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혼하면 남남이라더니(3)
저세상은 분명 장천의의 시선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잘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제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의도적으로 장천의가 보내는 눈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 망할 아저씨가 저세상한테서 눈을 떼지를 않는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아저씨! 리사 궁금한 게 있어요!”
착한 내가 직접 나서서 장천의의 시선을 돌릴 수밖에!
“아저씨가 아니라 삼촌이라고 불러 주면 무엇이든 답해 드리겠습니다, 리사 양.”
하하! 내가 그런다고 삼촌이라고 불러 줄 줄 알아?
“삼촌! 리사 엄마랑 아빠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가르쳐주세요!”
불러드립죠, 장천의 삼촌.
장천의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윤사해는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장천의의 주의를 나에게로 돌렸으니 말이다.
“부모님에 대해 뭐가 궁금하십니까, 리사 양?”
“두 분의 연애요!”
에일린 리.
윤씨네 삼남매의 어머니 되시는 분에 대한 관심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윤사해와의 러브 스토리는 궁금했다.
“쿨럭……!”
하지만 윤사해가 듣기에는 꽤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나 보다.
물을 마시고 있던 윤사해가 입가를 가리고는 연신 기침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아빠?”
윤사해가 쌍둥이의 걱정에 한 손을 들고선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하하, 괜히 미안해지네.
장천의는 윤사해가 보이는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래요, 리사 양. 부모님의 연애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거죠?”
“네!”
내가 대답하자마자 윤사해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경고를 보내듯이 말이다.
“장천의 회장.”
“저는 그저 리사 양께서 궁금하시는 걸 알려드리려고 하는 것뿐이랍니다, 고객님?”
그러니까 자신의 입을 막고 싶으면 내 입부터 막으란 소리였다.
하지만 윤사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얼굴 한 쪽을 감싸 쥐었다.
장천의는 윤사해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리사 양. 두 분께서 결혼하실 때 저는 막 CW를 이어받을 준비를…….”
장천의가 잠들기 직전의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조곤조곤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윤사해를 제외한 모두가 장천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고풍스러워 보이는 성당에 들어선 에일린 리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누가 내 욕이라도 하고 있나?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자신을 욕할 사람은 한국에 많았다. 윤사해라거나, 전남편이라거나, 이매망량의 길드장이라거나.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에일린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욕하라지.’
앞에서만 안 하면 된다.
이내 그녀는 십자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고선 다리를 꼬았다. 에일린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녕, 로저 신부. 어두침침하게 사는 건 여전하구나?”
에일린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성당 내부를 울렸다.
로저 에스테라.
바티칸 교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신부이자, 4대 길드 중 하나인 ‘가호(加護)’의 주인이기도 한 그가 에일린의 인사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자매님. 식사는 하고 오셨는지요?”
“응, 우리 자기랑 자주 갔던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혼밥하고 왔지.”
에일린이 능청스레 답해 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다고?”
“이미 알고서 오신 것 아닙니까? 제가 사전에 연락을…….”
“드렸지, 나한테. 그런데 혹시 모르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로저 에스테라가 말없이 미소를 그렸다.
에일린 리, 그녀는 가끔 이런 심술을 부리고는 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속을 긁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붙이며 떠보는 심술.
어쨌거나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로저 에스테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께 내려져 있는 거주자의 저주에 대해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아, 그랬지.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았네?”
에일린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몰라? 우리 자기께서 아주 철저하게 은폐했을 텐데.”
들리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로저 에스테라는 태연하게 답해 주었다.
“청 가문에 아는 분이 계셔서 말입니다. 그 분께서 말씀해 주셨답니다. 설마 에일린 씨께서 그 저주의 당사자일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아아, 청 가문.”
이해가 간다는 듯이 에일린은 그리 말했으나,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래서 로저 신부께서는 뭐가 궁금하실까?”
“저주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하답니다, 에일린 씨.”
흐음, 에일린이 비음을 내었다가 곧이어 방긋 웃었다.
“청 가문의 인간한테서 내게 내려진 저주에 대해 들었다면야,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겠네.”
하나 정확히 말하면, 그 저주는 자신에게 직접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대를 타고 물려받는 것이었지.
“내 선조께서는 10년이란 세월 동안 아이 하나를 괴롭혔다고 해. 청이 가장 아꼈다는 아이라지.”
“청께서는 제 자식이 괴롭힘 당하는 걸 보고만 있었답니까?”
“안타깝게도 위대하신 거주자께서는 제가 가장 아꼈던 아이를 잃어버렸다더라고.”
에일린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로저 신부께서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이 세상은 거주자들께서 신나게 싸움을 벌이시던 곳이었잖아?”
“…….”
“어쨌든, 청이 겨우 제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목숨을 끊은 뒤였다고 하지? 내 선조님의 괴롭힘에 의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덧붙여졌다. 에일린은 비웃음을 입가에 건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청은 분노하여 선조님을 죽이려고 들었대. 하지만 선조님께서 늘어놓으신 우스운 변명에 죽이기를 그만두고 대신 저주를 내리기로 한 거야. 핏줄을 타고 계속 내려가는 저주를.”
“그 저주란 건…….”
“가장 애정을 쏟아야할 상대가 생기는 순간, 그 마음을 잃게 되는 저주더라고.”
그런 상대가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몰랐을 거다.
제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저주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몰랐었으니.
“우리 선조님께서 청을 상대로 나불거린 변명이 ‘그 아이가 좋아서 괴롭혔던 것뿐이다’였거든.”
정말이지, 멍청하지 않아?
덧붙여 묻는 목소리에 로저 에스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일린도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거주자가 내린 저주치고는 가볍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윤리오와 윤리타.
이제는 얼굴마저 가물거리는 자신의 아이들. 분명 진심을 다해 사랑해 주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 그 마음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거다.
에일린은 제 자식들을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역한 기운과 불쾌감에 윤사해와 싸우기 일쑤였다.
‘왜 그렇게 싸웠더라?’
로저 에스테라에게 저주에 관해 이야기해 주던 에일린의 정신이 다른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형제님의 자녀분들께도 그 저주가 내려져 있겠군요.”
“응? 아아, 아니. 그건 아니야.”
바로 붙잡았지만 말이다.
에일린이 의문을 보내고 있는 로저 에스테라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 자기의 집안이 좀 대단한 집안이라서 말이야. 저주는 나의 대에서 끝났어.”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두고 진행했던 결혼이었다.
윤사해는 이매망량을 잇기 위해 제 피를 타고난 아이들이 필요했고, 에일린은 저주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때는 제게 무슨 저주가 내려져 있는지 몰랐으나 어쨌든 두려웠으므로. 그리고 윤사해는 말했었다.
‘걱정 마, 린. 너와 나의 사이에서 과연 아이가 태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에게 네 저주가 내려갈 일은 없을 거야. 너 역시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하자. 결혼이란 거.’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둘. 지금에서야 셋으로 늘어났지만, 그때는 둘이었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윤사해의 말대로 두 아이는 자신의 저주를 타고나지 않았다.
문제라면, 제게 걸려 있던 저주는 그 효과를 발휘하고 말았다는 거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그리고 두 아이의 어머니로는 가장 최악인 저주가 말이다.
아무튼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일.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인데, 궁금한 거라도 있어?”
로저 에스테라가 그녀에게 질문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거주자의 후손을 괴롭힌 대상이 특정할 수 없는 사회라면, 거주자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응?”
“제 후손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상에 저주를 내릴까요, 아니면 조용히 분노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매님?”
“글쎄.”
에일린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로저 신부,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들려준 이야기대로 재미난 일을 꾸민다면 뭐가 됐든 10년이란 세월이 걸릴 거야.”
“그건 모르지요. 그러나 설사 10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사람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요.”
로저 에스테라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기어 다니는 것만 할 줄 알던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옹알이를 하던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을 내뱉고.”
이내 붉은 눈이 휘게 접혔다.
“얼마나 기다리기 즐거운 시간이겠습니까, 자매님?”
묻는 목소리에 에일린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바티칸 출장이 잡히면 교황과 좀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댁이 아끼는 신부께서 정신이 나가신 것 같다고.”
“하하, 친애하는 교황 성하께서는 제 편을 들어주실 겁니다.”
“어련하시겠어.”
에일린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저 에스테라가 뒤따라 서자 에일린은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배웅은 필요 없어. 앉아서 그 잘난 머리나 열심히 굴리고 있으라고.”
“배려에 감사합니다, 자매님.”
그렇게 에일린이 성당을 나왔을 때였다.
“에일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잘못 들었나, 착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목소리였다.
“자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간을 좁히는 익숙한 얼굴에 에일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윤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