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청(淸) 가문(4)
한단예는 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윤리사를 흘긋거렸다.
윤리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리사, 이건……?’
‘팔찌!’
‘팔찌……?’
‘응! 누가 단예나 단아 괴롭히려고 하면 토끼 누르면 돼! 그럼, 강한 어른이 구하러 온다고 했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친애하는 친구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건.
한단예는 일곱 살의 어린 아이로 돌아가 윤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 윤리사는 세상의 모두를 거부하는 아이였다.
때문에 한단예는 윤리사와 친해지고자 했다.
아이가 꼭 닫아 버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윤리사는 도대체 무슨 상처를 입었는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한 마디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쌀쌀맞게 ‘저리 가’라고 하거나, 묵묵부답으로 무시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한단예는 놀랐었다.
‘고마워.’
윤리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저와 제 여동생에게 그런 인사를 건넨 것이 말이다.
한단예는 수년이 지나 버린 추억을 떠올리며 애틋하게 미소를 그렸다.
“윤리사, 한단예 좀 봐. 이상하게 웃고 있어.”
“셋째야…….”
그러나 때마침 분위기 깬 동생 덕분에 한단예가 앓는 목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리사는 그런 한단예를 보고는 방긋 웃었다.
“왜 그래, 단아야! 내 눈에는 예쁘게만 보이는데!”
한단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윤리사 역시 한단예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딸랑-!
밖에서부터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윤리사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는 말했다.
“단예야, 단아야. 나가자!”
이제, 중앙 마당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
윤리오와 윤리타가 보였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리사!”
나는 한달음에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달려갔다. 윤리오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물었다.
“화홍이 형 도움 없이 친구들이랑 같이 버스타고 내려왔다며? 힘들지 않았어?”
“응,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리고 타고 온 건 버스가 아니라 리무진이었어, 리오 오빠.
나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윤리오를 향해 방긋 웃어 줬다.
“오빠들은 하루 일찍 내려와서 뭐했어? 해진이 오빠랑 놀았어?”
“청해진 얼굴은 구경도 못했어.”
윤리타가 툴툴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해진이 오빠랑 놀려고 하루 일찍 내려간 거 아니었어?”
“으음, 그게 말이야.”
윤리오가 대답을 피하며 어물쩍거렸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 보니 윤리오와 윤리타는 마당의 구석에 서 있었다.
단예와 단아, 그리고 막 나오고 있는 도윤이와 단이한테서 최대한 떨어져 있겠다는 듯이 말이다.
오호라, 가만 보니 내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하루 먼저 움직였나 보구나?
나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사실,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번 체험 활동에 참가할 수 없었다.
청(淸) 가문에서 진행하는 체험 활동 프로그램은 미성년자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해진이 윤사해의 이름을 들먹이며 가문의 원로들을 설득시켰다고 한다.
도대체 우리 아빠는 청(淸) 가문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각성, 그 후』에서는 거의 접점이 없었던 곳인데 말이지.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모였군요.”
나는 윤리오의 품에서 내려와 그의 옆에 섰다. 어느새 저세상도 윤리오와 윤리타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우리를 손님관으로 안내해 준 정하담이 단상 위에 서서는 말했다.
“지금부터 청(淸)의 직계 후손이신 해진 님께서 여러분들께 저택을 소개시켜 드릴 겁니다.”
정하담의 입에서 나온 ‘님’ 소리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경악했다.
“윤리오, 방금 들었어? 해진 님이래, 해진 님.”
“나도 들었어, 윤리타. 해진 님이라니. 우리도 이매망량의 분들께 저렇게 불리지 않는데.”
정하담 옆으로 선 청해진이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윤리오, 윤리타. 그만 놀리지?”
“아이고, 저는 놀린 적 없답니다. 해진 님.”
윤리타가 윤리오를 따라 굽실거리며 말했다.
“저도 놀린 적 없어요, 해진 님.”
“야!”
청해진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 질렀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그 소리에 숨죽여 키득거렸다.
나참, 애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나 보다. 스무 살이 됐어도 여전히 아이같은 오빠들이었다.
청해진이 뒤늦게 정신을 챙기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 얘들아. 너희 어릴 적에 리사네 집에서 봤었는데, 나 기억하니? 내 이름은 청해진이라고 해.”
“옆에 있는 오빠가 이름 알려 줬는데 왜 또 소개하는 거지?”
단아의 혼잣말에 청해진이 할 말을 잃은 얼굴을 보였다.
단예와 단이가 황급히 단아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네, 기억해요. 해진 님.”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해진 님.”
아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님’자 소리에 청해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얘들아, 너희까지 ‘님’자 붙여서 나를 부를 필요는 없어. 그냥 편하게 불러 줘, 제발…….”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요?”
청해진이 상처 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리사야.”
“히힛.”
나는 헤실거리며 손을 내렸다.
장난인 거 알지, 해진이 오빠?
청해진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청(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해도, 나는 너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니까 경외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니, 하지 마!”
“네에.”
“윤리타, 너는 대답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청해진이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가 방문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알려 줄 거야. 우리 집이 좀 넓은 편이라 길 잃기 쉬우니까 나를 잘…….”
우당탕!
바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청해진의 말이 끊겼다. 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청해진이 하려던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길 잃지 않게 자신을 잘 따라오라는 거겠지.
청해진이 미간을 살포지 좁히며 대문을 바라봤다. 정하담이 단상에서 내려가 바깥을 향해 물었다.
“밖에 무슨 일입니까?”
“그게, 류하 님께서……!”
무슨 일인가 하니, 청류하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왜 찾아온 거지? 청류하에게 걸었던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는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종료됐다고 나타났었는데.
“류하? 류하 형?”
청해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굉음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정하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게 스킬을 걸어?!”
아무래도 하찮게 여기는 청의 가신이 제게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건 줄 알고 찾아왔나 보다.
정하담이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한 얼굴을 보였다. 그에 나선 사람은 청해진이었다.
“류하 형, 무슨 일이세요? 하담 형이 형한테 무슨 스킬을 걸었다고 그래요?”
“해진아, 저 미천한 녀석을 아직도 ‘형’이라고 부르는 거니?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그보다 비키렴. 주제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교육시켜야겠으니까.”
“류하 형.”
“비키라니까!”
청류하가 저를 붙잡는 청해지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쳤다.
에휴, 『각성, 그 후』에서 청(淸) 가문을 멸문시킬 뻔했던 장본인답게 성질머리 한 번 고약하다니까?
아무래도 뺨 한 대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윤리오와 윤리타 몰래 청류하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윤리사, 어디 가려고?”
“세상이 오빠…….”
붙잡힌 손목에 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놔 줘.”
“싫어.”
나는 물끄러미 저세상을 노려봤다. 저세상은 태연하게 내 시선을 맞받아 칠 뿐이었다.
그때,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청류하?”
“누나!”
청해솔이었다.
아니, 청해솔이 왜 여기에서 나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솔 언니! 내가 기껏 가주 경합전에 휘말리지 말라고 나서줬는데, 오면 어떻게 해?!
***
윤리사가 청해솔의 등장에 울상을 지을 때, 청해솔은 제 사촌을 보며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아랫사람들한테 함부로 손찌검하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구나?”
청류하가 짜증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언제 내려왔대? 가주 자리에 뒤늦게 관심이 생긴 거야?”
“설마.”
청해솔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주 자리는 줘도 안 가질 테니까 너무 걱정 마. 현 가주님께서 암만 내게 가주 자리를 넘겨 주고 싶다고 해도 관심 없거든.”
“기고만장하기는!”
“잘난 걸 아는 것도 청(淸)의 사람이 가져야할 미덕이잖아?”
청해솔이 청류하를 향해 성큼, 한 걸음 내딛고는 말했다.
“하지만 아랫사람 함부로 다루는 건 미덕이 아니지. 예나, 지금이나. 그걸 너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네?”
청류하가 이를 으득 갈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씩씩거리며 손님관을 벗어났다.
청해솔은 그 뒷모습에 짧게 혀를 찬 후 정하담을 보며 말했다.
“여전히 고생이 많네요, 하담 씨.”
“아닙니다, 해솔 님.”
정하담이 고개를 꾸벅거렸다.
“누나, 가문에는 무슨 일로 내려온 거야? 가주 경합 때문은 아니지?”
“아니라고 했잖아. 잠시 알아볼 게 있어서 온 것뿐이야. 그보다…….”
청해솔의 시선이 윤리오와 윤리타, 둘의 아래에 서 있는 윤리사와 저세상에게로 향했다.
“너희가 왜 우리 가문의 빌어먹을 체험 활동을 신청했었나 했더니, 청해진 때문이었나 보구나? 가문의 멍청이들이 벌이는 수작질에서 구해 주려고.”
다소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윤리사가 두 눈을 데굴 굴렸다.
네, 언니.
그런데 해진이 오빠뿐만이 아니라 언니도 구해 주려고 그런 건데 말짱 도루묵이 됐네요.
윤리사는 치미는 말을 꾹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