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백정(5)
걸음을 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몰려왔다. 백정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숲을 벗어나고자 했다.
목 아래에 길게 났던 상처는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문제라면 성했던 부분도 얼어붙었다는 거다.
또한, 지금도 백정의 몸은 얼어붙고 있었다.
‘글쎄, 별 짓은 안 했어. 내가 죽어도, 네가 얼어붙을 수 있게 만들었을 뿐.’
떠오르는 조소 섞인 목소리에 백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당장에라도 지옥에 쳐들어가 양반 새끼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멱살만 잡을까? 그를 몇 번이고 다시 죽이고 싶었다.
그때 백정이 걸음을 멈췄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명.’
두 사람 모두 백정에게는 익숙한 자들이었다.
일그러졌던 백정의 얼굴이 아예 구겨져 버렸다.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만큼 백정의 얼굴이 썩어 있었다는 거다.
곧이어 백정에게 다가오고 있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재수가 없으려니……!”
윤사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백정. 그 얼굴을 보는 건 간만인 것 같은데.”
“내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고 있었나 봐?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응?”
잊지 않고 기억해 주고 있었다라.
빌어먹을 얼굴 위로 덮어쓰고 있는 탈이 아니었더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그러지는 않았으려나.’
윤사해가 경멸 섞인 눈빛으로 백정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저런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면 탈을 덮어 쓰고 있지 않았더라도 알아차렸을 것 같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어차피 곧 생각할 머리가 날아갈 테니.”
“이거 무서워라.”
백정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키득거렸다. 저렇게 말해도 윤사해는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다.
머리가 아니라 팔, 다리 하나가 날아가 버리겠지마는 말이다.
윤사해가 저를 비웃고 있는 백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최설윤 길드장.”
“아아,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봐.”
따악, 최설윤의 손가락이 맞부딪치기 무섭게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내 일어난 돌풍이 시험장 내부를 비추고 있던 CCTV를 모두 망가뜨렸다.
“지금, 무슨…….”
최설윤이 당혹스러워하는 백정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윤사해 길드장? 윤사해 길드장께서 이걸 원하신 게 맞는지 잘 모르겠네.”
“맞네, 최설윤 길드장.”
윤사해의 아래에서 옅게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이내 검의 형태를 띈 그것을 윤사해가 손에 쥐었다.
“불의의 사고로 치지.”
“뭐……?”
“내가 너를 죽여 버리는 것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라고 하자는 거다.”
“이, 개새끼가!”
저를 한 입 거리도 안 된다는 듯이 구는 윤사해의 모습에 백정이 사납게 소리 질렀다.
눈앞의 남자는 항상 그랬다.
오만하고, 저 혼자 고귀한 줄 안다. 백정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윤사해의 앞에 나타났었더랬다.
자신을 향해 보내는 경멸 섞인 시선, 그러나 윤사해는 항상 저를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것을, 백정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백정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윤사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해도 그걸 피할 생각은 없었다.
“길동무로 삼아 주마, 윤사해.”
양반이 그랬던 것처럼 저주라도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저 오만하고 고귀한 자태에 흠집이라도 내 줄 생각이었다.
윤사해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
순식간에 제 앞에 당도한 윤사해의 모습에 백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윤사해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백정, 나는 언제나 그대를 죽일 수 있었다네. 그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탈쟁이 녀석들도. 단지 봐주고 있었을 뿐이지. 어쩔 수가 없어서.”
분노가 실린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윤사해의 검이 백정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커… 흑……!”
윤사해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심장을 갈랐다. 백정의 몸이 힘없이 꺾였다.
“윤사해……!”
“심장을 찔렀는데도 아직 살아 있다니, 몸 하나는 정말 튼튼한 모양이야. 아니면 괴물이거나.”
백정이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리고는 윤사해의 옷자락을 끌어 잡았다.
“괴물은 너겠지…! 네 애새끼 역시 마찬가지야……!”
윤리오와 윤리타, 둘 중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으나 윤사해는 눈가를 찡그렸다.
백정이 윤사해의 얼굴 밖으로 드러난 불쾌감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언젠가 나와 똑같아질 거다. 너도, 네 애새끼도! 홀로 고귀한 척, 오만하게……!”
푸욱-!
백정의 심장을 찔렀던 검이 이번에는 그의 목을 찔렀다. 윤사해는 검을 비틀어 빼 버린 후 말했다.
“심장이 아니라 목을 찌를 걸 그랬어. 이제야 조용해졌군.”
윤사해가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최설윤에게 물었다.
“최설윤 길드장, 뒤처리 해 줄 수 있겠나.”
“당연하지.”
최설윤이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죽어가고 있는 백정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AMO든, 유랑단이든 그 어느 곳에서도 장난질 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을게. 그러니까 윤사해 길드장은 갈 길 가 봐.”
윤사해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들들을 찾을 수 있었다.
“리오, 리타.”
“아버지?”
“아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첫째 아들과 그런 그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보고 있던 둘째 아들을.
윤사해는 곧장 윤리오와 윤리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둘은 두 뺨을 붉히며 서로를 흘긋거렸다.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윤사해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들을 끌어안고 있는 윤사해의 팔에서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기에.
때문에 윤리오와 윤리타는 가만히 윤사해의 품에 안겨 있기로 했다.
-……아아, 제 42회 헌터 자격증 시험과 관련하여 AMO에서 알려 드립니다.
헌터 자격증 시험의 중단을 알리는 방송이 울릴 때까지, 부자(父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
AMO측에서 주관한 헌터 자격증 시험은 결국 도중에 중단이 되고 말았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백정이 보안을 뚫고서 시험장 내부로 들어온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으니 중단되는 건 당연했다.
-저, 강산에는 이번 사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우리 최애님께서 저렇게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고.
크흡, 최애님께서 언론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걸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져 왔다.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눈이 또 아프신가요?”
“네?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지금 광혜원한테서 진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을 오래 사용하면서 생겼던 부작용은 나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윤사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나는 순순히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일주일이 넘도록 쉬면서 광혜원한테 진료를 받게 된 거다.
“이제 아픈 곳 없이 모두 나으신 것 같네요. 내일이나 모레부터 학교에 다시 나가셔도 될 것 같아요.”
“앗싸!”
나는 활짝 웃었다. 그동안 집에만 있느라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광혜원은 좋아라 하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나 좋으세요?”
“네! 언니, 이제 해진이 오빠 보러 가죠?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청해진은 백정에게 당한 상처가 깊어 병원에 입원 중인 상태였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윤리오도 함께 입원 중이었는데 몸이 모두 회복되어 지금은 퇴원한 상태였다.
광혜원이 내 물음에 놀란 눈을 보였다.
“아가씨도요?”
“네! 집에 계속 있으니까 답답해서요. 그리고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지금 해진이 오빠랑 있을 테니까요! 오빠들 보러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해진이는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죠?”
앗, 들켰다.
멋쩍게 뺨을 긁적이는데, 광혜원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내게 말했다.
“장난이에요, 아가씨. 우선 길드장님께 한 번 여쭤 볼게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윤사해에게서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빠, 제발! 일주일 동안 집에서 꼼짝도 않고 광혜원 언니한테서 진료 받았으니 밖으로 나가게 해 줘! 플리즈!
다행히도 윤사해는 내 외출을 허락해 줬다.
“길드장님께서 함께 움직여도 괜찮다고 하시네요.”
“야호!”
나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광혜원이 그런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사이좋게 류화홍의 간편하고 빠른 이동 서비스를 이용해 청해진의 병실에 들어섰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병실에 없었다.
“리사?”
“해진이 오빠 안녕!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보다시피 괜찮지. 그런데 윤리사, 너 내 안부를 묻는 게 너무 늦는 것 아니야?”
“안 늦었는데! 그보다 해진이 오빠,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는?”
“매점 갔어. 누나랑.”
“누나?”
청해진의 병실을 방문할 ‘누나’가 광혜원 말고 또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 ‘누나’란 분이 오래지 않아 청해진의 병실로 들어왔다.
“청해진, 게임하려면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밖에까지 소리 다 들린다고.”
“나 게임 안 했어!”
숲을 닮은 청해진과는 다르게, 바다를 닮은 여자였다.
청해솔.
청해진의 누나이자 청(淸) 가문의 마지막 가주였던 그녀가 나를 보고는 놀란 얼굴을 보였다.
“리사?”
나는 활짝 웃으며 청해솔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해솔이 언니!”
“어… 그래…….”
청해진이 내 인사에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하긴,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어쩌면 내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건지도 모르지.
“해솔이 왔어? 해진이랑 같이 있는 줄 알았으면 화홍이한테 조금 있다가 가라고 할 걸 그랬네.”
“아니에요, 혜원이 언니. 류화홍 녀석, 있어 봤자 시끄럽기만 하는데요, 뭘. 그보다 매번 동생 녀석을 봐주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길드장님께서 시켜서 하는 것뿐인 걸? 추가 수당도 주고 말이지.”
광혜원이 돈을 의미하는 제스쳐를 보여 주고는 청해진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자코 광혜원에게 몸을 내어주고 있던 청해진이 청해솔에게 물었다.
“누나, 윤리오랑 윤리타는?”
“아직 매점. 금방 올 거야. 혜원이 언니, 걔는 좀 어때요? 많이 나아졌나요?”
“응, 많이 좋아졌어. 하지만 아직…….”
어른들이 청해진의 상태를 두고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을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고, 윤리오와 윤리타가 돌아오기를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윤리오가 보였다. 윤리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보지.
나는 활짝 웃으며 윤리오에게 달려갔다.
“리오 오빠!”
“리사?”
윤리오가 놀란 눈으로 두 팔 벌려 나를 안아들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화홍이 오빠가 데려다 줬어! 혜원이 언니랑 같이!”
“청해진 걱정돼서 온 거야?”
그렇다고 대답하면 청해진을 당장 퇴원시킬 모양새였다.
청해진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아직 병원에 있어야할 상태인 것 같았는데 그렇게 둘 수야 없지.
나는 윤리오를 꼭 끌어안으며 방긋 웃었다.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보고 싶어서 왔어! 해진이 오빠랑 같이 있을 것 같아서!”
“우리 리사 갈수록 똑똑해지네. 오빠들이 어디 있을지 척척 찾아내고 말이야.”
“히힛.”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윤리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윤리오가 그런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윤리타 오면 같이 세상이 데리러 가자. 곧 하교할 시간이네.”
“응!”
나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하나뿐인 여동생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으나 윤리오는 그러지 못했다.
헌터 자격증 시험에서 백정과 검을 맞댄 후부터 그의 머릿속은 계속 복잡했다.
‘너, 지금 네 눈이 어떤지 모르지? 나랑 똑같아. 윤사해의 빌어먹을 애새끼야.’
백정이 마지막에 제게서 도망치면서 남긴 말 때문일 거다.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백정을 놓친 순간에 들었던 건 안도감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저 목을 제 손으로 베어내지 못했다는 허무함.
여기에서 윤리오는 걱정했다.
과연, 백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도 그런 감정을 느꼈을지를…….
“리타 오빠다! 리타 오빠!”
하나뿐인 여동생이 제 품에서 내려와 윤리타에게로 달려갔다.
“윤리사? 너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설마, 청해진 보러 왔어?!”
윤리타는 그런 여동생을 번쩍 안아 들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윤리사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고.
그러나 윤리오는 동생들이 보여주는 화기애애한 모습에 마음 편안하게 웃음을 터트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서 그러지 않았을 거란 대답을 내릴 수가 없었기에.
또한, 언젠가 자신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저 광경을 깨뜨리게 될 것 같아서.
때문에 윤리오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동생들한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윤리오를,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윤리사가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