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꿈은 달콤하다(4)
사시사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귀수산.
사야는 이매망량이 위치한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화홍, 일어나 봐요.”
사야가 제 옆에 쓰러져 있는 류화홍을 깨우려고 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아이고, 그 양반한테는 미안하게 됐수다. 그러게 좋게 말할 때 주지.”
킬킬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다.
사야는 흐트러진 차림새로 남자를 노려봤다.
제 마수에게 이상한 것을 흘려 저를 공격하게끔 만들었던 남자.
유랑단의 ‘중’이 분명한 남자가 류화홍의 명패를 손에 쥐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선비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귀수산을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될 줄은 내 몰랐는데.”
사야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귀수산의 출입을 자유롭게 해 주는 명패는 원래 주인이 아닌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간혹, 불량이 나오곤 했다.
기계로 찍어내는 물건에도 하자가 나오는데, 명패는 인간의 수작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암만 뛰어난 장인의 물건이라도 불량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그게 하필 류화홍의 것이었다니.
‘화홍은 명패를 귀수산의 위치를 아는 좌표 역할로만 사용했으니.’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명패의 불량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상황이 끝나면, 길드장님께 알려 드려야겠네.’
물론, 저와 류화홍.
둘다 무사히 그에게 돌아간다는 가정 하에서다.
사야는 말없이 중을 노려보았다.
DMO에서 나오기 무섭게,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이 저와 류화홍을 가뒀다.
류화홍과 버금가는 이동계열의 각성자라는 선비의 소행이었다. 어떻게든 공간을 부수고 바깥으로 나가고자 했으나 역부족.
결국, 이렇게 눈앞의 중에게 잡혀 귀수산으로 오고 말았다.
중은 사야의 붉은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아비는 부르지 않는겨? 내 그 낯짝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제 아버지를 아시나 봅니다?”
“인연이 좀 깊거든.”
분명 하얀 머리칼의 끝이 붉은 도깨비였다.
자신이 제 연인을 죽인 걸 알면서도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는 인간을 죽이지 못하니까.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남자는 피눈물만 흘려댔었다.
중에게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겨진 광경이었다.
“저를 이렇게 납치한 것도 아버지 때문입니까?”
회상에 젖어들던 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납치라니? 나는 자네를 이매망량으로 친절히 데리고 온 것 뿐인데?”
“이곳은 이매망량이 아닙니다.”
그 바깥의 귀수산.
중은 분명 자신을 이곳에서 죽일 심산이다. 윤사해를 놀리듯, 그의 길드를 코 앞에 두고서.
사야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참 똑똑혀. 생긴 건 아비를 똑 닮았는데 똑똑한 건 어미를 닮았구만?”
“……제 어머니도 아십니까?”
“암, 알고말고. 내가 이래 보여도 꽤 오래 살았거든. 유랑단의 탈쟁이 녀석들 중에서는 이매 다음이여.”
중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킬킬거렸다.
“백호를 부리던 여자였지. 그리고 가장 죽이기 까다로웠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 백호를 죽이려면 여자가 나타나고. 여자를 죽이려면 백호가 나타나고. 어휴.”
그래서 둘이서 서로를 죽이게끔 만들어 주었다.
“당신이었어?”
황망히 묻는 목소리에 중은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사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이었어……!”
“너무 그러지 말어. 자네도 곧 그렇게 만들어 줄 거거든. 도망간 자네 호랑이만 잡아오면.”
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라도 중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손이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제 옆에 류화홍이 쓰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사야는 그랬으리라.
중은 온 몸으로 살기를 내뿜고있는 사야를 즐거이 구경했다.
***
귀수산, 바깥.
이매는 뺨을 긁적였다.
“으음, 이거 곤란하게 됐네.”
중이 잡아와 줬으면 한다던 호랑이가 누군가의 품에 끌어안겨 있었다.
웬만해서는 저 ‘누군가’를 죽이고 호랑이를 잡아가겠지만, 상대가 영 곤란했다.
“강호!”
윤리사.
고목(古木)의 제물로 선택됐었던 윤사해의 딸.
아이 뒤로 윤사해의 아들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윤사해가 보호 아래 뒀다는 남자아이의 얼굴도 보였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담?”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매의 붉은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
미친,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금강호가 왜 우리 집 앞에서 튀어나왔나 했더니. 또라이 한 명을 피하려다가 우리 집으로 급히 도망쳐왔나 보다.
나는 호랑이를 꼭 끌어안으며 그리 멀지않은 곳에 서 있는 이매를 노려보았다.
“강호, 사야 님은? 사야 님은 어쩌고 혼자 있는 거야?”
“우리 집은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윤리오, 일단 아빠한테 말해야하지 않을까?”
윤리오와 윤리타는 아직 이매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윤리오는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에서 막 깨어난 참이고 윤리타는 금강호가 현관문을 긁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직후.
둘 다 주변을 살피기에는 정신이 없을 거란 말씀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뭐지?”
“글쎄, 하지만 누가봐도 수상한 사람 같지 않아?”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매를 존재를 알아차리고서 경계하기 시작했다.
“리오 형, 리타 형? 밖에서 뭐하세요? 윤리사도 있네? 어…? 호랑이도 있잖아……?”
“아, 세상아.”
윤리오가 저세상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제 뒤로 보냈다.
하지만 저세상은 윤리오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나는 분명하게 들었다.
이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돌연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 결정.”
이매가 웃음을 지으며 검을 꺼내들었다.
“윤사해의 아드님들이죠? 애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어디 한 번 무기를 들어보세요. 실력이 궁금하거든요.”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윤리오와 윤리타 역시 이를 느낀 모양이다.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기 시작하니 말이지.
팽팽하게 조여지는 공기 사이에서 나는 앞으로 나섰다.
“오빠들은 안 싸울 거예요.”
-크릉.
금강호가 내 옆에 서서는 털을 잔뜩 세웠다. 거대한 호랑이가 함께라니 아주 든든했다.
“야아, 윤리사!”
우리 주인공께서는 네가 뭔데 앞에 나서냐는 듯이, 나를 제 뒤로 끌어당기고자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꺼져요.”
저세상이 숨을 들이마셨다.
살기에 짓눌리고 있던 윤리오와 윤리타가 뒤늦게 숨을 터트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매는 고개를 비스듬이 기울이며 내게 말했다.
“정말, 당신은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 같단 말이에요?”
하하, 모르는 소리! 내가 목숨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데!
이매에게 한 소리 더 해 주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막았다.
“리사.”
윤리오였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매와 싸울 모양인 것 같지만, 윤리오도 알 거다.
지금 자신은 이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윤리타는 나와 저세상을 지키듯이 끌어 안고는 이매를 노려보았다.
이매가 그런 우리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하,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요. 김 샜거든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 한 자루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래도 우리 꼬마 아가씨가 저를 즐겁해 드렸으니 재미있는 걸 말해 드릴게요.”
이매가 선심쓰듯이 입을 열었다.
“중 씨께서 원하는 건 이매망량. 마수의 혼을 귀(鬼)로 부려서 자신만의 군대를 만드는 거예요.”
그 소리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얼굴을 찌푸렸다.
“거짓말.”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이매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믿든 말든 자유에요. 하지만 저는 분명 말한 것 같은데요?”
안대에 가려져 있지 않은 붉은 눈이 내게로 향했다.
“우리 꼬마 아가씨께서 저를 즐겁게 해 주셔서 말씀드리는 거라고.”
비단, 그 이유뿐만은 아닐 거다.
이매는 쾌락주의 성향이 굉장히 짙은 악역이었다. 그런 주제에 머리는 또 똑똑해서 말이지.
아마, 이것저것 상황을 재 본 후에 이야기를 꺼낸 거겠지.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거예요. 호랑이의 주인 분께서는 중 씨의 손에 있으니까요.”
그럼, 안녕.
이매는 얄궂게 인사를 하고는 우리의 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거센 폭풍우가 한 차례 지나간듯한 기분이었다.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던 윤리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
둘은 지금 생사를 넘나든 기분일 거다.
-끼잉.
“강호.”
나는 금강호를 꼭 끌어안고는 토닥거렸다.
“괜찮아, 사야 언니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울지 마.”
거대한 호랑이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는 내게 얼굴을 비볐다. 그러더니.
“아버지한테 연락해야겠지?”
“당연하지. 강호도 여기 있는데 연락드려야지. 그런데 지금 전화를 받으실까?”
“이매망량에 직접 찾아가야할 것 같아악!”
윤리오가 꺼내든 명패를 강탈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 뭐야? 강호! 그거 이리 안 내놔?! 명패는 네 장난감 아니야! 야! 리사도 내려놔!”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땅이 순식간에 멀어졌기 때문이다.
-크릉.
나를 제 등에 태운 호랑이는 콧김을 한 번 내뿜더니, 이내 닫혀 있는 현관문을 향해 돌진했다.
응? 잠깐만, 호랑아?
이거 왜인지 데쟈뷰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불길한 데쟈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