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꿈은 달콤하다(9)
기껏 류화홍의 병문안을 온 그의 두 친구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류화홍과 할 말이 있는데 우리가 있어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윤리오가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치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응? 벌써 가, 리오야?”
그 눈치가 류화홍에게는 없었다. 류화홍이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윤리오를 붙잡았다.
“오늘 사야 님 쉬면서 너랑 리타도 휴가잖아. 해진이도 태운 님이 휴가 줬다고 했고! 할 일도 없는데 더 있다가 가!”
“아니에요, 형.”
윤리오가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윤리타와 청해진에게 일어나라며 소리 없이 눈짓했다.
윤리타도 저세상을 챙겨 안았고, 청해진은 청해솔과 인사를 나눴다.
어떻게 붙잡아도 갈 모양새에 류화홍이 시무룩한 얼굴을 보였다. 친구들도 있는데 왜 저런지 모르겠다.
그렇게 병실을 나가는데, 윤리오가 문을 닫기 전 걸음을 멈췄다.
“아참, 화홍이 형. 아버지가 저녁에 찾아올 거라고 했어요.”
“헉, 길드장님께 굳이 올 필요 없다고 전해 줄래?”
“거절할게요.”
윤리오가 방긋 웃고는 병실 문을 닫았다. 류화홍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뭐, 힘내라! 직장인!
류화홍을 소리 없이 응원해 주는데, 청해진이 윤리오에게 물었다.
“윤리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화홍이 형 우리랑 더 놀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급한 일은 없고. 너희 누나랑 화백이 형이 화홍이 형이랑 따로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청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리타가 그런 친구를 놀렸다.
“청해진, 너는 아는 게 뭐야?”
“뭐? 그러는 윤리타, 너는 우리 누나랑 화백이 형이 화홍이 형이랑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거 알았냐?!”
“아악!”
청해진이 윤리타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청해진, 여기 병원이야. 장난치려면 밖에 나가서 장난쳐.”
윤리오의 말에 곧장 윤리타를 풀어줬지만 말이다.
그렇게 병원 로비를 지나는 순간.
“나 화장실 좀.”
윤리타가 이탈했고.
“헉, 나 휴대폰 두고 왔어! 나는 화홍이 형 병실에 잠깐 다녀올게!”
“윤리타 나오면 바로 가 버릴 거야.”
“아, 좀! 매정하게 그러지 좀 마!”
청해진이 다시 류화홍의 병실로 급하게 올라갔다.
윤리오는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다가 탄식했다.
“아…….”
자신도 류화홍의 병실에서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윤리오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난처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저세상의 손을 꼭 잡고는 입을 열었다.
“리오 오빠, 세상이 오빠랑 손 꼭 잡고 여기서 리타 오빠 기다리고 있을게!”
잡은 손에 질색하는 얼굴을 보이던 저세상도 윤리오에게 말했다.
“맞아요, 형. 저랑 윤리사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저세상까지 그렇게 말하자, 윤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얘들아. 모르는 사람 따라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윤리타 금방 나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응!”
“네!”
나와 저세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리오는 우리의 고갯짓에도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남긴 후, 류화홍의 병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저세상이 내 손을 내팽개쳤다.
저 망할 주인공님이?!
두 눈을 부릅뜨고 저세상을 노려보는데, 그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벽에 기대었다.
“화홍이 형 금방 퇴원하겠지?”
그러고는 태연하게 묻는데, 얼마나 얄밉던지. 하지만 착한 나는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다음 주면 퇴원한대.”
중이 노린 건 사야였으나, 다친 건 류화홍이었다. 그가 사야를 지키고자, 중과 싸우려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게, 왜 중한테 대들어서.”
작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저세상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너도 똑같잖아.”
“내가 뭘?”
저세상이 진심으로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가 그날 밤, 막아섰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일주일 전, 이매와 대면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걸 거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세상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렇게 계속 겁도 없이 굴었다가는 언젠가 크게 다칠 거야, 윤리사. 네가 다치든, 네 주변 사람이 다치든! 화를 입을 거라고!”
“……아주 악담을 하지 그래?”
그보다 일주일도 지난 이야기를 이제 와서 왜 꺼내는 거람?
저세상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매와의 일을 지금까지 줄곧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듯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고, 불만인지.
제대로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하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윤리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리사, 세상아? 청해진이랑 윤리오는 어디 가고 너희만 있어?”
“병실에 두고 온 게 있대요.”
“그런데 너희 분위기가 왜 그래? 싸웠어? 아니지?”
“네, 아니에요. 리타 형.”
저세상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꼭 끌어 잡았다.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맞아! 우리가 싸우기는 왜 싸워, 리타 오빠!”
윤리타가 걱정하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았기에.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저세상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계속 겁도 없이 굴었다가는 언젠가 크게 다칠 거야, 윤리사. 네가 다치든, 네 주변 사람이 다치든! 화를 입을 거라고!’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단순히 내가 걱정돼서?
“그럴 리가 없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세상은 내가 각성자임을 알고 있을 거다. 어쩌면, 각성자보다 더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걱정돼서는 개뿔, ‘내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다가 윤사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까 걱정돼서 그런 것이다’에 한 표다.
하지만 나는 언제고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설 거다.
『각성, 그 후』에서처럼,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내가 각성자인 것을 이제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네.”
근 일주일 동안, 윤사해는 중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집에 잘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
윤사해는 다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침이고 저녁이고 집에 돌아오게 될 거다.
즉, 하루에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될 거라는 말씀이었다.
윤사해는 어떻게 나올까?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려나? 아니면 숨기는 것 없이 말해 달라고 닦달하려나?
혹은 단이가 앓았던 불치병을 의심할 수도 있다. ‘이상 각성자’라면서 말이지. 병원에 가기는 싫은데…….
그렇지만 나는 이내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윤사해라면 기다릴 거다.
내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됐다면 진작 온갖 난리를 떨며 병원에 데리고 가겠지.
하지만 그라면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묵묵하게 나를 기다려 줄 거다.
내가 『각성, 그 후』를 얼마나 읽었는데! 우리 차애님 성격을 모를까 봐?
“아빠한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AMO를 방문하게 되겠네. 모든 각성자는 AMO를 통해 정식적으로 증명을 받아야 하니까.
이를 받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하 길드의 인간들뿐, 윤사해는 내가 각성자임을 숨기고 싶어 하겠지만 그건 범죄다.
“AMO에 가면 우리 최애님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러면 좋겠다.”
윤리사가 된 지 1년이 넘었는데, 얼굴 한 번 못 봤단 말이야. 미디어로는 많이 접했지만 그건 본 게 아니야!
이러한 그리움이 꽤 사무쳤는지, 참으로 오랜만에 꾼 꿈에 최애님이 나오셨다.
아빠 손을 잡고 간 AMO에서 최애님이 직접 나를 마중 나오는 꿈이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영영 깨지 말았으면 했다.
“윤리사! 일어나! 학교 가야지!”
망할 윤리타 때문에 깨 버렸지만.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나서는 윤리타를 향해 달려갔다.
“리타 오빠, 바보!”
“악! 뭐야, 왜 때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윤리타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몰라도 돼!”
최애님과의 달콤한 순간을 방해한 벌이다, 윤리타!
***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거짓말 같게도 꿈은 현실이 됐다.
지난밤에 꿨던 꿈 그대로 실현이 된 건 아니었다.
나는 아빠 손을 잡고 AMO에 간 게 아니라, 저세상과 함께 등교한 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옆에 도윤이를 끼고서 말이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서기 전에 꿈에 그리던 내 님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아주 운명처럼.
“네가 리사구나. 윤사해의 길드장의 하나뿐인 딸아이. 그리고 네가 세상이고. 옆의 친구는 도윤이지? 백시준 팀장의 아들.”
“우와! 우리 아빠 아세요?”
도윤이가 놀라 물었다.
“알고말고.”
내 님께서 눈웃음을 짓는다.
옆에서 저세상이 머뭇거리다가 내 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넋이 반쯤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같으신 최애님께서는 저세상의 인사에 미소를 그려 주고는 귀한 무릎을 굽히셨다.
“안녕, 아가. 내 이름은 강산에라고 한단다.”
바로, 내게 인사하기 위해서.
암요, 알고말고요. 제가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나는 두 손을 들어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지난밤, 달콤하게 꿨던 꿈이 생각지도 않게 실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