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마음이 내키는 대로(2)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아빠!”
나는 우다다 윤사해한테 달려갔다. 왜인지 모르게 잔뜩 피곤한 낯이었던 윤사해는 나를 보고선 희미하게 웃었다.
“리사.”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를 번쩍 안아드는 걸 보니 말이다.
“오빠들이랑 잘 있었니?”
“응!”
아니, 잠깐만. 다시 생각해 보니 윤사해한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윤사해가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나를 바로 내려놓았다.
“잠깐 손 좀 씻으마, 리사.”
라고 말했지마는 뭔가 이상했다.
“윤리사, 왜 그래?”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세상이 오빠를 찾지도 않았어.”
“그게 왜?”
저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휴, 정말 이 주인공을 어쩌지?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저세상에게 속닥거렸다.
“세상이 오빠 아팠잖아! 아빠 성격이면 당장 괜찮은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상하지 않아?”
“아……!”
저세상이 멍청한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그렇네.”
그러고는 욕실 쪽을 쳐다보는데.
“아참, 세상이는 어디 있니?”
마침, 손을 씻고 나온 윤사해가 저세상을 찾았다. 저세상은 나를 흘긋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 여기 있어요, 아저씨.”
“세상아.”
윤사해가 성큼, 저세상에게 다가가서는 그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열은?”
“내렸어요!”
저세상이 밝게 웃었다. 정말이지, 윤사해한테만 웃음이 헤픈 저세상이었다.
그때 거실에 앉아 있던 윤리오가 미소를 그리며 윤사해에게 말했다.
“제가 약 먹이고 다했어요, 아버지. 1시간마다 열도 확인했고요.”
“고맙구나, 리오. 리타는?”
“낮잠 잔다고 들어가더니 아직까지 자네요.”
그 말에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다 새벽에 깨면 못 잘 텐데.”
“알아서 하겠죠, 뭐.”
윤리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윤사해는 걱정된다는 듯이 쌍둥이의 방을 쳐다보다가 결국 윤리타를 깨우러 들어갔다.
스무 살이 넘은 둘째 아들임에도 윤사해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아암, 윤리오, 너 왜 나 안 깨워줬어? 하루 종일 잘 뻔했네.”
“깨웠어. 네가 안 일어난 거지.”
그 말에 윤리타가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청해진 때문이야. 괜히 도와달라고 해서 청 가문에 내려갔다가 이게 뭐야.”
“아빠가 언젠가 만나면 꼭 단단히 혼을 내 주마.”
“히힛.”
철이 없는 윤리타였다. 윤리오가 그런 윤리타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녁은요?”
“먹고 왔단다. 너희는 먹었니?”
“네, 그보다…….”
윤리오가 나와 저세상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그에 윤사해가 윤리오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리오?”
“네.”
윤리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윤리타가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아빠! 잠깐만요!”
“응?”
“왜 윤리오만 불러요? 저는요! 저도 같이 이야기할래요!”
윤리오가 미간을 좁혔다.
“윤리타, 내가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나눌 줄 알고?”
“모르지만 나도 같이 가!”
간다고 해도 어차피 윤사해의 방인데 말이지. 철부지 아이처럼 조르는 모습에 윤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윤사해는 말했다.
“그래, 리타도 들어오렴. 리사랑 세상이는 잠깐 놀고 있고.”
윤리타는 되고, 나와 저세상은 안 된다니!
나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려는데 저세상이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네, 아저씨.”
이 망할 주인공이!
어쨌든 윤사해는 쌍둥이 두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저세상이 말했다.
“윤리사, 아저씨 평소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저세상이 눈가를 찡그렸다. 나 역시 저세상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잖아. 나를 1분도 채 안지 않았다고.”
“……아저씨한테 안겨 있던 시간을 재고 있었어?”
물론, 재지 않았다. 체감상의 시간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뿐.
“그리고 세상이 오빠.”
나는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아빠 두 눈에 생기가 없었어. 암만 일이 피곤해도 나나 오빠들을 보면 기운을 내던 아빠였는데 오늘은 계속 동태 눈깔이었다고!”
“동태 눈깔…….”
세상이 오빠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쨌든! 알아봐야겠어!”
“뭐를?”
“엄마가 아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야!”
“엄마라면 에일린 리? 그 사람이 갑자기 왜 나와?”
아참, 저세상은 에일린 리가 한국에 들어온 걸 모르겠구나? 서차웅의 전화를 받을 때 자고 있었으니.
저세상에게 에일린 리가 한국에 입국했음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윤사해의 방에서 나왔다.
아주 심각한 얼굴로.
“어떻게 생각해, 윤리오?”
“너는.”
“왜 굳이 아빠한테 도움을 청하셨는지 모르겠어. 안 가면 안 되나?”
“안 되니까 우리한테 말한 거겠지. 그리고 어머니도 괜히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했겠어? 어머니도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을걸?”
“엄마가……?”
나와 저세상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윤사해는 전 부인이자 우리 삼남매의 어머니인 에일린 리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나를 잊고 있었던 듯,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쌍둥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모르는 척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엄마가 왜?”
윤리오와 윤리타가 나와 저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고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리사.”
“맞아. 어린애는 알 것 없어.”
어린애는 알 것 없다니!
‘마리아’ 였을 때와 ‘윤리사’인 지금을 합치면 내가 너희보다 나이가 많다고!
나는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런 내가 같잖다는 듯이 윤리타가 피식 웃었다.
그래, 웃었다 이거지?
“커헉……!”
나는 윤리타의 명치 부근에 머리를 박고는 그대로 윤사해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빠!”
“야, 윤리사!”
저세상이 놀라 나를 붙잡으려고 왔지만, 나는 윤사해의 방에 들어선 지 오래였다.
“리사? 무슨 일이니?”
“아빠야말로 무슨 일이야?”
“응?”
“엄마랑 무슨 일이냐고!”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에일린 리에 대해 물어볼 줄 몰랐나 보다.
나는 불퉁하게 외쳤다.
“나 안 어려! 열 살이나 됐다고! 육 개월만 지나면 이제 열한 살이야! 초등학교 고학년!”
윤사해가 지금 우리 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씩씩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오전에 엄마 때문에 나갔었잖아! 나 그때 안 자고 있었어!”
내 말에 윤사해가 앓는 소리를 한 번 냈다.
“아가…….”
“나 이제 아가 아니야.”
윤사해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두 팔을 벌리며 나를 불렀다.
“리사, 아빠한테 오렴.”
나는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이고는 윤사해의 품으로 쏘옥 들어갔다. 윤사해가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엄마가…….”
“응.”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왜?”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생겨서.”
그에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하더구나. 지금도 몰래 아빠를 찾아 온 거고. 물론…….”
소식에 귀가 밝은 사람이라면 에일린 리가 한국에 들어왔음을 진작 알아차렸을 거다.
예를 들면 장천의 같은 사람이 말이지.
윤사해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가 내 머리칼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리사가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으마. 어차피 너희 엄마와는 남남이 된 지 오래됐으니.”
“거짓말.”
“응?”
나는 윤사해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남남이 된 지 오래됐으면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빠랑 엄마는 오빠들이 다섯 살 때 이혼했다며? 그런데 리사는 오빠들이 열 살 때 태어났어.”
그러니까 이혼하고서 5년 만에 두 사람은 나를 가졌다는 거다. 서로에게 미련이 없다면 절대로 생길 리가 없었던 일.
“엄마한테 미련 많이 남았지?”
“그럴 리가!”
윤사해가 다급하게 말했다.
“리사, 너는 말이다. 아빠가 엄마한테 실수를 해서. 그러니까, 그때 조금 일이 있었는데.”
“그렇구나. 리사는 실수로 태어난 아이였다는 거지? 바란 적 없다는 거구나.”
나는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추욱 내렸다.
“아니란다, 리사! 절대 아니야!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데!”
“알아.”
“…….”
윤사해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일부러 그를 놀린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윤사해는 그대로 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윤사해에게 말했다.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리사.”
“오빠들이랑 기다리고 있을게! 사고 안 칠 테니 걱정 마!”
윤사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애틋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대신, 빨리 돌아와야 해? 너무 늦으면 안 돼?”
“……그래.”
윤사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리사가 아빠 모르게 훌쩍 크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