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청(淸) 가문(1)
난데없이 찾아와 살려 달라니.
저세상과 사이좋게 숙제를 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리오와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리오가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청해진에게 물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는 갑자기 뭐라는 거야?”
윤리타도 고개를 끄덕이며 청해진에게 물었다.
“맞아. 무슨 일인지 똑바로 이야기해 줘야 살려 주든 말든 하지.”
청해진이 울상을 지었다.
“가문의 어르신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해!”
“가문의 어르신들이라면, 청 가문의 사람들 말이야?”
“응! 망할 늙은이들이 백정 때문에 다친 것을 빌미로 이제 와서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니까?!”
어르신들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늙은이들이란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들의 대화에서 관심을 끄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끌고 가려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아니야?”
“인제 와서?”
청해진이 윤리오의 물음에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윤리타가 말했다.
“인제 와서는 아니지. 너 입원해 있을 동안에도 청 가문에서 사람들이 계속 왔었잖아.”
“그건 우리 누나 보려고 온 거야! 내 병문안은 핑계였다고!”
윤리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네 병문안을 빌미로 해솔이 누나를 보러 왔었다고?”
“응, 가문의 늙은이들은 나한테 관심 없거든. 우리 누나라면 몰라도.”
청해진이 불퉁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나를 끌고 가려는 것도 그래. 곧 있을 가주 경합 때문일 걸?”
청해진의 입에서 들린 단어에 나도 모르게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저세상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내게 말했다.
“야, 윤리사. 형들 이야기에 집중하지 말고 숙제에 집중하기나 해.”
나는 혀를 날름 내밀어 주었다.
윤리오와 윤리타,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청해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니까 계속 들어야지!
“가주 경합? 벌써 때가 그렇게 됐어?”
윤리오가 놀라 물었다. 청해진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최고참 늙은이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거든. 늦기 전에 다음 가주가 될 후계자를 뽑을 생각인 모양이더라고.”
“하지만 너는 어차피 가주 경합에 참가 못하지 않아? 청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가주 경합에 참가하려면 스무 살이 넘어야 된다고 들었는데.”
윤리오의 말에 청해진이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스무 살 넘는 사람이 내 가까이에 있잖아.”
“해솔이 누나?”
“응.”
청해진이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 내일 하시는 우리 최고참 늙은이께서 누나를 다음 후계자로 지목한 상태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하지만 해솔이 누나는…….”
“가문 일에 관심이 없지.”
청해진이 윤리타의 말을 끊고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일에는 관심이 많거든. 엄청.”
청 가문의 늙은이들이, 아니. 어르신들이 왜 청해진을 끌고 가려는지 알겠다.
청해솔을 억지로라도 가주 경합에 참가시키기 위해서구나? 그래야, 현 가주의 바람대로 청해솔을 가주의 자리에 올릴 테니.
‘흐음.’
『각성, 그 후』에서 청해솔은 청 가문의 가주로 등장했었다.
별칭은 나태한 용왕.
가문의 일에 시종일관 관심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가문을 위하다가 죽은 인물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청 가문의 가주가 되었는지 『각성, 그 후』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짐작하건대 이번에 있을 가주 경합을 통해 가주가 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윤리오가 시무룩한 얼굴을 보이고 있는 청해진에게 말했다.
“그럼, 해솔이 누나한테 말해. 가문의 사람들이 귀찮게 군다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청해진이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그런 그를 보며 윤리타가 물었다.
“일러바치는 것 같아서 별로야?”
청해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럼, 뭐가 문제인데?”
윤리오가 답답하다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청해진은 주저하다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는 말했다.
“누나가 늙은이들이랑 전쟁을 치를 것 같아서.”
“아.”
윤리오와 윤리타가 나란히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청해진의 대답이 이해가 간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각성, 그 후』에서 나태한 용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청해솔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저세상 역시 그런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솔이 가문을 위해 끝까지 싸웠던 모습을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각성, 그 후』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지금의 세계.
이곳에서 만난 청해솔은 무턱대고 가문의 사람들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해진은 청해솔이 가문과 전쟁을 벌일까 봐 걱정된다는 듯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러니까 윤리오, 윤리타! 너희가 나 좀 살려 줘!”
“우리한테 그래 봤자…….”
윤리오와 윤리타가 난처하다는 듯이 곤란한 얼굴을 보였다.
“우리 늙은이들, 너희 아버지한테 약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좀 말해서 어떻게 해 주면 안 될까? 응?”
윤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해 달라는 거야?”
“맞아, 그리고 아빠는 바쁘다고!”
“나 하나 신경 써 줄 시간은 있으시겠지!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청해진이 절박하게 빌었다. 하지만 쌍둥이는 뾰족한 수가 없는 듯 여전히 곤란한 얼굴이었다.
청해진을 도울 방법을 떠올린 건 나였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윤리오와 윤리타가 ‘아차’하는 얼굴로 나와 저세상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우리가 거실에서 숙제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리사, 세상아. 미안해. 청해진이 너무 시끄러웠지?”
청해진이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같이 떠들었으면서!”
닥치라는 듯이 노려보는 쌍둥이의 시선에 곧장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매년 여름에, 해진이 오빠네 집에서 체험 활동을 벌이잖아.”
“응?”
분명 그랬다.
청 가문이 위치한 남해는 그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접근이 불가능한 성역(聖域)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매년 여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될 때가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접근을 허락하는 건 아니었고 가문의 전통을 체험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몇몇의 사람에게만 공개했었다.
분명,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이 그것을 이용해 청해솔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실패했었지만 말이다.
저세상이 내 말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는 오빠들이랑 같이 참가하고 싶은데.”
“어…….”
윤리타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설마, 내가 청해진의 도울 방법을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는 모습이었다. 윤리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리사, 그런데 올해 여름에는 청 가문에서 가주 경합이 예정되어 있어서…….”
“할 거야!”
청해진이 윤리오의 말을 다급하게 가로 막았다.
“우리 리사가 본가에서 체험 활동을 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열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내가 리사를, 세상이를! 그리고 너희를 보살펴 줘야지! 지내는데 불편함 없게 말이야!”
청해진, 진짜 절박하구나.
“어르신들께 올해에도 체험 활동 열어 달라고 말해 놓을게!”
윤리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그 어르신들, 너한테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
청해진이 방긋 웃었다.
“체험 활동 열어 주면 스스로 본가에 내려가겠다고 말하면 돼. 아니면 아저씨 좀 들먹일게.”
“장난해?!”
청해진의 입에서 윤사해가 거론되자 윤리오와 윤리타가 성난 목소리로 동시에 외쳤다.
하여튼 간에, 윤사해에 한해서는 이성이 나가 버리는 오빠들이었다.
아, 비단 윤사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구나. 나나 저세상의 이름이 거론됐어도 저 반응이었을 것 같다.
어쨌든 청해진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보다 놀라웠다.
‘우리 늙은이들, 너희 아버지한테 약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좀 말해서 어떻게 해 주면 안 될까? 응?’
청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거주자의 후손이란 사실에 자부심이 넘쳐나는 오만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윤사해에게 무르다니.
‘그랬던가?’
『각성, 그 후』에서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뭐, 아무튼 청해솔이 청해진으로 인해 가주 경합에 억지로 참가하게 되는 일은 막은 것 같아 다행이다.
나로 인해 체험 활동이 열리게 되면, 청해진은 가주 경합의 일에서 완전히 빠지게 될 테니 말이다.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느냐고?
윤사해한테 부탁할 거거든.
올해 열릴 청 가문의 체험 활동에 참가하고 싶은데, 낯선 곳은 조금 무서우니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물론, 열릴 체험 활동에 윤리오와 윤리타, 그리고 저세상이 함께할 테지만.
이왕 도울 거, 확실하게 돕는 게 좋을 테니 말이지!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청해진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몰랐다.
“너희가 왜 우리 가문의 빌어먹을 체험 활동을 신청했었나 했더니, 청해진 때문이었나 보구나? 가문의 멍청이들이 벌이는 수작질에서 구해 주려고.”
기껏, 청해진을 도운 보람도 없이 청해솔이 가주 경합에 맞춰 스스로 가문을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