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뱀 섬(2)
잘못 본 거겠지?
그래, 잘못 본 걸 거야.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수염 달린 주둥이라니. 암, 잘못 본 거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흐아아악!”
내가 공을 잡지 않아서일까?
하얀 수염을 가진 주둥이가 공을 콕 밀어서 내 손에 안착시켜 줬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괴생명체라니! 나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리사야?”
“야, 윤리사. 갑자기 왜 그래?”
단예와 단이가 놀라 동시에 나를 불렀고 저세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주, 주둥이!”
“주둥이?”
저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주둥이? 네 입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내 입 말고……!”
바다 속에서 웬 괴생명체의 주둥이를 봤다고 말하려는데.
“어디 갔지?”
수염 달린 주둥이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속으로 잠수라도 했나 싶어 안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윤리사, 너 도대체 왜 그래?”
저세상이 눈가를 찡그렸다.
“백도윤이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아서 이상해졌나 봐.”
아니야, 단아야! 도윤아! 아니니까 그런 표징 짓지 말아 줘!
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햇빛을 너무 쬐어서 헛것을 봤나 봐. 잠깐 쉬고 있을래.”
나는 저세상에게 공을 던져 준 뒤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모래사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화백이 오빠, 뭐해요?”
“그림 그리는 중.”
파라솔 아래 선 베드에서 최화백은 도화지를 들고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그에게 다가가 도화지를 흘긋거렸다.
그래, 잠깐 엿보려고만 했는데.
“우와! 뭘 그린 거예요?”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최화백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미래.”
“그렇구나.”
……가 아니라.
“뭘 그리고 있다고요?”
“미래라고, 미래.”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잠깐만. 최화백이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아닌데?’
『각성, 그 후』에서 최화백이 미래를 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묘사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마, 『각성, 그 후』에 적혀 있지 않던 최화백의 힘인가?
‘그럴 수도 있어.’
나는 최화백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특수 스킬] : C+F=검색창>을 활성화시켰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용해 보는 힘인 것 같았다.
[검색 대상] : 최화백
[↳연관 검색어 : 최설윤 | 할미 | 아래아 | 死眼 | …]
최설윤이야 최화백의 고모이니 당연히 연관 검색어로 뜨겠지만.
‘할미는 왜지?’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
“사안(死眼)은 또 뭐람?”
생각만 한다는 게,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슥슥, 도화지 위로 그림을 그리던 최화백이 나를 쳐다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변명을 생각해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어서요!”
“별난 걸 다 가르치네.”
최화백이 쓸데없는 걸 가르친다는 어투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집안은 모두 붉은 눈을 타고 나거든. 청 가문이 청(淸)의 색을 타고나는 것과 비슷하지.”
“그렇게 타고난 붉은 눈을 사안이라고 불러요?”
“음, 뭐 그것도 있지만.”
최화백이 대답을 얼버무리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안은 말 그대로 죽은 눈이야.”
“죽은 눈이요?”
“응.”
무슨 뜻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최화백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우리가 가진 붉은 눈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 이것도 학교에서 배웠을까 모르겠네.”
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그게 뭐야?
그리고 무엇보다.
“붉은 눈을 타고난 사람은 많지 않아요? CW의 장천의 삼촌도 붉은 눈이고, 가호의 로저 신부님도 붉은 눈인 걸로 아는데요.”
“우리 집안은 좀 더 특별하거든.”
최화백이 도화지 위로 다시 펜을 슥슥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신인의 시대 때, 우리 선조님께서 악마랑 계약을 하셨다고 해. 그 때문에 우리는 ‘눈’ 자체에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됐지.”
악마와의 계약이라니.
하기야, 『각성, 그 후』에서 최설윤이 그랬었지.
분명, 최설윤은 일흔두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진 레메게톤을 모두 모아 악마를 불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중요한 ‘열쇠’가 없어서 완전한 힘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있는 세계에서도 최설윤이 일흔두 개의 레메게톤을 모을지 궁금해졌다.
‘『각성, 그 후』에서는 최설윤이 왜 일흔두 개의 레메게톤을 찾아다녔는지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고만 가볍게 설명이 됐을 뿐이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최화백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나의 경우 어렴풋하게나마 미래를 볼 수 있고, 고모는 영적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하지.”
“볼 수 있었다고요?”
“응, 과거형.”
최화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눈에 깃든 힘을 언제든 포기할 수 있거든. 시력을 포기하는 건 아니야, 그냥 ‘눈’이 가지고 있던 힘을 포기하는 거지.”
“그걸 사안이라고 부르는 거네요?”
“그래.”
오호라, 그래서 사안(死眼: 죽은 눈)이구나.
설명을 끝마친 최화백이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를 반으로 접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은 바다에 나오지 않는 게 좋겠어. 어차피 오늘 밤부터 폭풍우가 올 거라 바다를 보러 나오지도 못하겠지만.”
“화백이 오빠는 원할 때마다 미래를 볼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제멋대로 발휘되는 힘이라서 매일 포기하고 싶다고. 고모만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거야.”
최화백이 짜증스레 투덜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류화홍! 나 숙소에 좀 데려다줘.”
“숙소에는 왜?”
슈슉!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류화홍이 단숨에 최화백 앞에 나타났다.
최화백이 류화홍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말했다.
“추워. 들어가서 쉴래. 애들은 네가 보고 있어.”
“바다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말하면서 류화홍은 최화백을 숙소로 데려다주려는 듯,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화백이 오빠,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혹시 오빠가 본 미래에 이무기는 안 나왔어요? 하얀 수염이 달린 주둥이를 가진 이무기요!”
“그런 건 안 나왔는데? 그보다 이무기라니, 애는 애구나. 그런 걸 믿다니.”
최화백이 내게서 등을 돌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에 나는 빵빵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누가 믿고 싶어서 믿나? 바다 속에서 하얀 수염이 달린 이무기가 나한테 공을 밀어 주는 걸, 분명 내 눈으로 봤단 말이야!
단예와 단이가 말했던 이무기인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상상하지 말자!’
사실, 내가 본 게 하얀 수염이 아니라 하얀 더듬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해가 진 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가 본 것이 정말 하얀 수염 달린 이무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리사, 잘 자.”
“단예도 잘 자!”
저세상의 방에서 다 같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돌아온 늦은 밤, 단아는 진작 잠에 들었고 나는 단예와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다.
남자애들은 조금 더 논다고 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오빠들은 1층에서 신이 나게 술 파티 중인 것 같았고.
어쨌거나 나는 이불을 가슴 끝까지 올리며 잠들고자 했다. 오늘 정말 지쳤으니까!
‘바다에서 본 거… 정말 이무기가 맞을까……?’
하얀 더듬이가 달린 수중 바퀴벌레는 아니었겠지.
수면 위를 넘실거리던 하얀 털이 계속해서 생각나 미칠 것 같았다.
‘자자! 잊고 자는 거야!’
나는 아예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최화백의 말대로 늦은 밤, 평화로운 섬에는 폭풍우가 찾아왔다. 거칠게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나는 그에 맞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잠에 들려고 했을 때였다.
툭, 투둑-!
무언가 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빗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둔탁한 무언가.
‘돌……?’
그래, 돌이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파티 중인 오빠들이 되도 않는 주정을 부리고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어……?”
창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가로등 불빛만이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잘못 들었나?”
오늘 피곤하기는 정말 피곤했나 보다. 나는 뺨을 긁적이고는 다시 침대로 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고자 했다.
툭, 투둑-!
다시 한 번 더 창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거다.
“도대체 뭐야?!”
나는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창을 두드리던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주변을 살폈다.
단예와 단아가 깨기 전에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별 이상을 찾지 못했다.
“정말 뭐람?”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이고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
〖유영 아씨, 쇤내의 부탁을 들어주려 드디어 찾아왔구만.〗
지붕 위에서 스르륵, 무언가 내려왔다.
“흐어억?!”
하얀 수염이 달린 갯지렁이, 아니. 이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