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영원한 거짓말은 없다(2)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지!
뭐라 변명을 하고 싶은데, 몸이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인지 검은 두 눈을 데굴 굴리고 있기만 했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사해야.”
“백시준.”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지만, 자리를 좀 비켜 줘야할 것 같네.”
구원은 개뿔.
안 돼요, 아저씨! 가지 마요!
마음 같아서는 두 손을 뻗어 백시준을 붙잡고 싶었다.
“리사, 세상아. 다음에 보자꾸나.”
백시준은 그렇게 우리에게 인사하고는 도윤이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도윤이가 백시준을 향해 엄마에게 줄 꽃이 망가졌다느니, 그런 우는 소리를 해서 다시 걸음을 돌릴 줄 알았지만…….
“엄마는 도윤이 얼굴만 봐도 좋아할걸? 그래도 엄마에게 줄 꽃이 사고 싶으면, 내일 엄마 보러 가는 길에 사자, 도윤아. 알겠지?”
어림도 없었다.
이내 백씨네 부자(父子)가 모습을 감췄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윤사해를 흘긋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윤사해는 아무 말 없이 나와 저세상을 빤히 보기만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영겁 같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나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아… 아빠…….”
하지만 제대로 말을 붙이기도 전에 머리 위로 무언가가 얹어졌다.
윤사해의 두루마기 코트였다.
그제야 내 몸이 물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사해는 그대로 나와 저세상을 안아 들었다.
“돌아가자꾸나.”
나와 저세상은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기로 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윤사해는 묵묵히 걸어갔고, 나와 저세상은 두 눈을 데굴 굴리며 그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폈다.
우리 사이에 깔린 고요가 깨진 것은 집에 도착한 후였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아빠! 오늘 일찍 들어오셨네요?”
윤리오와 윤리타가 거실 안쪽에서 뛰쳐나와 윤사해에게 인사했다.
웬일로 집에 있나 했더니, 오늘은 둘의 실습이 끝난 날이었다.
윤사해가 아들들의 인사에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교에 실습 보고서 제출은 잘하고 왔니?”
“네! 그런데…….”
윤리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얘들아, 왜 그렇게 젖었어?!”
윤리타는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대형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안 추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빠, 얘들 왜 이래요?”
윤사해가 품에서 우리를 내려주고는 말했다.
“소나기가 잠깐 내렸단다.”
“소나기요?”
윤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나기가 내렸다고 하기에는 윤사해는 젖은 구석이라고는 없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의 의문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윤사해는 별다른 설명 없이 입을 열었다.
“애들 좀 맡기마.”
“네? 네, 아버지.”
윤리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윤리타는 대형 수건을 나와 저세상의 몸에 둘러 주며 말했다.
“들어가서 쉬세요, 아빠.”
“그래.”
윤사해는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닫힌 방문에 윤리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아버지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리사, 세상아. 아빠랑 같이 오면서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그것도 아주 큰 일이.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쭈볏거리는 사이, 저세상이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고는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우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우리 오라버니들, 쓸데없이 눈치가 좋아서는!
여기서 더 캐물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리타. 일단, 애들부터 씻기자.”
그 말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리사는 혼자서 씻을 수 있어!”
“저도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윤리오가 피식 웃고는 나를 먼저 욕실로 밀어 넣었다.
나는 문이 닫히기 전, 굳게 닫혀 있는 윤사해의 방문을 흘긋거렸다.
윤사해는 분명 내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거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후우.”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
윤사해는 저녁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윤리오가 차린 저녁을 거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식사 자리에서 윤사해의 모습은 평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리사, 골고루 먹어야지.”
“네에.”
윤사해가 내가 골라내고 있던 나물을 다시 밥숟갈 위에 얹어 주었다.
“세상이도 편식은 하면 안 되지.”
“펴, 편식 안 했어요! 조금 이따가 먹으려고 했는데…….”
저세상이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을 시전했다. 그에 윤사해가 웃음을 짓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먼저 일어나마. 맛있게들 먹으렴.”
그러고는 윤리오나 윤리타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리타가 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윤리오, 아무래도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
“응.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기는 하셨지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더라.”
그런 걸 보고 있었다니!
쌍둥이의 눈치는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싶었다. 아니면 상대가 윤사해라서 그런가?
그렇게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저세상이 밥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답지 않게 박력 넘치는 인사였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당황한 얼굴로 저세상을 쳐다봤다.
우리 주인공께서는 물 한 잔을 비우고는 윤사해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 뒷모습이 꽤 결연해 보였다.
낮에 있었던 일로 윤사해와 대화를 해 보려는 모양이지.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그때 윤리타가 내게 물었다.
“윤리사, 아빠랑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아빠가 내가 각성자인 것을 알아차리신 것 같아.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걸 쌍둥이에게 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으움.”
답을 얼버무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윤리오가 미소를 지었다.
“리사,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하면 되는 일이야.”
잘못한 일이라…….
저세상은 윤사해의 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나는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밥을 한 숟갈 크게 떴다.
***
“무슨 일이니, 세상아?”
윤사해가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저세상에게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세상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윤사해의 기분을 읽었다.
‘내가 많이 불편하신가 보네.’
정확히는 자신이 꺼낼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 걸 거다. 그렇다고 해도 말해야 한다.
저세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목소리를 내었다.
“윤리사는 일부러 아저씨를 속이고 있던 게 아니에요.”
윤사해의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저세상은 윤사해가 보여 주고 있는 동요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걔는 아저씨를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무, 물론! 리오 형이나 리타 형도 윤리사한테는 소중하지만요!”
거기에 자신은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됐다.
저세상의 말에 윤사해는 황망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세상아, 너는…….”
리사가 각성자인 것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그리 물으려던 윤사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할미의 숲.’
제 딸아이가 눈앞의 아이와 처음 만났던 곳.
그곳에서 이 아이는 자신의 딸아이가 각성자인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때는 하나뿐인 딸아이가 제 품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이는 그 빌어먹을 숲에서 자그만 몸으로 싸웠던 거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이름 모를 신들에게 수없이 감사 인사를 보냈었지.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하여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아저씨…….”
저세상이 목소리의 끝을 흐리며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아빠! 리사랑 얘기 좀 해!”
***
음,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우중충해?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가지 마! 나랑 같이 있어 줘, 세상이 오빠! 나를 아빠와 단 둘이 남겨 두지 말라고!
하지만 저세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윤사해의 방을 나가 버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망할 주인공 같으니라고! 그렇지만 이미 나간 사람을 다시 데리고 들어올 수는 없지.
“그래, 리사. 아빠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니?”
그렇기에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말없이 윤사해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빠, AMO에서 각성자 증명하는 거 많이 아파?”
“…….”
돌아오는 답이 없어 고개를 드니, 윤사해가 애틋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뺨에 닿았다.
“아니, 아픈 건 하나도 없단다.”
그렇게 말하는 윤사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내 뺨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리사를 아프게 하면 아빠가 혼내 줄게.”
“누구를?”
“다.”
윤사해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내 머리칼에 얼굴을 비볐다.
“우리 리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 모두 다.”
나는 윤사해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나에게 별 다른 것을 묻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기다려 주는 거겠지. 내가 어쩌다 각성자가 되었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스스로 밝히기를.
하지만 윤사해에게 내 모든 것을 알려 줄 날은 오지 않을 거다.
나는 언제까지고 ‘윤리사’여야만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