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다시 인사드립니다, 최애님(2)
당장에라도 최애님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우리 어르신은 분명 놀랄 터. 최애님을 놀라게 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나는 윤사해의 손을 잡고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그때 불현듯이 저세상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AMO에 가는 게 그렇게나 좋아, 윤리사?’
윤사해와 함께 집을 나서기 전, 저세상은 나를 붙잡고선 그렇게 물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AMO라는 집단에 크게 호감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 최애님께서 본부장으로 있으신 곳!
설령, 내가 AMO를 싫어했었어도 최애님을 위해 좋다고 말했을 거다.
AMO에 가면 최애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두근거림에 잔뜩 설레어하고 있었는데 저세상이 나지막하게 속삭였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윤리사. 나중에 실망하기 싫으면.’
경고성 짙은 목소리. 하지만 내용은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었다.
『각성, 그 후』에서 AMO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주인공께서 저런 말씀을 하니 우습기도 했고.
하지만 윤사해가 걸음을 재촉하는 통에, 나는 저세상에게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못하고 AMO로 향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
“바로 돌아가려고? 잠깐 이야기라도 나누고 가지 그러니, 사해야.”
최애님께서 다가오고 계신다.
저세상의 경고는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최애님의 말에 차애님께서 고개를 숙이셨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정해진 일정이…….”
“없잖아.”
윤사해가 움찔, 몸을 떨고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윤사해의 손을 꼭 잡고는 올망졸망 두 눈을 떴다.
“아빠, 리사랑 약속했잖아. 각성자 등록 끝내고 AMO 구경하기로.”
그런데 지금, 리사랑 한 약속을 깨 버리겠다는 거야? 응? 그런 거야?
윤사해가 설마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는 듯한 얼굴을 보였다.
아빠, 리사는 똑똑해. 특히 최애님과 차애님 관련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그런 약속을 했었구나. 리사, AMO에 관심이 있니?”
“네!”
정확히는 본부장님, 당신한테요!
나는 치미는 말을 삼키고는 최애님을 바라보았다. 최애님께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AMO가 머지않아 인재를 품게 되겠구나.”
크흡, 최애님. 죄송하지만 AMO에는 가지 않을 거랍니다.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의 공무원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최애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지만!
그렇지만 이매망량의 명패가 너무 눈에 들어오네요…….
괜히 속상해져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데 최애님께서 윤사해를 놀리듯이 그에게 물었다.
“윤사해 길드장, 딸아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맞아, 아빠. 리사와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인 건 아니지?
윤사해가 내 눈초리에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들어올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딸아이에게 AMO를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는 걸으면서 하지요.”
“그럼, 내 뭔들 못할까?”
우리 최애님께서 좋다는 듯이 활짝 웃으셨다.
나이스, 아빠!
***
“본부장님, 저기는 어디에요?”
“훈련실이란다. 현장 뛰는 친구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지.”
“우와.”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만.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애님께서 직접 AMO를 안내해 주고 계신다. 방청객보다 더한 리액션을 보여 드려야했다.
“그럼, 저기는요? 저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우리한테 붙잡힌 지하 길드의 녀석들을 심문하는 곳이란다.”
“심문이요……?”
“으음, 리사한테는 좀 어려운 말이었겠구나.”
아니요, 알아듣기는 했는데요.
“쉽게 말해서, 못된 사람들을 아프게 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곳이란다. 리사와는 절대로 인연이 없을 곳이지.”
왜 고문실이 볕 잘 드는 복도 한 가운데에 있는 거죠? 저런 건 보통 지하에 마련되어 있지 않나요?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강산에 본부장님,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는 들려주지 마십시오.”
윤사해는 고문실의 위치가 아닌, 엉뚱한 것을 지적했고.
“하지만 자네 딸아이가 먼저 물어보았는걸? 아이의 질문에는 뭐든 답해 주는 게 어른의 도리이지 않니, 사해야.”
AMO의 책임자이신 우리 최애님께서는 그 지적에 억울하다는 듯이 그리 말했다.
그에 윤사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얼떨결에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된 유예준 부장은 그런 윤사해한테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자, 리사. 우리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네 아빠가 네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좋은 이야기만 들려줬으면 하나 보구나.”
이해해 주세요, 본부장님.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요. 아빠가 과보호를 좀 하셔요.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예요.
나는 쏟아져 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최애님의 안내에 따라 본관에서 별관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세상이는 같이 안 왔구나?”
최애님의 입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세상이는 왜 찾으십니까?”
“리사랑 언제나 함께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아서 찾은 것뿐이란다.”
최애님, 누가 들으면 제가 저세상과 영혼의 단짝인 줄 알겠어요.
윤사해는 최애님께서 저세상을 찾은 게 탐탁지 않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본부장님.”
목소리의 주인은 태지인이었다.
강산에를 찾고자 AMO의 곳곳을 뛰어다니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는 잔뜩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태지인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강산에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워낙에 작은 목소리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궁금한데.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강산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것 참 곤란하게 됐구나.”
꽤 심각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올 소리는 하나.
“리사, 미안하지만 AMO 소개는 여기서 그만해야할 것 같구나.”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곤란하게 됐다는,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 예상한 수순이었기는 했지만 아쉬웠다.
하지만 머리에 닿은 최애님의 손길에 아쉬움은 금방 사라졌다.
“다음에 또 방문해 주렴, 리사. 그때는 내 AMO의 모든 곳을 소개해 주마.”
더욱이 나와 친히 약속까지 해 주시다니! 나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네, 본부장님!”
최애님께서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내게 보여 주고는 윤사해에게 말했다.
“각성자 등록증은 다음 주 내로 받아 볼 수 있을 거란다. 예준아, 시간 맞춰 준비해 줄 수 있지?”
“네……?”
유예준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지금 자신이 뭘 들었는가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각성, 그 후』에서 그랬지. 각성자 등록증은 원래 한 달의 시간에 걸쳐 나오는 거라고.
그걸 저세상은 일주일 만에 받았었다. 나와 똑같이, 최애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이루어졌던 일.
그때, 유예준이 어떻게 했더라?
“네… 본부장님…….”
그래, 상관이 까라면 까야 한다면서 허탈해했지. 유예준의 눈 밑이 순식간에 퀭해진 것 같다.
으음, 내 착각이겠지?
***
강산에는 윤씨네 부녀(父女)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본부장실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지인 부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게.”
“네, 본부장님.”
마음만 먹으면 AMO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인이 저를 찾아왔단다.
‘찾아올 줄은 알았지마는.’
강산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후욱,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저를 반긴다. 볕이 들어오고 있어야 할 창밖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제 업무 테이블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있는 객은 잘만 보였다.
강산에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그녀를 찾아온 손님이 인사를 보냈다.
“오랜만.”
나른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성별을 쉬이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생김새 역시 그러했다.
햇빛이라고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듯한 희고 창백한 피부.
날렵한 턱선이 인상적이었으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천 때문에 뚜렷하게 그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량처럼 입은 두루마기 사이로 가슴이 드러났으나, 이 역시 하얀 천으로 답답하게 가려져 있었다.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은 어떻고. 붉은 빛이 살짝 도는 것이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여러모로 수상쩍었으나 강산에는 태연한 얼굴로 상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내가 너를 찾아오는 이유야 뻔하지 않니.”
강산에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녀의 손님은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는 말을 이었다.
“선물도 없이 찾아온 건 아니란다. 우리 쪽에도 너의 아이들 몇이 잡혀 있지. 백정, 그 아이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더구나.”
강산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직 죽이지는 않았단다. 거래를 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서.”
강산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AMO의 본부장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진작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객은 유랑단의 수장. 모든 지하 길드의 정점에 올라 있는 위인이었다.
그런 수장께서 ‘거래’를 운운하며 저를 직접 찾아오신 이유야 뻔했다.
AMO에 수감 중인, 중.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인 그를 원하는 거겠지.
또한 강산에는 알았다. 자신은 이번에도 눈앞의 상대와 거래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러나 강산에는 구태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로잡히는 과정에서 정신에 큰 타격을 입었어. 데리고 가 봤자 당신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유랑단의 수장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강산에의 앞에 선 그가 미소를 그렸다.
“네 스승의 후손들을 만나고 온 모양이지? 냄새가 뱄구나.”
강산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에 유려한 선을 가진 유랑단의 수장이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걱정 마렴. 나는 네 스승의 후손들을 해칠 마음이 없단다.”
강산에가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아래에 있는 탈쟁이 녀석들도 그래 줬으면 좋을 텐데.”
“주의는 매번 주고 있단다.”
강산에보다 머리 한 뼘은 더 큰 유랑단의 수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망가진 나의 탈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닿는 목소리에 강산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닫힌 문을 열었다.
드러난 공간은 태지인이 기다리고 있는 복도가 아닌, 지하.
유랑단의 수장께서 찾으시는 ‘중’이 수감된, AMO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