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이혼하면 남남이라더니(2)
한없이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윤사해의 뒤로 몸을 숨겼다.
꼼지락거리는 나의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윤사해가 내 어깨를 감싸고는 에일린에게 말했다.
“그만하지.”
“시작한 것도 없는데 뭘 그만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에일린이 능글맞게 웃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우리 따님만 온 거야?”
“리오랑 리타는…….”
“아드님들 행방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고, 혼외 자식 한 명 들였다며?”
윤사해가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혼외 자식이 아니라 후견으로 데리고 있는 아이다.”
“그래? 하도 애지중지하게 키우고 있다 해서 난 또 밖에서 난 애인 줄 알았지.”
“에일린.”
나지막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그 입 좀 함부로 열지 말라, 그리 경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일린은 윤사해의 경고를 알아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짝 짜증이 어린 얼굴로 입술을 씰룩였다.
“아니면 됐어. 김샜네.”
그러고는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버리는데…….
잠깐만요! 엄마, 우리의 재회는 이렇게 끝인 건가요?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윤사해는 꽤 익숙한 모양인지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에일린.”
“또, 뭐.”
“한국에는 무슨 일로 들어온 거지? 휴양 차 들어왔다니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워 줬으면 하는데.”
낮게 내리깐 목소리 위로 에일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까르르, 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휴양 차 들어왔어, 자기야. 오랜만에 고국 땅이 그리워져서. 그럼, 이만. 우리 따님 잘 들어가렴? 언젠가 또 보자.”
에일린은 그렇게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남겨 두고 공항을 나가버렸다. 뭐 저런 엄마가 다 있나 싶었다.
“미안하구나, 리사. 네 엄마 성격이 좀…….”
“지랄, 아니. 독특하신 것 같아!”
휴우, 하마터면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칠 뻔했다.
윤사해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빠가 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야?!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고는 윤사해를 꼭 끌어안았다.
“리사는 엄마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빠만 있어도 돼!”
윤사해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다.
윤사해는 그대로 나를 안아들고선 내게 물었다.
“리오와 리타가 세상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갔다는구나. 그쪽으로 갈까?”
말해 뭐해!
“응!”
나는 활짝 웃었다.
***
윤리오와 윤리타가 저세상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간 장소는 CW백화점이었다.
“아버지!”
“아빠!”
윤리오와 윤리타가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들이를 빙자한 플렉스를 즐긴 것 같은데?
저세상은 어디 있나 했더니, 장천의와 함께 있었다.
어쩌다 그와 손을 잡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세상은 표정은 썩어 들어가다 못해 아주 문드러져 있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세상이 오빠!”
착한 나는 우리 주인공님을 구출해주기로 했다.
우다다, 저세상에게 달려간 나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저세상이 질겁하면서 미쳤냐는 시선을 내게 보냈지만…….
“리사가 지금 구해 주는 거야, 세상이 오빠. 눈 예쁘게 뜨면서 어서 반가운 척 좀 해 봐.”
귓가에 대고 속닥거리자 저세상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윤리사! 아저씨랑 잘 다녀왔어?”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곧장 표정을 갈무리했다.
“리사 양, 저는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
“아저씨 누구세요?”
“……!”
장천의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윤사해의 그림자 안으로 쇼핑백을 집어넣고 있던 윤리오가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삼촌, 리사가 장난치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첫째 오라버니께서는 친절하기도 하시지.
“그런 겁니까, 리사 양?”
“리사는 정말 모르겠는데! 그치, 세상이 오빠?”
나는 장천의를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저세상과 함께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그러기 무섭게 저세상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어?”
“뭐가?”
“엄마 만나고 왔잖아. 리오 형이랑 리타 형이 너는 태어나고 한 번도 엄마를 본 적 없다고 하던데.”
하긴 그래서 내가 윤사해와 함께 공항으로 에일린 리를 마중나간 거였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싸가지 없었어.”
“뭐?”
“지랄 맞았고.”
저세상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윤리사, 너 그거 패륜이야.”
“하지만 리사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 세상이 오빠도 우리 엄마가 말하는 거 들으면 리사랑 똑같이 생각할 거야.”
에일린 리에 대한 나의 간단한 소감에 저세상이 눈가를 찡그렸다.
“네 성격은 어머니 쪽을 물려받은 거였나 보네.”
이 자식이?
나는 저세상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저세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세상아? 갑자기 왜 그래?”
“아무… 크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다리에 쥐가 나서…….”
걷어차인 곳이 꽤 아픈지, 저세상이 연신 다리를 주물럭거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저세상을 향해 날름 혀를 내밀어 주고는 윤사해에게 달려갔다.
윤사해가 나를 안아 들고는 입을 열었다.
“리오, 리타. 쇼핑은 다 했니? 세상이도 살 거 다 샀고? 그만 돌아갔으면 하는구나.”
그 말에 저세상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장천의와의 자리가 얼마나 불편했으면 저러나 싶었다.
“에이, 고객님! 오신지 얼마 안 되셨으면서?! 이왕 만난 거 저랑 이야기도 좀 나누고 리사 양 옷도 사고 그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절하겠네. 그리고 리사의 옷은 애들이 이미 샀더군.”
윤사해는 장천의가 어떤 제안을 해도 거절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아직 CW백화점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오? 리타?”
“저… 아버지…….”
윤리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번에 CW백화점에 신규 브랜드점이 입점했는데, 3시에 오픈 행사가 열려요.”
그 뒤를 이어 윤리타가 말했다.
“오픈 행사에 브랜드 오픈 30주년 기념 한정판 티셔츠를 판매한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있으면 안 될까요, 아빠? 네?”
윤사해는 난처하다는 듯이 두 아들을 보았다.
그때 장천의가 윤사해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는 이야기를 꺼냈다.
“고객님, 참고로 그 브랜드점.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곳이랍니다. 해외 직구로 몇 벌 사 입으시는 것 같더군요.”
뭐야, 그랬어?
그런데 장천의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래?
윤사해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장천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장천의가 방긋 웃었다.
“리오 군과 리타 군께서 저한테 해외 직구하는 법을 물어보시고는 했거든요.”
그러면서 장천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고객님께서 집보다 바깥을 더 좋아하실 때 말입니다.”
“…….”
윤사해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보였다.
과거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네.
***
윤사해는 결국 아들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천의와 함께 저녁까지 가지게 됐다.
참고로 돌아가자는 소리에 반짝반짝 빛을 내던 저세상의 두 눈은 지금 동태 눈깔이다.
한가득 가려진 상에 장천의가 싱글벙글 웃었다.
“저녁 한 번 대접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이제야 지키게 됐네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당연하죠, 고객님! 저 기억력 좋은 거 아시면서!”
“흐음.”
장천의의 기억력이 좋은 건 사실이었던 모양인지, 윤사해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에일린 씨와는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내 몫의 스테이크를 잘라 주던 윤사해가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가? 애들이 말해 준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다 아는 수가 있지요.”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얄미웠다.
“뭐, 표정을 보아하니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재작년 국제 각성자 컨소시엄 파티에서 만나셨던 것보다는 나으셨나 보군요.”
“아아, 그거! 저 기억나요!”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깔끔하게 비우고 있던 윤리타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랑 엄마 때문에 파티장의 절반이 박살났다면서 뉴스에서 엄청 떠들어댔었어요!”
윤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서 비서님께서 수습하시느라 엄청 고생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이쯤 되니 도대체 윤리사가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윤사해에게는 부끄러웠던 기억인지, 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그에 장천의가 키득거리면서 윤사해에게 물었다.
“에일린 씨가 한국에 왜 들어왔는지는 들으셨습니까?”
“휴양 목적이라고 하더군.”
“거짓말이신 거 당연히 아시겠지요, 고객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장천의 회장께서 에일린이 한국에 들어온 이유를 아시는 것 같은데.”
장천의가 정답이라는 듯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로저 에스테라를 만나러 온 것 같더군요.”
“뭐?”
장천의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이름에 윤사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광신도를 왜.”
“저야 모르지요.”
장천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 정도로 잘난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장천의의 시선은,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저세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