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뱀 섬(1)
“우와!”
쏴아아, 파도를 가른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나는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린 후 뒤를 돌아보았다.
“해진이 오빠, 이 넓은 섬에 정말 우리밖에 없는 거야?”
“응, 리사. 매일 아침마다 별장을 청소하러 오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만 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러면서 청해진은 말했다.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그 분들한테 말하면 돼. 알겠지?”
“응!”
나는 활짝 웃으며 섬을 구경했다.
무인도라고 하더니 정돈되어 있는 숲길이 보기가 좋았다. 곳곳에 피어 있는 꽃은 어떻고.
여기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게 됐다는 거지?
절로 기분이 좋아져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 걸렸다.
다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섬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우웨엑!”
류화홍이 멀미에 토하는 소리였다.
순간이동으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류화홍은 의외로 멀미가 있었다. 듣기로는 모든 이동 수단에 멀미가 있단다.
최화백이 질색하면서도 류화홍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평화로운 섬과는 어울리지 않는 류화홍의 구토 장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단예야, 단이야. 뭐해?”
이번 여행에 나는 여럿의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래봤자, 한태극네 세쌍둥이와 도윤이였지만 말이다.
단이와 함께 나란히 바닷가를 구경 중이던 단예가 말했다.
“첫째랑 이무기가 어디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이무기?”
“응, 리사. 이 섬이 ‘뱀 섬’이라고 불리는 건 아니?”
“알아. 해진이 오빠가 배에서 말해 줬잖아.”
하지만 이무기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도대체 이 ‘뱀 섬’에서 왜 이무기가 등장하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단이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청(淸)의 사람들은 이 섬 근처에서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는 했대.”
“구렁이? 그게 이무기라는 거야, 단이야?”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어.”
단이가 읽은 책이라면 동화책은 아닐 거다. 분명, 역사서나 그런 어려운 책일 테니…….
그럼, 정말 이 섬에 이무기가 있다는 건데.
“청(淸)의 사람들이 이무기를 가만히 내버려뒀대?”
내 의문에 단예가 대답해줬다.
“이무기가 청(淸)의 친구일 것이라 생각해 내버려뒀다는구나.”
“그렇구나.”
단예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흥미로웠다.
이무기라니!
‘마리아’였을 적의 세상에서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이 현실로 존재한다는 거잖아?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는 바다를 쳐다봤다. 단예와 단이도 나와 똑같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단예, 한단이! 둘이 그만 놀고 짐 좀 챙겨!”
단아의 목소리를 뒤이어 저세상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윤리사, 너도.”
“아니야, 리사야. 리사 짐은 내가 챙길게!”
나는 도윤이의 말에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괜찮아, 도윤아! 내 짐은 내가.”
챙긴다고 말할 새도 없이 누군가 내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내 짐뿐만이 아니라, 도윤이와 저세상의 짐까지 들었다.
“어? 어어?”
도윤이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제 짐을 챙긴 최화백을 쳐다봤다.
배에 올라탄 후, 류화홍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최화백은 묵묵히 우리의 짐을 챙기고서 숲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최화백의 곁으로 달려갔다.
“화백이 오빠, 최설윤 길드장님은 잘 지내셔요?”
“……오빠?”
최화백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인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싫으면 아저씨라고 불러 드릴게요!”
최화백이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아저씨든 오빠든 마음대로 불러. 그리고 우리 고모는 잘 지내고 계셔. 그것도 엄청.”
아주 열심히 지하 길드를 박살내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최화백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하지만 대화는 금방 다시 이어졌다.
“윤사해 길드장님은 해외 출장 중이라지? 잘 지내고 계신대?”
최화백이 내게 말을 붙였기 때문이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빠는 잘 지내고 계세요! 돌아올 때 선물을 왕창 사 온다고 했어요!”
“좋겠네.”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또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괜히 최화백 곁에 붙은 것 같다.
슬그머니 걸음을 늦춰,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가려는데 최화백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류화홍, 정신 차렸으면 네 스킬로 짐 좀 옮겨 주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별장이 어디인지 모르는걸?”
“청해솔이 안 가르쳐 줬어?”
“응, 섬 안쪽에만 있다고 하고 좌표는 안 알려 줬어.”
최화백이 짧게 혀를 차고는 성큼 긴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움직이었다.
얼떨결에 최화백한테서 떨어진 나는 멀뚱히 자리에 멈춰 섰다.
“리사, 왜 그래? 다리 아파?”
“응? 아니야! 괜찮아!”
윤리오의 걱정에 나는 정신을 챙기고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우리가 머물 숙소에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청해진이 별장의 불을 환하게 켜며 말했다.
“얘들아, 너희 방은 모두 2층이야. 각자 원하는 방 골라서 짐 정리하고 로비로 나와.”
“네!”
나와 저세상, 한태극네 세쌍둥이와 도윤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2층으로 우다다 뛰어올라갔다.
여러 개의 방 중에서 내가 선택한 곳은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이었다. 이동하기 편한 곳이 최고지!
그렇게 넓은 침대 위에 풀썩 눕는데,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리사, 방 같이 쓰지 않을래?”
“한단예, 치사해!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셋째야, 이런 건 먼저 묻는 사람이 임자란다.”
단예와 단아가 티격태격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렀다.
혼자 쓰기에 방이 너무 넓기는 했다. 그렇다고 셋이 쓰기에는 좁은 감이 없지는 않는데…….
에라, 모르겠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단예도 단아도 좋아! 우리 셋이서 같이 지내자!”
내 말에 티격태격 싸우고 있던 단예와 단아가 활짝 웃었다. 우리 셋은 사이좋게 짐을 정리한 후 로비로 내려갔다.
“세상이 오빠.”
로비에는 저세상뿐이었다. 나는 저세상에게 다가가서는 물었다.
“방 혼자 써? 나는 단예랑 단아랑 같이 쓰기로 했는데.”
내 말에 저세상이 뚱하게 말했다.
“백도윤이 혼자 자는 거 무섭다고 같이 쓰자고 하더라.”
“단이는?”
“밤마다 놀러오겠대.”
오호라, 그렇다는 거지?
“단예야, 단아야! 밤마다 세상이 오빠 방에서 놀래?”
“야, 윤리사!”
저세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질색하며 나를 불렀지만.
“좋은 생각인 것 같구나, 리사야. 세상이 오빠, 밤마다 놀러갈게요.”
“나도 윤리사 네가 간다면야.”
단예와 단아는 이미 내 말에 맞장구를 쳐 버렸다.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저세상이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너, 진짜!”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혀를 날름거려주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타이밍 좋게 윤리오와 윤리타가 로비로 나오고 있었다.
“리사야, 나는 안 보여?”
“해진이 오빠도 안녕! 하와이안 셔츠 멋져! 조폭 같아!”
“조폭…….”
청해진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나는 윤리오의 품에 안기며 그에게 물었다.
“화홍이 오빠랑 화백이 오빠는?”
“형들은 먼저 가서 자리 만들고 있겠대.”
“자리?”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해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모래사장이 곱게 펼쳐진 한 가운데에 썬 베드를 비롯한 각종 피서 용품이 차려져 있었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던 최화백이 우리를 보고는 말했다.
“가서들 놀아. 애들은 너무 깊은 물에 들어가지 말고.”
도착하자마자 물놀이 할 줄 몰라서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 않았는데!
아쉬워서 울상을 짓는데, 단예가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괜찮단다, 리사. 수영복 아니면 뭐 어때. 어차피 옷 많이 챙겨 오지 않았니?”
그건 그랬다. 나는 단예의 손을 꼭 잡으며 활짝 웃었다.
“좋아! 들어가서 물놀이하자!”
내 말에 단예 역시 그린 듯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단예와 함께 바다에 들어갔을 때였다.
“……?”
머리 위가 순간 어두워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햇빛뿐이었지만.
벌써 더위라도 먹었나?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
“윤사해 자식 아니랄까봐, 눈치 한 번 더럽게 빠르네.”
짙은 분홍빛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고는 몸을 돌렸다.
내리쬐는 태양을 등지며 날아가던 남자가 도착한 곳은 남해, 청(淸)의 본가였다.
“야, 가주님. 나 왔어.”
창가에 앉아 장부를 확인하고 있던 청해솔이 고개를 들었다.
“청정하,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유랑단 아홉 탈 중 하나, 초랭이인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로 있으면 들킬 것 같아서.”
“내 동생한테?”
“아니, 윤사해의 자식들한테.”
청해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청정하는 그녀가 보고 있던 장부를 빼앗아 들고는 얼굴을 구겼다.
“와, 많이도 해 쳐 먹었네. 이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누나?”
“알아서 잘.”
청해솔이 청정하한테서 장부를 빼앗아 들었다.
“밖으로 새어나가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일이잖아. 내 선에서 조용히 처리할 거야.”
그 말에 청정하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청해솔, 나랑 한 약속 지킬 생각 있는 거 맞지?”
“갑자기 그건 왜.”
“왜기는? 가문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겠다는 사람이, 가문 내의 온갖 비리를 다 덮어 버리겠다니…….”
청정하가 청해솔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선 비웃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아이러니하잖아?”
청해솔은 말없이 청정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돌아가서 애들이나 봐.”
“네네, 가주님 명 받들어야죠. 안 그래도 이무기가 숨죽이고 사는 곳인데 괜히 그 성질머리 건드리면 큰일이니까.”
“이무기?”
장부로 시선을 돌렸던 청해솔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뭐야, 알고서 애들 노는 거 허락해 준 거 아니었어?”
“이무기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인 걸로 아는데.”
“아닌데?”
“뭐?”
“이무기, 진짜 그 섬에 살고 있어.”
그 말에 청해솔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
“……?”
친구들과 한창 공놀이를 하고 있던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발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윤리사! 공!”
“아……!”
멍하니 있다가 공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떠내려가는 공을 줍고자 걸음을 옮겼다.
스윽, 떠밀려가던 공이 내게 돌아온 건 그때였다. 그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헐.”
나에게 공을 밀어 준, 희게 수염이 난 주둥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