 부서지지 않으리라.]
살짝 갈라진 틈에 꽂힌 비녀를 중심으로 쩌저적, 소리를 내며 비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이무기의 부탁을 내가 이뤄 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