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가주 경합(5)
“아아, 지루해. 이번 대의 가주 후보들은 왜 이렇게 굼떠?”
망할 초랭이가 바닷속에서 유유히 떠다니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올 것 같은데, 그만 가는 게 어때요?”
“싫어. 가도 너희가 회오리에 휩쓸리는 건 보고 갈 거야.”
저 미친놈이.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우리와 다른 물방울 속에 있는 윤리오와 윤리타, 청해진은 아직까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CW 산의 위치 추적 장치는 반응도 없고 말이지. 나는 힘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오빠, 어떻게 하면 좋지?”
“누구라도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저세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우리끼리 어떻게 저 미친 놈을 잡겠어?”
저세상도 초랭이가 미친놈인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오빠. 누가 오기 전에 우리가 세상 하직하면?”
“세상 하직이라니…….”
저세상이 앓는 목소리를 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그러겠어? 암만 미친놈이라고 하더라도 생각이란 게 있겠지.”
글쎄, 없어 보이는데.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장천의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CW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암만 이곳이 바닷속이라도 진작 내 위치를 특정하고 나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렸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였다. 바닷속에서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으아악!”
거세게 분 바람에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출렁거렸다. 저세상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저세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된 듯 그를 세게 끌어안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야? 방금 전에 뭐였어?”
“바람.”
“바람인 건 알아!”
그런데 바닷속에서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고!
아니, 잠깐.
바닷속에서 바람이 불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하, 이게 무슨 상황일까? 리사와 세상이, 내 멍청한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이 빌어먹을 늙은이들 손에 잡혀 있는 건 알았는데 말이야.”
청해솔.
청(淸)의 피를 가장 강하게 타고난 그의 후손이라면 바닷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거야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청해솔이 초랭이를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런데 너는 뭘까? 애들 뒤에 있는 저건 또 뭐고.”
초랭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뭐기는? 시험 난이도가 너무 쉬운 것 같아서 살짝 건든 거지.”
초랭이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오랜만이야! 역시 청의 후손, 그때 이후로 몇 년이 지났는데 얼굴에 변함이 없네?”
“뭐……?”
청해솔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빌어먹을 탈 때문에 초랭이의 얼굴을 잊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나는 청해솔에게 친절하게 일러 줬다.
“언니! 초랭이야! 해진이 오빠 죽이려고 했던 새끼!”
저세상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새끼’라는 욕설 때문인 듯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초랭이……?”
“응, 초랭이랍니다.”
초랭이가 한손을 들었다. 그의 손을 중심으로 거품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탈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그대로 얼굴 위에 탈을 덮어썼다.
“누나가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다행이야! 의뢰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겠어!”
“의뢰?”
“그렇게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봐도 안 알려 줄 거야.”
즐거움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이렇게 보여도 비밀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라.”
얼씨구, 웃기시네?
무슨 의뢰를 받았는지 우리 앞에서 신나게 나불거렸으면서!
나는 빼액 소리 질렀다.
“언니! 저 자식 언니 죽이려고 온 거야! 청류하가 의뢰했어!”
청해솔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청류하, 그 미친놈이…….”
“아하하! 마음대로 생각해!”
초랭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부채를 꺼내 쥐었다. 『각성, 그 후』에서 항상 들고 다녔던 그 부채였다.
후웅-!
초랭이의 손짓 한 번에 바닷속이 요동쳤다. 나와 저세상은 서로 꼭 끌어안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청의 가주가 직접 만든 물방울인 것 같으니, 웬만해서는 터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초랭이.
『각성, 그 후』에서 청해솔이 가볍게 놀아 줬다고 하나, 그녀와 호각을 다투던 탈쟁이였다.
더욱이 청해솔은 『각성, 그 후』에서와 달리 청(淸)의 가주도 아닌 상태.
‘괜찮겠지?’
하지만 나는 청해솔을 향한 나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청해솔은 초랭이가 일으키는 바람을 아주 손쉽게 갈라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초랭이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의 뒤에 있는 우리들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초랭이의 공격을 막아내던 청해솔이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히 애들 인질로 잡지 말고 밖에 나가서 싸우는 게 어때?”
“으음.”
초랭이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청해솔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초랭이는 그런 그녀를 놀리듯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선 나불거렸다.
“인질이란 게 얼마나 유용한데! 누나는 내가 이걸 포기할 것 같아?”
“계속, 누나, 누나 거리지.”
청해솔이 비딱하게 웃었다.
“수십, 수백 년 전의 사촌 어르신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
사촌 어르신.
그 말에 초랭이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꽤나 당황한 듯이 보였다. 답지 않게 말이지.
“너, 지금 뭐라고.”
“사촌 어르신이라고 했어. 나이가 나이인지라 귀가 잘 안 들리나봐?”
청해솔은 초랭이를 놀리듯이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방계 가문의 사람들은 항렬에 상관없이 정(淨)으로 돌림자를 쓴 것 같은데, 맞아?”
방계 가문의 사람들이라니.
“세상이 오빠, 해솔이 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겠어?”
“아니, 모르겠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야.”
저세상이 말하는 ‘처음’이란, 『각성, 그 후』를 포함한 모든 삶을 통틀어 처음이란 거겠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나는 청해솔과 초랭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누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청해솔이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청정운, 청정류연…….”
청해솔은 여러 이름을 나열했다.
“이 중에서 어르신의 이름은 뭘까? 가르쳐 주시려나?”
“그 입 닥치지 못해?!”
초랭이가 답지 않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쥐고 있던 부채를 청해솔을 향해 치켜들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청의 애새끼야.”
“어르신 역시 청의 애새끼면서?”
초랭이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한 번만 더 되도 않는 소리를 나불거리면 저 물방울들을 모두 터트려 버리겠어. 청의 가주라고 해 봤자, 그 실력 별 거 아니거든.”
아니, 왜 우리를 가지고 그러세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청해솔도 기가 차다는 듯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댁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들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 우습지 않아?”
“전혀 우습지 않은데?”
초랭이는 당장에라도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물방울을 터트려 버릴 기세였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나는 청해솔을 두 눈에 담으며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사용했다.
【적용 대상, 청(淸)하리다.】
다행이다! 특수 스킬에도 적용이 되는구나! 나는 안도하며 청해솔을 향해 외쳤다.
“해솔이 언니!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싸워!”
“리사?”
청해솔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고 초랭이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윤사해의 자식 아니랄까 봐, 겁도 없이 나불대기는!”
겁도 없이 나불대는 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나불대는 거다!
나는 보란 듯이 물을 일으켜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물방울을 튼튼하게 감쌌다.
힘을 조절하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청(淸)의 힘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 줬다.
“뭐야, 어떻게……!”
초랭이가 경악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여전히 잠들어 있는 오빠들의 물방울도 튼튼하게 만들어 줬다.
청해솔이 그것을 확인하고는 씨익 입꼬리를 울렸다.
“어쩌나? 내 동생도, 윤사해 길드장님의 자녀분들도 이제 인질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네.”
초랭이가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그는 곧 비릿하게 웃으며 청해솔에게 말했다.
“그거야 아직 모를 일이지.”
후웅, 일으켜진 바람에 물방울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청(淸)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는데도 그랬다.
“바닥에 엎드려, 윤리사!”
저세상이 내 머리를 잡고선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이런다고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초랭이는 쥐고 있던 부채를 몇 번이고 휘두르며 바람을 일으켰다. 회오리가 커다란 용오름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청해솔이 수면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은 용오름을 보며 초랭이를 비아냥거렸다.
“청의 보물로 잘도 노네.”
“이보다 더 즐겁게 놀 수 있는데. 보여 줄까, 누나?”
“아니, 굳이 보여 줄 필요 없어. 그리고.”
청해솔이 걸음을 박차 단숨에 초랭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대로 다리를 휘둘렀다.
아쉽게도 청해솔의 발길질은 허공에 잔잔한 물보라만 일으켰을 뿐이었다.
가볍게 청해솔의 공격을 피한 초랭이가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너무하네. 말하다 말고 공격이라니. 이렇게 된 거, 그냥 보여줄게. 거절하지 마, 누나.”
“보여 줄 필요 없다고 해도 그러네. 나이를 먹으면 고집만 는다더니, 네가 딱 그래.”
“시끄러.”
초랭이가 으득 갈고는 펼치고 있던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동시에 하늘 높이 치솟아 있던 용오름이 얼어붙었다.
난데없이 왜 얼음 쇼인가 했더니.
“너……!”
“하하! 어디 한 번 잘 막아 봐!”
얼어붙었던 용오름이 산산이 조각나며 우리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날카로운 것이 물방울에 닿는 순간, 내가 청(淸)의 힘을 부리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물방울은 속수무책으로 터지고 말 거라고.
“리사! 바람을 휘둘러! 어서!”
청해솔이 뒤늦게 우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청(淸)의 힘을 사용했다.
바람을 어떻게 휘두르란 건지 모르겠지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어디 한 번 불어봐!
나는 청해솔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휘둘러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콰과광-!
그러나 거센 돌풍을 일으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윤리사……!”
“하, 하하.”
힘 조절에 실패하여 우리를 보호하고 있던 물방울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내리던 얼음 조각들은 잘게 부서져 버렸다는 것.
불행인 점은.
“으으읍!”
여기가 바닷속이라는 것.
“리사! 세상아!”
청(淸)의 사람들처럼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호흡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청의 힘을 다룰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바닷물에 이성이 마비된 걸 수도.
어쨌거나 나와 저세상은 두 손을 들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청해솔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이 빌어먹을 탈쟁이가……!”
초랭이에 의해 물러나야만 했다. 그럴수록 내 의식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이대로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수면 위, 빛이 스며들고 있는 가장 위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내 커다란 손이 나와 저세상을 잡았다.
동시에.
“불쌍하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청정하!”
청해솔의 성난 외침과 함께 바다가 바닥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