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10살을 무시하지 마라!(3)
큰일만 아니었으면 했는데 큰일이었다.
“싫어요, 아버지.”
“리오.”
윤사해가 다정하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윤리오는 불퉁한 얼굴로 윤사해를 노려볼 뿐이었다.
스무 살,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윤사해의 눈에 윤리오는 아직 아이처럼 보였다.
때문에 그는 잔뜩 토라진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말했지 않니. 백정이 노리는 건 검객이라고.”
윤리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윤사해는 그런 아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에게 당한 각성자는 모두 하나같이 검을 쓰는 자들이었단다. 네가 구해 준 사람도 마찬가지였고.”
“구해 준 거 아니에요.”
윤리오가 퉁명스레 말했다.
“애들이 신경 쓰지 않았다면 내버려 뒀을 거예요.”
“윤리오.”
윤사해가 앓듯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가고 있는 아들이었다.
‘그래도 에일린과는 다르게 자신의 흥미 위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꽤 곤란한 일이 자주 일어났을 거다.
자신이라면 분명 아들이 저지른 일을 아무 말 없이 수습하려고 했겠지만, 아들이 세간의 욕을 들어먹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어찌됐든 지금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뜻에는 변함이 없단다, 리오. 당분간 집에서 헌터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도록 하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지.
윤사해의 말에 윤리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버지!”
하지만 윤사해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듯, 윤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윤리오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저 혼자 집에 있으면 윤리타가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분명, 제 쌍둥이 동생이라면 저와 같이 집에 있으려고 할 거다.
‘헌터 자격증 시험은 다음에 또 준비하면 된다면서 말이지.’
윤리타를 들먹였음에도 윤사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윤리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설마 그걸 노리고……!”
윤사해가 정답이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윤리오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 질렀다.
“윤리타는 상관없잖아요! 백정 그 새끼는 검만 다루는 각성자들을 노리고 있다면서요?! 차라리 저만 집에서 시험 준비할게요! 윤리타한테 피해 주기 싫어요!”
그 새끼.
아들의 입에서 나온 험한 말에 윤사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말버릇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리타도 검을 사용하기는 하잖니.”
윤리타가 사용한다는 검은, 자신의 손바닥만 한 작은 나이프였다.
검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운 무기였지만 윤리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이대로 말을 얼버무리게 되면 윤리타와 함께 헌터 자격증 시험이 치러질 때까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될 거다.
그래도 헌터 자격증 시험은 치르게 해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윤리오가 뚱한 얼굴로 윤사해를 노려보며 말했다.
“집에서는 스킬을 운용할 수 없잖아요.”
“운용하게 만들어 주마.”
“네?”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너희를 집에 가두려고 하겠니?”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는 아들을 보며 윤사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렴.”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뭐지? 나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오랜만에 잠에서 일찍 깨어난 나는 두 눈을 비볐다.
별채가 있던 자리에 웬 돔 형태의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윤리사?”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난 저세상이 내게 다가왔다.
저세상이 창밖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저게 뭐야?”
“나도 궁금해.”
도대체 누가, 어떻게 저런 건물을 우리 집 별채가 있던 자리에 세웠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대답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건지 저세상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새삼스레 네가 3인칭 안 쓰는 게 신기해서.”
“이제 3학년이나 됐는데 어른스러워져야하지 않겠어?”
“뭐……?”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어제는 잘도 쓰더니.”
그거야 아이스크림을 얻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지금도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됐다.
“리사는 세상 돌아가는 법을 너무 잘 알거든! 그러니까 세상이 오빠!”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싫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저세상의 대답을 듣지 못한 척,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저기 한 번 가 보자.”
“싫다고!”
그러면서도 순순히 내 손에 이끌러가는 저세상이었다.
별채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건물은 생각보다 컸다. 도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지어졌는지 모르겠다. 별채는 또 어디로 치워 버린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안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광-!
건물을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저세상을 방패로 내세웠다.
“야, 윤리사.”
저세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배시시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저세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내게 물었다.
“안에 들어가 볼 거야?”
“응.”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가면 안 되지!
무엇보다 저 안에 위험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곳은 윤사해의 집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우와, 대박! 장천의 회장님께 사정사정해서 빌려 온 보람이 있네요? 길드장님 공격에도 벽이 멀쩡해요!”
안에 있던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인 윤사해였다. 윤사해뿐만 아니라 류화홍도 함께였다.
류화홍의 호들갑에 윤사해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자신의 공격에도 벽이 멀쩡하다는 것에 기분이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윤사해는 그대로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콰과광-!
벽에 깊은 생채기를 만들어 냈다.
마치, 짐승이 발톱을 휘갈긴 것처럼 난 자국에 류화홍이 입을 뻐금거렸다.
“와… 와우…….”
“흐음.”
윤사해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와는 달리 류화홍의 얼굴은 희게 질려 버렸다.
“아니, 길드장님! 이 건물 장천의 회장님께 빌려 온 거잖아요! 저렇게 상처를 내시면 어떻게 해요?!”
“호들갑 떨지 말고 자세히 좀 보게나, 류화홍 헌터.”
“헐? 복구되고 있네요?”
류화홍의 말대로 윤사해에 의해 크게 손상됐던 벽이 복구되고 있었다.
“장천의 회장 말로는, 슬라임에게서 추출한 핵을 이용했다는군.”
“네? 몬스터의 핵을요?”
“그래. 슬라임의 재생 능력을 이용했다는데 신기하지 않나.”
윽, 그러면 슬라임의 사체로 건물을 만들었다는 거잖아? 신기하기는 개뿔, 꺼림칙한 기분만 들었다.
윤사해는 건물의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 나가야겠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윤사해가 우리를 발견하고 말았다.
“리사, 세상아?”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다시 안으로 옮겼다.
“아빠!”
“둘 다 일찍 일어났구나.”
“응!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어.”
내 말에 윤사해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세상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무시다!
나는 윤사해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윤사해가 한쪽 팔로 나를 받쳐 안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류화홍 헌터가 당분간 너희의 등하교를 책임져 줄 거란다.”
“엑? 길드장님, 애들 하굣길만 책임져 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윤사해는 류화홍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내구성이라거나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조금 전으로 끝이 났나 보다.
그렇게 본채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윤리오와 윤리타와 만났다.
“아버지?”
“아빠?”
“리오랑 리타도 일찍 일어났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됐는데도 윤리오와 윤리타는 바른 생활 어른이를 실천 중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윤사해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 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에게 물었다.
“저 건물, 설마 아버지가 만드신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요?”
“만든 건 아니고 빌려 왔단다.”
윤사해의 말을 뒤이어 류화홍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침부터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지?”
“화홍이 형?”
아무래도 류화홍이 저 건물을 통째로 옮겨다 온 모양이었다.
류화홍, 보면 볼수록 능력이 좋단 말이지. 저 촐싹거리는 입만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안에서 얼마든지 스킬을 운용할 수 있겠더구나. 한 번 시험해 보고 오렴. 아침은 내가 준비하마.”
아버지, 그건 좀.
윤사해가 아침을 준비하다는 소리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윤리오가 방긋 웃으며 윤사해를 말렸다.
“괜찮아요, 아버지. 아침은 제가 준비할게요. 시험은 나중에 해 보죠. 어차피 집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니까요.”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지만 내 착각이겠지?
어제 윤사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다시 나빠진 건 아니었으면 했다.
***
내 걱정이 우습게도 윤사해와 윤리오의 사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서로 반찬을 골라 주기도 하며 다정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말이다.
아침을 끝낸 후, 나는 저세상과 함께 우렁차게 인사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류화홍이 곧장 나와 저세상의 어깨에 손을 얹자,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우와…….”
나와 저세상은 사이좋게 감탄했다. 바로 눈앞에 빛나리 초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홍이 오빠가 맨날 데려다 줬으면 좋겠어!”
“그건 곤란해요, 아가씨. 저는 대학 졸업을 준비해야하는 가련한 4학년이라고요.”
“리사는 3학년인데.”
“저랑 바꿀래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화홍이 오빠?
류화홍이 잔뜩 구겨진 내 얼굴을 보고는 키득거렸다.
“그럼, 학교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올게요. 아가씨도, 세상이도 선생님 말씀 잘 들으세요!”
“네, 형.”
“나중에 봐, 오빠!”
나와 저세상이 손을 흔들어 주기도 전에 류화홍은 모습을 감췄다.
우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교실로 향했다. 교실로 들어서기 전 도윤이가 우리를 반갑게 불렀다.
“리사! 세상이 형!”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찍 왔네, 백도윤?”
“아빠가 데려다 줬거든!”
도윤이가 활짝 웃고는 작게 손뼉을 쳤다.
“아, 맞아.”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우리에게 속닥거렸다.
“우리 아빠랑 삼촌이 말해 줬는데, 동네에 무서운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조심하래.”
“무서운 사람?”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나와 저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오는 길에 만난 것 같은데.”
바로 한태극네 세쌍둥이였다. 단이의 말에 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남청색의 더벅머리!”
남청색의 더벅머리라니……?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희미해졌다.
하지만 나는 단이와 단아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백정의 짓이었다는데?’
백정.
그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