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꿈은 달콤하다(8)
“헉, 허억……!”
중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린 이슬에 축축하게 젖어 있던 잎사귀들이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건, 불 꺼진 건물들뿐.
중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왔다…! 벗어났어……!”
귀수산을 빠져나오는 것을 성공했다. 자신을 도와준 여자의 정체가 수상쩍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다행인 일.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신하기에 좋은 장소인 건 분명했다.
“주변에 유랑단으로 향하는 길이 있을지…… 아니, 우선 선비 녀석에게 연락을 취해 볼까?”
윤사해를 피해 혼비백산으로 달아나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중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더니. 내가 지금 딱 그 꼴이군.”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호오, 웬 땡중께서 찾아오셨군요.”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이 보였다.
그 불빛에 드러난 얼굴에 중은 당황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로저 에스테라……?”
“안녕하십니까, 중?”
길드, 가호(加護)의 길드장.
교황의 사랑을 받는다는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중에게 목소리를 건네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차라도 드시죠.”
권유가 아닌, 강요였다.
동시에 로저 에스테라의 뒤로 수십 개의 호롱불이 떠올랐다. 이내 그 불빛에 한 인영이 드러났다.
해골.
거대한 해골이 로저 에스테라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앙상한 뼈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중은 주춤거렸다.
***
“그래서 우리 고모, 지금 히스테릭 장난 아니야. 다 잡은 땡중 새끼를 로저 신부님께 뺏겼다고 아주 난리를 부리고 계시지.”
아래아의 길드장, 최설윤의 유일한 가족인 그녀의 조카.
최화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해솔, 내 이야기 듣고 있어?”
“응, 아아. 듣고 있었어. 그래도 어떻게 잡기는 했네?”
“로저 신부님 말씀으로는, 그 자식 자신의 스킬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대. 못한 것 같다던데.”
청해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명성에 비해 꽤 쉽게 잡혔다더니. 류화홍을 그렇게 만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대?”
최화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모르지. 중을 마지막으로 맞닥뜨린 윤사해 길드장님께서 아무 말이 없으시거든. 그보다 류화홍 병문안 선물 뭐로 할까?”
“아무거나 해. 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잖아.”
지금 둘은 류화홍이 입원해있는 병원 지하의 편의점에 들른 참이었다.
최화백은 음료 세트가 나열된 진열된 앞에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홍삼 음료 세트를 골랐다.
그때 나긋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홍삼 말고 다른 걸 해 주시지 않겠어요? 도련님들께서 홍삼 음료를 사 오셔서요.”
사야였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최화백이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꾸벅였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화백 군. 그리고 해솔 양.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화홍이랑 같이 중 녀석한테 험한 일을 당하셨다더니, 사야 님은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화홍이가 저를 지켜 줬답니다.”
“류화홍, 그 녀석이요?”
최화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야는 그저 눈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최화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사야에게 류화홍과 있었던 일을 묻고자 했지만.
〖사야, 거기서 뭐해? 필요한 거 다 샀으면 빨리 들고 와.〗
“네, 아버지. 그럼, 이만.”
사야에게는 동행인이 있었다.
최화백이 사야와 함께 편의점을 나가는 남자를 보고는 놀라 말했다.
“아버지? 저렇게나 젊은데?”
“바보야, 사야 님이 거주자와 혼혈 분이신 거 잊었어? 그것도 직계 후손이잖아.”
하지만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청해솔은 곧장 관심을 거두고서 말했다.
“어서 류화홍 병문안 선물이나 사.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최화백은 멀어지는 사야와 그녀의 친부(親父)에게서 쉽사리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그 시간, 사야와 함께 편의점을 나선 랑야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녀석들, 류화홍의 친구들이지? 내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주 잘도 떠드는군.〗
“아버지, 아이들 하는 말에 뭘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다정하게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에 랑야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는 괜히 편의점을 한 번 쳐다보고는 사야가 산 것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건 왜 산 거냐? 소시지 싫어하지 않냐, 사야?〗
“강호가 좋아하는 거거든요.”
랑야가 눈가를 찡그렸다.
〖네가 좋아하는 걸 사라니까.〗
사야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다, 제 아버지와의 사이가 이렇게 진척되었는지를.
***
중에 이어 이번에는 도깨비.
그에 의해 공간에 또 갇히고 말았다.
사야는 사방이 온통 백색의 벽으로 가로막힌 곳에서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태랑! 이 망할 자식아!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 문 열어!〗
자신의 아버지는 바깥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깥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야가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서로 속마음 털어놓고 화해하지 않으면 못나오는 방]
허공에 푸르게 문구가 쓰였다.
사야가 그것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고, 랑야 역시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가면 죽여 버리겠어! 태랑, 이 빌어먹을 자식아!〗
사야는 그런 랑야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는 아버지가 싫습니다.”
발을 구르며 씩씩거리던 랑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사야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우리 따님께서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그런 말을 하실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랑야의 말을 끊었다.
〖허…….〗
랑야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으나,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저를 똑 닮은 붉은 눈이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야가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고선 목소리를 내었다.
“저는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싫었지요.”
사야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를 그 당시의 계약자에 맡기셨죠. 그리고 단 한 번도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랑야는 가만히 사야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입이 두 개라도, 아니.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저는 윤사해 길드장님의 아래로 들어간 다음에야 아버지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게 됐지요. 하지만, 아버지.”
사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께서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만난 저를 외면하고서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대하던 만남이었는데.
제 아버지는 저를 보자마자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이 미지 영역으로 돌아갔었다.
그 후, 몇 번의 만남이 계속 됐지만 마찬가지.
“때문에 저는 아버지가 싫습니다. 당신 역시 저를 싫어하니.”
〖그럴 리가!〗
랑야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나보다 사빈을 훨씬 더 많이 닮았어! 네 어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단 말이다! 그런, 너를……!〗
랑야가 목소리를 억눌렀다.
〖싫어할 이유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야.〗
부녀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이 깨진 건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그 말은 꼭, 제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아버지께서는 저를 싫어했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사야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면서다. 그 말에 랑야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 질렀다.
〖사야!〗
“농이었습니다.”
사야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 이제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진심은 내보였다. 그러니, 이제.
“여기서 나가야지요.”
제 아버지가 진심을 보일 차례.
사야의 말에 랑야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둘은 ‘서로 속마음 털어놓고 화해하지 않으면 못나오는 방’에서 아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후에야 태랑의 공간을 벗어나, 서로 정답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사야 언니는 지금쯤 랑야와 함께 유랑단에 돌아갔겠지?
절로 흐뭇해지는 부녀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앞에서 발광 중인 류화홍을 쳐다봤다.
“아아! 왜 사야 님이 아니라 너희가 온 거야! 사야 님 못 만났어? 사야 님, 진짜 랑야 님이랑 돌아가 버린 거야? 정말?”
“이 자식이? 기껏 병문안 왔더니!”
“네가 참아, 최화백.”
최화백과 청해솔, 류화홍의 대학교 친구인 둘이 병문안을 왔다.
참고로 류화홍은 중과의 일이 있은 후, 병원 입원이 결정됐다.
외상이 없어서 단순히 정신을 잃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상을 심각하게 입었더란다.
아, 류화홍을 상처 입히고 사야를 납치했던 땡중 자식은 잡혔다.
윤사해의 손이 아니라, 로저 에스테라에게 잡혔다는 게 의문이 남는 일이지만…….
‘어쨌든 잘 된 일이지.’
사회에 해악을 끼치던 존재가 사라지게 됐으니 말이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윤리오와 윤리타의 손을 잡고 류화홍의 병문안을 왔다. 물론, 저세상도 함께.
그리고.
“그런데 청해진, 네가 왜 여기 있어? 학교는?”
청해진도.
청해솔의 물음에 청해진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나 아직 실습 기간이거든? 그리고 화홍이 형 내 멘토 쌤이었잖아! 비록, 하루뿐이었지만 그 인연이 어디 가겠어!”
“옳지, 말 잘 한다.”
“크흠, 내 스승님이었던 분께서 다치셨다는데 당연히 병문안 와야지!”
“그럼, 그럼!”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둘이서 잘들 논다 싶었다.
청해솔은 그런 동생이 꼴 보기 싫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리오, 리타. 너희가 이 멍청이 데리고 왔지?”
“하하, 네. 누나.”
윤리타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동생들도 데리고 왔네?”
“안녕하세요, 언니!”
나는 밝게 웃으며 청해솔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저세상이 뒤늦게 나를 따라 청해솔에게 인사했다.
“그래, 안녕. 그새 컸네? 애들은 역시 빨리빨리 큰다니까?”
언니, 나랑 저세상. 초등학교 올라가서 아직 1cm도 안 컸는데요.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