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꿈은 달콤하다(2)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윤리오 뒤로 윤리타가 고개를 빼곰 내밀고는 말했다.
“윤리사, 아빠 괴롭히지 말고 빨리 자야해.”
“리타 오빠나 빨리 자!”
윤리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윤사해가 우리 둘의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이,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도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텐데 푹 쉬렴. 내일 보자꾸나.”
“네에!”
마지막으로 저세상과 도윤이가 윤사해에게 굿나잇 인사를 올린 후, 방문이 닫혔다.
나는 그러기 무섭게 윤사해의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보다는 윤사해와 함께 자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리사, 잠깐만 일어나 보렴. 약 좀 먹고 자자꾸나.”
“약?”
“그래, 광혜원 헌터가 우리 리사 아프지 말라고 약을 지어 줬단다.”
“리사는 이제 아픈 곳 없는데.”
“그래도, 아가.”
윤사해가 부드럽게 나를 타이르며 자리에 앉게 했다. 나는 뚱한 얼굴로 두 뺨을 부풀렸다.
“리사는 쓴 거 싫은데.”
“하나도 안 쓰단다. 딸기약이라고 하더구나.”
딸기약! 어릴 때 빼고는 먹은 적 없는 달콤한 약이었다.
“자, 아.”
어쩔 수 없지.
나는 윤사해를 따라 입을 벌렸다.
“아.”
곧, 묽은 액체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쓴 맛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빠 거짓말쟁이! 딸기약이라면서!
잔뜩 울상을 짓고서 윤사해를 쳐다보는데,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자, 이제 자자꾸나.”
“아빠, 리사한테 거짓말했어.”
“설마 딸기약이 아니었니?”
어색하기 그지 없는 거짓말이었다. 윤사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토닥거렸다.
“아빠가 내일 광혜원 헌터를 혼내 주마. 그러니 이제 자자, 아가.”
내 몸을 일정하게 두드려 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나는 윤사해의 옆구리를 파고든 후, 두 눈을 꼭 감았다. 윤사해가 내 어깨를 감싸고는 말했다.
“잘 자렴, 리사.”
“아빠도 안녕히 주무세요…….”
낮잠을 그렇게나 잤는데, 잠이 쏟아지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
다음날 아침, 윤사해는 이미 일어나 출근한 지 오래였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느긋하게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 길드에 가는 게 늦을 것같아 한소리를 했더니, 둘은 웃으며 말했다.
“리사, 우리도 하루는 쉬어야지.”
“맞아. 배울 게 많은 실습생의 신분이라고 해도, 주말도 없이 돌아다니면 골병 난다고?”
주말 내도록 이매망량에 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침 준비를 끝마친 쌍둥이가 아직 꿈나라에 가 있는 저세상과 도윤이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리사, 세상아. 오늘 뭐하면서 놀고 싶어?”
나는 밥숟갈을 크게 뜨고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리사는 단예랑 단아. 단이 불러서 놀고 싶어. 어제 파자파 파티 못해서 리사 슬프단 말이야.”
그리고 한태극네 세쌍둥이도 많이 아쉬워하고 있을 거다.
내 말에 윤리오가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세 쌍둥이를 초대하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는 형들이랑 놀고 싶어요. 리오 형이랑 리타 형, 오랜만에 집에 계시는 거잖아요.”
저세상, 저 약삭빠른 자식!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저세상을 노려봤다. 저세상은 내 시선에 코웃음을 치고는 옆에 앉아 있는 도윤이에게 물었다.
“그치, 백도윤? 너도 형아들이랑 윤리사하고만 노는 게 더 좋지?”
“나, 나는…….”
도윤이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단예랑 단아, 단이 보고 싶은데.”
저세상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말했다.
“도윤이도 더 많은 친구랑 놀고 싶대!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말썽 안 부리고 잘 놀 테니까 친구들 집으로 초대하면 안 돼?”
윤리오와 윤리타가 서로 눈짓하며 말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뜨고 있던 밥숟갈을 놓고는 두 손 모아 간절하게 말했다.
“응? 리사 어제 아팠었는데.”
하나뿐인 여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내가 날린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그래, 리사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그 친구들 전화번호 알아, 리사? 오빠가 전화할게.”
만족스러운 결과에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
단예와 단아, 단이는 흔쾌히 우리 집으로 왔다.
“윤리사! 괜찮아? 어제 아팠다며!”
“맞아, 리사야. 몸은 좀 괜찮니?”
“아직 안 좋으면 우리는 돌아가도 괜찮아.”
세쌍둥이는 보자마자 나를 염려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리사는 괜찮아! 어제 놀지 못한만큼, 오늘 즐겁게 놀자!”
그렇게 우리는 거실로 가서 퍼즐을 맞추며 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또 다른 손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집에 초대된 사람은 한태극네 세쌍둥이 뿐만이 아니었다.
“와아, 너희 진짜 너무해. 이번 주에 있었던 실습으로 이야기꽃을 피워 보려고 나를 부르나 했더니 애들 돌보기라니.”
“우리 둘만으로는 벅차서. 부탁 좀 할게, 청해진.”
윤리오의 말에 윤리타가 청해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맞아. 너는 어제까지 이매망량에서 한 일이라고는 먹고 즐기기밖에 없었잖아.”
“아니거든?”
윤리오와 윤리타는 청해진을 집으로 초대했다.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둘이서 감당하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거실에서 애들 좀 봐 줘.”
“너희는 뭐하고?”
“애들 간식 만들 거야.”
청해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둘을 쳐다봤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미 부엌에 들어간 뒤였다.
청해진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어… 음, 안녕, 얘들아? 내가 누구냐면…….”
“청 가문의 사람이 아닌가요?”
“응? 어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물음에 답해 준 사람은 단예가 아닌, 단이였다.
단이가 도윤이에게 퍼즐 조각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책에서 청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청(淸)의 색을 띄고 있다고 했거든요. 청은 숲과 바다의 색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청 가문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답이었네요.”
단이에게서 말을 건네받은 단예가 눈웃음을 짓고는 청해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단예라고 해요, 한단예.”
“저는 한단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한단아고요.”
“그, 그렇구나. 안녕?”
청해진이 당혹감에 잠긴 목소리로 단예와 단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해진이 오빠.”
“잘 부탁드릴게요, 해진이 형.”
청해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리오 오빠가 말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단예가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도윤이와 함께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청해진은 입술을 잔뜩 오므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속닥거렸다.
“리사, 너 쟤들이랑 같은 여덟 살 맞지?”
“응.”
“왜 이렇게 다른 것 같지? 마치, 영재와 둔재의 차이를 지금 막 본 것 같은 느낌인데.”
그 말은, 내가 바로 그 둔재렷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향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해진이 오빠가 리사 보고 멍청하대!”
“내가 언제!”
“뭐?! 청해진, 너……!”
“아니야! 절대로 안 그랬어!”
윤리오가 국자를 들고 뛰쳐나왔다. 윤리타는 손에 고추장을 들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우리 간식으로 뭘 만들고 있는 거지?
내 옆에 있던 단아가 윤리오와 윤리타를 피해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청해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저 오빠 좀 이상한 것 같아.”
단예와 단이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 단아 역시 천재였다.
청해진의 멍청함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
윤리오와 윤리타가 만든 간식은 떡볶이였다.
여섯이서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떡볶이를 비우고 나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었다.
자신들을 데리러 온 수행 기사를 보고서 단아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단예가 단아의 귓가에 뭐라 속닥거리자, 단아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한태극네 세쌍둥이가 모두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백시준이 1박 2일의 출장을 끝내고 도윤이를 데리러 왔다.
“아빠아!”
“도윤아, 리사하고 세상이랑 잘 놀고 있었어? 형들 말도 잘 들었고?”
“응!”
백시준이 도윤이의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추고는 우리에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네었다.
“리오, 리타. 여기 선물. 나중에 사해오면 이것도 같이 전해 주렴.”
“앗…… 네, 삼촌.”
“선물 같은 거 안 주셔도 괜찮은데…….”
윤리오의 말에 백시준이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러겠니? 이건, 리사하고 세상이 선물. 우리 도윤이랑 잘 놀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야.”
나와 저세상은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백시준의 선물을 받았다.
쇼핑백 안에는 제주도 감귤 초콜릿이 가득이었다.
백시준,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왔나 보구나?
“그럼, 얘들아. 저녁 식사 맛있게 다음에 또 보자.”
“안녕히 가세요.”
도윤이 마저 떠난 후, 친구들로 꽉 찼던 거실에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윤리오는 백시준이 준 선물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후 말했다.
“아버지 오늘 늦으신대.”
“아빠 요새 너무 바쁘신 것 같아. 그러다 몸 상하시면 어쩌지?”
“한약!”
나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아빠도 한약 먹어야 해!”
이건 절대로 어제의 딸기약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내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 것도 지어 드려야겠다. 어때, 윤리타?”
“완전 좋지.”
저세상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내 저녁이 준비되었고, 우리는 단란하게 식사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보세요? 네, 아버지.”
급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네? 글쎄요, 저랑 윤리타는 오늘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어요. 리사가 친구들을 초대해서 같이 놀았거든요. 왜 그러세요?”
나는 윤리오의 스마트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래, 오늘 하루 사야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구나. 알았단다, 리오. 애들이랑 저녁 맛있게 먹으렴.
들려온 이야기가 심상치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