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마음이 내키는 대로(3)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윤사해는 류화홍의 도움을 받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항이라고 하나, 새벽 늦게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윤사해는 어렵지 않게 제 전 부인을 찾을 수 있었다. 성큼, 자신의 앞에 선 윤사해를 보고서 에일린 리가 웃었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 몫의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에일린 리가 비즈니스 티켓을 윤사해에게 내밀며 미소를 그렸다.
“오래 걸릴 거야.”
“알아.”
윤사해가 에일린 리한테서 티켓을 받아들며 말했다.
“알면서 가는 거니까…….”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선 에일린 리에게 속삭였다.
“최대한 빨리 네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도록 내게 협조하도록 해, 에일린 리.”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에일린 리가 키득거렸다.
원래라면 이깟 저주,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주가 저를 좀먹기 시작했다.
‘로저 에스테라.’
그와 거주자가 내린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직후부터 그랬다.
미치광이 신부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계신지는 모르나, 자신의 이성이 시시때때로 날아가지만 않았더라면 그를 찾아가 멱살을 잡았을 터였다.
에일린 리가 지친 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는, 애정을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도덕적인 규범, 관념 등의 이성도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하 길드의 수배자들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욱 끔찍한 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
‘싫어.’
싫었다. 자신이 암만 애정에 관한 모든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에일린.”
부르는 목소리에 에일린 리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이 감도는 윤사해의 두 눈이 저를 담고 있는 게 보였다.
“어서 움직이지. 남들 눈에 띄면 너나 나나 곤란할 테니.”
에일린 리가 씨익 웃었다.
“나는 곤란해도 상관없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짜증 섞인 목소리에 에일린 리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윤사해가 떠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윤사해는 꼬박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도 했지만, 나는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미국과의 시차 때문이었다. 아빠가 전화를 걸어올 때는 언제나 새벽이었으니 말이지.
윤사해한테 전화가 올 때까지 깨어 있으면 윤리오와 윤리타한테 잔소리를 들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윤사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S급,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를 쌍둥이에게 사용할 작정이었다.
나도 아빠랑 전화하고 싶단 말이야. 목소리도 듣고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며 윤리오가 내온 복숭아를 먹을 때였다.
“윤리오, 윤리타~!”
바깥에서 아주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안 가득 복숭아를 집어넣고 있던 윤리타가 얼굴을 구겼다.
“이 목소리 청해진인 것 같은데? 안 그래, 윤리오?”
윤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과도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문을 열어 주려는 모양새였다. 그에 윤리타가 말했다.
“그냥, 집에 없는 척하고 청해진 무시하면 안 돼?”
“주변에서 민원 들어오기 전에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아.”
누가 들으면 청해진이 몬스터라도 되는 줄 알겠네.
윤리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나와 저세상은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삐빅, 열린 도어락에 청해진이 곧장 얼굴을 내밀었다.
“윤리오! 역시 있는 줄 알았지! 리사랑 세상이는? 애들도 같이 있지? 학교 안 갔지?”
“애들 방학한 지가 언제인데.”
어제 방학했다.
나는 윤리오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해진이 오빠, 안녕.”
“안녕하세요, 해진이 형.”
저세상도 고개를 내밀며 청해진에게 인사했다. 윤리오가 그런 우리 둘을 자신의 몸으로 숨기며 말했다.
“리사, 세상아. 청해진은 무시하고 가서 복숭아 먹고 있어. 윤리타, 뭐해? 애들 데리고 가.”
그 말에 나는 윤리오의 허리를 꽉 붙들어 잡았다.
청해진은 윤리오와 윤리타만 찾지 않고, 나와 저세상도 찾았다. 분명, 우리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겠지.
때문에 나는 윤리오한테서 나를 떼어내려는 윤리타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청해진에게 물었다.
“해진이 오빠, 우리 집은 왜 왔어?”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왔지!”
“좋은 소식?”
“응! 그것도 엄청 좋은 소식!”
윤리타가 윤리오한테서 나를 떼어놓는 걸 포기하고는 청해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해진, 리사한테 괜한 소리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가.”
“맞아, 청해진. 할 말 없으면 어서 우리 집에서 나가.”
“아, 잠깐만! 나 할 말 있어! 누나가 전해 주란 말이 있단 말이야!”
난데없이 청해솔이 청해진의 입에서 거론됐다. 청해진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있던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솔이 누나가?”
“그래! 누나가 남해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와 저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남해라니! 우리 윤씨네한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청해진이 사이좋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선 크흠, 헛기침을 터트렸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 ‘남해’가 아니라 남쪽 바다의 남해야.”
그에 윤리오가 표정을 풀고서 뚱하게 청해진에게 물었다.
“남해가 왜.”
“남해에 무인도 많은 거 알지? 그 섬 대부분이 우리 가문의 소유인데, 이번에 누나가 가주가 되면서 모두 물려받았거든.”
절로 입이 쩍 벌어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게 왜?”
윤리타의 질문에 청해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이번 여름에 섬 하나 빌려 주겠대! 가서 놀라고. 원하는 곳 말하면 그곳에 별장도 지어 주겠다는데? 리사랑 세상이는 친구들 불러서 놀아도 된다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섬은 우리도 있어.”
“귀수산?”
“그래.”
“귀수산은 매일 바다 위를 이동하는 섬이잖아. 해수욕장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놀려고?”
정곡을 찔렸는지 윤리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리오는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만 가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리사나 세상이가 가면 보호자가 있어야 해. 우리끼리 어떻게 애들을 돌 봐?”
“그럴 줄 알고 보호자를 모셨지!”
청해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짝짝, 손뼉을 쳤다. 왜 저러나 했더니, 순식간에 웬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짜잔! 얘들아, 안녕!”
“화홍이 형……?”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리타도 놀란 눈을 보이며 류화홍에게 물었다.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자체 휴가 중!”
류화홍이 당당하게 외쳤다.
하하, 자체 휴가 중이라니. 윤사해한테 나중에 다 일러바쳐야지.
윤리오와 윤리타는 류화홍의 등장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동시에 미덥지 못하다는 듯, 류화홍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류화홍과 함께라도 우리끼리 청(淸) 소유의 섬으로 놀러가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그때 류화홍이 웃으며 밝게 목소리를 내었다.
“리오야, 리타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만 가는 거 아니거든?”
“보호자가 형 말고도 한 명 더 있어요?”
“응! 잠깐만!”
류화홍은 그 말을 남기고선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짜잔! 최화백 씨를 모셔왔습니다! 다들 환영해 주세요!”
“뭐… 뭐야……?”
다시 나타난 류화홍은 혼자가 아니었다.
류화홍과 함께 모습을 보인 남자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자의 정체는 최화백.
아래아의 길드장, 최설윤의 하나뿐인 조카였다.
최화백이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류화홍의 머리채를 잡았다.
“야! 류화홍!”
“악! 아파!”
“내가 멋대로 이동시키지 말라고 했지?! 한창 집중 잘 되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최화백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화백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 ‘그림’과 관련된 것들이었지? 최화백의 취미도 그림이었고.
“알겠어! 데려다 줄게! 데려다 줄 테니까 머리 좀 놔 줘!”
청해진은 류화홍과 최화백이 다투는 광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웃는 낯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누나도 가문의 일이 빨리 정리된다면 애들 봐 주겠다고 했어!”
“해솔이 누나가?”
“응! 가문의 일이 정리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고 해도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서 위험한 일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어! 어때? 좋은 소식 맞지?”
윤리오와 윤리타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는 이내 어깨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해솔이 누나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줘, 청해진.”
“맡겨만 주시라!”
청해진이 뿌듯하게 웃으며 손을 ‘V’자로 그렸다.
청 가문에서 돌아온 후,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울고 불며 사과하고자 찾아왔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늦은 밤, 우웅 울린 진동에 윤사해는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첫째 아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읽어가는 윤사해의 얼굴이 구겨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종국에 그의 얼굴은 완전히 펴져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자기?”
소리 없이 다가온 에일린 리가 윤사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빼앗아 확인했다.
“에일린.”
경고성 짙은 목소리였으나 에일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첫째 아들이 전남편에게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청(淸)이 소유하고 있는 무인도 중 한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니. 우리 애들, 자기 없이도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네?”
윤사해가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휴대폰 이리 내놔. 그리고 좀 자. 자료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그래 주면 고맙지.”
에일린 리가 윤사해의 손에 휴대폰을 들려주고는 속삭였다.
“잘 자, 자기.”
윤사해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루라도 빨리 제 전부인의 저주를 풀어 주고 아이들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