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백정(3)
부딪친 검이 무겁다.
가까스로 백정의 검을 막아낸 윤리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윤리오!”
“오지 마!”
윤리오가 쌍둥이 동생과 하나뿐인 친구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눈앞의 탈쟁이가 노리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엄한 두 사람이 휘말리게 둘 수는 없었다.
“눈치 좋네. 내가 너를 노린다는 걸 단번에 파악하고.”
그거야,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으니까 그러지!
윤리오가 말을 내뱉는 대신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남자를 상대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윤리오는 지금 백정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은 근근이 검을 막아내고 있는데, 눈앞의 탈쟁이는 여유롭게 제 검을 상대 중이었다.
윤리오와 편안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백정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카앙-!
일순, 검이 뒤로 밀리며 윤리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당한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백정은 키득거리며 윤리오에게 속닥거렸다.
“나는 네 친구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데.”
윤리오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백정의 공격이 하나뿐인 친구에게로 향했다.
“청해진! 피해!”
청해진이 황급히 바람을 불러 일으켰지만, 백정의 매서운 검격은 그것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크흑……!”
“청해진!”
다행히도, 마지막에 윤리타가 청해진을 끌어당겨 치명상을 입는 건 피했다.
하지만 어깻죽지에 난 깊은 상처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윤리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 이 개자식이……!”
그는 크게 검을 휘두르며 백정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정은 그런 윤리오의 공격이 우습다는 듯, 손쉽게 피하며 히죽거렸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구나? 네 아버지가 검 쓰는 법을 제대로 안 가르쳐 줬나 봐?”
까드득, 윤리오의 입에서 성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백정의 말이 옳았다.
청해진이 공격당한 것에 눈이 뒤집혀 움직임이 쓸데없이 커지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정에게 농락만 당하고 말 거다. 윤리오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자세를 고쳤다.
【낙화유수(落花流水), 그대 적을 발아래 무릎 꿇려라.】
【우후개화(雨後開花), 그대 굳건해진 땅 위를 디뎌 검을 들어라.】
두 개의 성어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A, 숙련 불가] 아로새기나니>.
두 성어 중 무엇이 검에 새겨지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스킬이었다.
전자는 적의 능력치를 낮추는 너프 효과를 지녔고 후자는 자신의 능력치를 높이는 버프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새겨진 건, 우후개화(雨後開花).
‘좋았어.’
스킬의 효과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모든 능력치는 S급에 버금가게 오를 거다.
문제는 지속 효과가 짧다는 것.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눈앞의 남자를 제압해야 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에 공격당하는 건 윤리타일 거다.
차라리 자신이었음 좋았을 것을, 눈앞의 빌어먹을 탈쟁이는 제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해친 다음 자신을 노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윤리오가 초조한 마음을 가득 끌어안고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캉-! 카앙-!
백정은 여유만만하게 윤리오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여유는 곧 사라졌다.
카가각-!
막아내는 검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막기 버거울 정도의 힘이.
윤리오가 백정에게서 여유가 사라졌음을 알고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황했나 봐?”
빌어먹을 탈을 얼굴에 덮어쓰고 있어 그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백정은 분명 당황한 듯했다.
윤리오가 웃는 낯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백정이 휘청거렸다.
금방 자세를 잡고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뒤로 물러났지마는.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백정이 탈 아래로 얼굴을 찌푸렸다. 눈앞의 어린 녀석이 스킬을 사용한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다고?
‘그것도 나를 상대로?’
백정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검을 꽉 쥐었다.
윤리오가 단기간에 성장한 이유야 간단했다.
【스킬, <[A, 숙련 불가] 아로새기나니>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조정됩니다.】
<[A, 숙련 불가] 아로새기나니>의 등급이 S급으로 올랐다. ‘우후개화’의 효과로 단순히 능력치만 올랐던 것이, 완전히 S급이 된 거다.
그 예로, 윤리오의 검에는 새로운 성어가 새겨져 있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그대 다시 내딛은 발에 부서지지 않으리라.】
백정의 공격에 의해, 무리가 갔던 검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몸은 또 어떻고.
자잘하게 난 상처들도 천천히 치유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윤리오가 검을 고쳐 쥐며 뿌듯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굉장히 뛰어난 조력자가 있거든.”
사랑해 마지않는 자신의 동생이, 멀지 않은 곳에서 저를 도와주고 있다.
‘리사.’
어린 동생이 어떻게 저를 도와주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윤리오가 당장에라도 백정의 목을 베어낼 듯, 날선 기운을 내뿜었다.
“하하……!”
그 기세에 백정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가지고 놀아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스르릉-
백정의 손에 또 다른 검이 쥐어졌다. 그가 양손에 쥐어진 검을 교차시키며 비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괴롭혀 주마, 윤사해의 애새끼야.”
***
“백시진 팀장, 마지막 경고다. 시험장 내부로 통하는 문을 당장 열어.”
아무래도 윤사해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대외적으로 쓰는 말투를 집어치운 걸 보니까 말이다.
윤사해에게 백정이 나타난 걸 괜히 말했나 싶기는 개뿔!
지금, 윤리오는 죽기 살기로 백정과 맞부딪치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 경험 면에서나, 스킬의 운용력면에서나 모두 백정이 앞서고 있었지만 윤리오는 그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효과 덕분이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 스킬 적용 시간이 7분 남았습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스킬 효과가 끝나면 윤리오와 백정의 전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윤리오가 백정에 의해 큰 해를 입고 말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백시진 팀장!”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윤사해가 백시진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만일, 내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다쳤다가는 AMO는 각오해야 할 거다. 이매망량과 전쟁을 치를 각오를.”
“유, 윤사해 길드장님…….”
백시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곤란하다는 눈치였다. 그때, 백시진을 도와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윤사해 길드장.”
최설윤이 윤사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진정 좀 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백정이 나타났다잖아, 시험장 안에!”
“그러니까 그거.”
최설윤이 눈웃음을 짓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리사가 어떻게 알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윤사해 길드장은 암만 사랑하는 딸아이의 말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덥석 믿고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사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각성자란 것을, 이 자리에서 어떻게 밝혀!
“CCTV에서 봤어요.”
“응?”
조용히 있던 저세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윤리사랑 같이 CCTV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백정이 나타났거든요.”
“잠깐만요, 세상 군.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이번에는 장천의가 앞으로 나서 저세상에게 물었다. 저세상이 질문을 던져도 좋다고 허락해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백정의 얼굴을 어떻게 알고 그라고 확신하는 거지요? 세상 군은 잘 모르겠지만…….”
“알아요.”
저세상이 장천의의 말을 매섭게 끊고는 목소리를 내었다.
“유랑단의 아홉 탈이 쓰고 다니는 각 탈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는 걸요.”
그 말대로, 나는 지금까지 만난 모든 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윤리오와 전투 중인 백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저세상의 기억 속에서도 백정에 대한 얼굴이 희미해졌을 텐데, 그는 말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봤었거든요. 얼마 전에.”
“학교라면…….”
윤사해가 희게 질린 얼굴로 저세상에게 물었다.
“빛나리 초등학교 말이니, 세상아?”
“네.”
아이의 대답에 윤사해는 얼굴을 한 번 문질러내렸다. 저세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친구들이 교문 앞에 웬 남자가 서 있다고 했어요.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요. 창문 밖을 보니까 진짜였어요. 그래서 윤리사랑 같이 밖에 나가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저세상의 말이 이어질수록 희게 질려 있던 윤사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나와 저세상에게 붙여 놓았던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우리의 경호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야, 아빠. 진정해. 그분들은 그 남자가 백정이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걸?
저세상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CCTV 화면 속의 그 남자, 저랑 윤리사가 학교에서 봤던 그 남자랑 똑같았어요.”
그 말을 끝으로 최설윤과 장천의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리사가 왜 백정이라고 확신했는지 알겠네.”
“최근에 일어난 모든 시끄러운 일은 백정이 벌인 일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잠깐,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근처에서 백정이 소란을 일으켰다고 했잖아. 그건 뭐지?”
“눈속임 아닐까요.”
“하! 그 빌어먹을 탈쟁이 새끼, 단단히 준비하고 시험장에 침입한 모양이구나?”
“뭐든 상관없네.”
윤사해가 최설윤과 장천의의 대화를 끊었다.
“백시진 팀장, 말을 바꾸지.”
그가 두 눈을 번뜩이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시험장 내부의 응시생 전원. 그들 중 한 사람에게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매망량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윤사해가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다.
지금 당장, 시험장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라는.
백시진이 파르르, 입술을 떨다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내뱉고서 자리를 떴다.
상부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러나 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AMO라면, 시험장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라 허락할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릴 것 같았지만 아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무리하지 마, 윤리사.”
여러 개의 시스템 창 뒤로 저세상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두 눈이 내 얼굴을 빤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세상이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웅얼거렸다.
“네가 쓰러지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작게 들린 목소리가 따뜻했다. 그렇기에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상이 오빠.”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스킬 적용 시간은 이제 3분.
그 시간 안에 결판이 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