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가주 경합(7)
윤리오와 윤리타, 청해진은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머리야.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깨질 것 같아.”
“리오, 괜찮니? 잠깐만 기다리렴. 내 이 빌어먹을 청 가문을 당장 엎어 버리고 오마.”
“네? 아니, 잠깐. 아버지? 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어쨌거나 길고 길었던 하루가 졌다. 내려앉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청(淸) 가문은 시끌벅적했다.
그야, 오늘은 새로운 가주가 탄생한 날이니까.
하지만 주인공인 청해솔은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초랭이랑 같이 있나 보네.”
“그러게.”
내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저세상이 웅얼거렸다.
“그냥 죽이면 될 텐데. 죽이는 게 쉽지는 않을 테지만…….”
열에 들떠 있는 저세상은, 아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를 거다.
나랑 같이 바다에 빠졌던 저세상은 지금 몸살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멀쩡한데 우리 주인공님은 왜 이러는지, 참.
“너도 가서 놀아, 윤리사. 새로 가주가 된 해솔이 누나를 축하하는 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한테 사과하는 뜻도 있다고 하잖아.”
“싫어.”
청 가문의 인간들 곁에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었다. 물론, 청해솔과 청해진은 예외다.
“리사는 세상이 오빠랑 같이 있을 거야.”
저세상이 힘없이 웃었다.
“거짓말. 한단아가 놀러 가자고 조르면 갈 거면서.”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너를 모르겠냐.”
나는 입술을 한 번 씰룩이고는 저세상의 이마에 손을 얹어 버렸다.
“차가워.”
“오빠가 너무 뜨거운 거야.”
나는 연회가 한창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 좀 붙여, 세상이 오빠. 나 어디 안 갈 테니까.”
저세상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금거리다가 이내 닫았다. 곧 그는 새근거리며 잠에 들었다.
나는 저세상의 이마를 토닥거려주다가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기 무섭게 잠이 쏟아졌다.
청해솔이 초랭이랑 뭘 하고 있는지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으로 보려고 했는데…….
“리사, 너도 조금 자렴. 아빠가 곁에 있으마.”
윤사해의 다정한 목소리에 내 눈꺼풀은 결국 닫히고 말았다.
***
“약속, 지킬 자신 있어?”
잔을 기울이고 있던 청해솔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입을 여네.”
두 손이 결박당한 채,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초랭이가 이를 으득 갈았다.
“내 말에 대답하기나 해. 네가 한 일방적인 약속, 지킬 자신 있냐고!”
청해솔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신 있으니까 내 심장을 걸었겠지. 내가 걱정되나 보네?”
“그럴 리가 없잖아.”
초랭이가 비딱하게 웃었다.
“나를 농락하는 게 아닐까 걱정은 되지만.”
그 말에 청해솔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를 농락할 생각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 내가 왜 굳이 내 심장을 걸었겠어?”
일리 있는 말이었다. 청해솔은 제 앞의 잔을 한 번 기울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나는 청 가문의 가주가 될 생각 따윈 없었어. 너만 아니었다면 가주 자리는 줘도 안 받았을 거야.”
“그런데?”
“너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가주 자리가 필요하더라고.”
청(淸)의 맹세를 사용하기 위해서.
초랭이가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매력 넘치기는 하지? 귀하신 심장을 걸고서라도 나를 붙잡으려고 하다니.”
“어르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되는 대로 지껄이지 말아 줬음 해.”
청해솔이 잔을 내려놓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 입을 열었으니 말해 주지 그래. 우리 멍청한 선조께서 왜 네 가문을 멸문시켰는지.”
“내 말에 먼저 대답해. 약속, 지킬 자신 있냐고.”
“그래, 있어.”
청해솔의 두 눈에 초랭이의 얼굴이 담겼다.
저와는 달리 짙은 분홍빛이 도는 머리칼, 그러나 두 눈만큼은 청(淸)의 색이었다.
청해솔이 바다와 숲의 색이 뒤섞인 초랭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가문, 기필코 내 손으로 무너뜨릴 거야.”
청해솔이 청(淸)의 맹세를 통해 초랭이와 약속한 것.
제 가문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그에 초랭이가 눈가를 찡그렸다. 다시 한 번 들어도 믿기가 힘들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청(淸)의 맹세는 이뤄졌다. 청해솔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맹세이나, 제 심장은 그녀의 손에 걸리게 됐다.
청해솔에 의해 자신이 약속한 것은 그녀의 곁에 있겠다는 것. 즉, 청해솔의 사람이 되겠다는 말이었다.
그녀를 배신하는 순간, 제 심장은 멈출 게 분명할 터.
초랭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장님의 손에 내 심장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불행으로 여겨야할지.’
잠시 고민하던 초랭이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거 알아, 누나? 옛날에는 청(淸)의 피를 보호하겠답시고 근친이 성행했다는 거.”
청해솔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가문 내에서 근친이 성행한 건, 몇 백 년도 더 된 일이었다.
“너 도대체 나이가 몇이야?”
“일단, 누나보다는 많아.”
“그런데 계속 나를 ’누나‘라고 부른단 말이야? 양심 없어?”
“없으니까 탈쟁이가 된 거겠지?”
청해솔은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말했다.
“그래, 알아. 그래서? 네가 바로 그 근친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응.”
너무나도 쉽게 대답하는 초랭이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했다.
“내 어머니는 방계 가문의 가주님이셨지. 내 아버지는 청(淸)의 가주셨고.”
“뭐……?”
“사실 근친이라고 말했지만,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의 피는 서로 멀어진 지 오래였거든. 그렇다고 해도 둘에게 청(淸)의 피가 흐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잠깐, 잠깐만.”
청해솔이 황급히 초랭이의 말을 멈추게 했다.
“네 어머니가 방계 가문의 가주였다고? 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가주였고?”
“그렇다니까?”
초랭이가 히죽거렸다.
“안 믿겨? 아버지가 어머니의 가문을, 내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게?”
믿기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랬다. 청해솔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선 초랭이에게 물었다.
“왜?”
“낸들 아나.”
초랭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야. 그래, 누나처럼.”
청해솔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리움이 살짝 담겼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누나네 가문의 가주였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것도 알지.”
가문끼리 약속한 혼인이 아니었다는 건가?
청해솔이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 초랭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초랭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봐도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왜 우리 가문이 멸문당했는지는 그 머리통으로 어디 한 번 잘 굴려 봐.”
초랭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답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청해솔은 물끄러미 초랭이를 바라보다가 제 옆에 놓인 탈을 들었다. 초랭이가 청해솔을 힐끔 보았다.
“부수려고? 그거 부숴 봤자 금방 복구돼.”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청해솔은 손에 들린 탈을 그대로 초랭이의 얼굴 위에 덮어 버렸다.
“신기하네.”
분명 앞에서 대화를 나눴던 초랭이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 위로 탈을 덮어씌우기 무섭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 도대체 이 탈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초랭이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청해솔은 가만히 그 웃음소리를 듣다가 초랭이의 얼굴 위에 씌웠던 탈을 벗겼다.
짙게 분홍빛이 도는 머리칼과 청(淸)의 색이 뒤섞인 눈이 보였다.
“그래, 이렇게 생겼었지.”
“그렇게 봐도 내가 탈을 다시 쓰면 기억 못하게 될 텐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청해솔이 들고 있던 초랭이 탈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초랭이가 별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금방 복구된다니까?”
“이렇게 해도?”
산산이 조각났던 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복구되기 힘들 것 같은데. 이 탈의 주인인 어르신의 생각은 어때?”
물어봤자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누나는 천재인 건지 미친 사람인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얼어붙은 탈의 조각은 원상태로 복구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청해솔이 웃음을 지었다.
“가문의 늙은이들께서는 나를 천재라고 부르고, 내 또래는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뭐, 어르신께서는 편하게 생각하도록 해.”
초랭이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것이 풀렸다. 청해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초랭이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제 한 배를 함께 탄 내 사람이잖아. 잘 부탁해, 청정하.”
초랭이가, 아니.
청정하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
깨어나 보니 집이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아빠?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다들 꿈나라에 간 건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도대체 언제 돌아온 거래?
아무래도 류화홍의 도움을 받아 집에 온 모양이었다.
단예랑 단이, 단아는 집에 잘 갔나? 도윤이도 잘 갔겠지?
네 사람 모두 나랑 저세상이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을 텐데.
가주 경합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따로 마련된 방에 머물렀었다. 아무래도 윤사해의 화를 풀어 주려고 그런 모양이었는데…….
“청 가문과 관련된 일은 이번에 새로 가주가 된 분과만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게, 서 비서.”
아무래도 효과가 없었나 보다.
윤사해가 서차웅과의 전화를 끊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아빠!”
“리사?”
윤사해가 놀란 눈을 보였다. 그의 품에는 저세상이 안겨 있었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에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좀 더 자지, 왜 일어났니?”
“그냥 눈이 떠졌어.”
나는 저세상이 깨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윤사해에게 속닥거렸다.
“세상이 오빠, 아직 많이 아파?”
윤사해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졌단다.”
그렇지만 걱정이 됐다.
망할 청 가문 같으니라고! 우리 주인공님 살이 쏙 빠지고 말았잖아!
내가 불퉁한 얼굴로 울상을 짓자 윤사해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리사, 세상이 오빠가 많이 걱정되면 오늘은 같이 자지 않겠니?”
아주 벼락같은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