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리 편하지 않은(3)
밤이 늦은 시간.
나는 자러 간다고 해 놓고 침대에 앉아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중이었다.
잠이 오지도 않거니와, ‘중’을 어떻게 찾아서 잡아 족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그랬다.
물론, 그 탈쟁이를 잡아 족치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 거다.
“이 몸뚱이로 덤비면 꼼짝없이 세상 하직이지.”
윤사해의 따님이라면서 봐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마땅히 ‘중’을 상대할 만한 공격 스킬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지.
이왕이면 윤사해라거나, 이매망량의 주인이라거나, 우리 아빠거나.
다치지 않도록, 내가 보조하면서 윤사해가 중을 상대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거실에서 윤리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윤사해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리오, 아직 안 잤니?”
“아버지 기다리고 싶어서요. 윤리타도 같이 기다렸어요. 조금 전에 들어갔지만요.”
나는 방문을 빼곰 열고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후다닥 달려나갔다.
“아빠!”
“리사.”
윤사해가 놀란 눈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무릎을 굽히고는 나에게 두 팔을 벌렸지만 말이다.
나는 단숨에 윤사해의 품을 파고들었다. 머리 위로 윤리오가 어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리사, 안 자고 있었어?”
“자다가 일어난 거야!”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주고는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녀오셨어요, 아빠?”
“그래.”
윤사해가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애틋하기 그지없는데…….
“아빠, 리사한테 할 말 있어?”
뭔가 말할 것이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정곡을 찔렀는지, 윤사해가 몸을 움찔거리고는 애매하게 웃었다.
“아버지?”
윤리오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며 그를 불렀다. 첫째 아들의 부름에 윤사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당분간 돌아오는 것이 늦어질 것 같구나. 일이 좀 생겨서.”
“아…….”
중과 관련하여 일이 많이 바쁜 것 같았다.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아침을 함께 한다거나 저녁을 함께하는 것이 조금 힘들 것 같단다.”
들리는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와 했던 약속을 어기게 돼서 그런가 보다.
“괜찮아, 아빠! 대신 주말에 시간 내서 리사랑 놀아 주기! 밥도 같이 먹고!”
주말도 없이 일하면 몸 상하니까요, 아버지.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약속하마.”
그런 말로는 부족하지! 나는 윤사해와 손가락 약속을 꼭꼭 걸고는 활짝 웃었다.
윤사해 역시 활짝 미소를 짓고선 나를 안아들었다.
“리사는 내가 재우마. 들어가서 자렴, 리오.”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냥 제가 재울게요.”
“싫어!”
나는 코알라마냥 윤사해를 끌어안았다. 윤사해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리사가 싫다구나.”
윤리오가 입술을 씰룩였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아버지. 리사, 잘 자.”
“응! 오빠도 잘 자!”
나는 윤사해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안자마자 곧장 이불을 파고들고는 재잘거렸다.
“있잖아, 아빠! 오늘 오빠들이랑 치킨 먹었어! 후라이드로!”
“어쩐지, 튀김 냄새가 나더구나.”
“응! 오빠들 오늘 이매망량에 실습 다녀온 첫 날이니까 기념해서 먹었어!”
“아빠가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윤사해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같이 먹으면 되지! 그리고 오늘 세상이 오빠가 급식으로 나온 피망을 모두 골라낸 거 있지? 오빠 편식해!”
“그래?”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리오한테 말해 둬야겠구나. 편식을 하면 안 되지. 안 그래도 또래보다 작은데…….”
어디선가 자신은 작지 않다며 항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저세상은 내일부터 피망만 먹게 생겼다.
쌤통이라면서 좋아라하고 있는데, 윤사해가 돌연 내게 물었다.
“리사. 세상이와 둘이서 심심하지는 않았니?”
“응?”
“학교 다녀오면 둘이서만 있잖니.”
윤사해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밝게 웃으며 그의 걱정을 덜어 주기로 했다.
“하나도 안 심심했어!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돌아올 때까지, 우리 둘이서 엄청 재미있게 놀았는데!”
그럼에도 윤사해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심심하고 말고는 별개고, 나와 저세상 단 둘이서 집에 있는 상황이 불안한가 보다.
“친구… 라고 부르기에는 뭣하지만, 함께 놀 사람을 붙여 주마.”
억지로라도 붙여 줄 모양새였다.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싫어.”
“리사도 잘 아는 사람이란다.”
“세상이 오빠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해!”
“물론, 세상이도 잘 아는 사람이지. 걱정할 것 없단다.”
뭐야, 누구를 붙여 주려고 이러는 거지? 어떻게든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됐다.
윤사해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미소를 지었다.
“자렴, 리사. 동화책을 읽어 주마.”
그에게 나와 저세상의 놀이 상대로 도대체 누구를 붙여 주려는지 물으려 했지만.
“아주 오랜 옛날, 해와 달이라는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윤사해가 말한 나도 잘 알고, 저세상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류화홍이었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맞아요,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우리의 귀가를 환영한답시고 머리에 요상한 머리띠를 끼고 있던 류화홍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가씨? 세상아, 그래도 너는 나를 좀 반겨 줘야지.”
“화홍이 오빠는 해진이 오빠 멘토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 있어?”
길드에 나온 실습생을 이끌어 주는 존재. 그들은 ‘멘토’라고도 했다.
내 말에 류화홍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그건 누구한테서 들으셨어요?”
누구한테 들었겠냐?
말없이 류화홍을 쳐다보자, 그가 답을 찾았다.
“아, 리오랑 리타한테 들으셨나 보구나. 저 잘렸어요.”
“잘렸다고?”
“네, 애 데리고 하루 종일 먹으러 돌아다니기만 했다면서 길드장님이 때려치래요. 히힛.”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청해진과 아주 끝내 주는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먼저 알림장 좀 보여 주시겠어요? 길드장님께서 두 분을 잘 보살피라고 하셨거든요.”
류화홍은 나와 저세상의 놀이 상대가 아닌, 보모로 붙여진 것 같았다.
우리는 류화홍에게 알림장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해진이 오빠는 지금 누구랑 같이 다니고 있어?”
“리오 형이랑 리타 형은 이매망량에서 어때요? 잘 하고 있어요?”
류화홍이 웃음을 터트렸다.
“리오랑 리타는 아주 잘 하고 있죠. 해진이는 태운 님이랑 같이 다니기로 했어요. 태운 님도 금방 잘릴 것 같지만요.”
류화홍이 키득거렸다.
글쎄, 오빠보다는 태운이 해진이 오빠의 멘토로 오래 버티지 않을까?
나는 치밀어 오르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 사이, 나와 저세상의 알림장을 확인한 류화홍이 휴대폰을 켰다.
윤사해에게 나와 저세상의 귀가를 알리는 메시지라도 보내는 건가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번 주말에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으세요? 주말부터 일기 작성이라니. 요즘에도 일기를 숙제로 내나 보네요?”
그러면서 류화홍은 인근 나들이 장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와 저세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는데.”
“저도요.”
“그럼,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요!”
그게 뭐야.
“길드장님께서 두 분을 확실하게 케어하라고 하셨으니까요. 리오랑 리타의 실습은 주말에도 계속 될 테고, 길드장님께서도 많이 바쁘셔서 주말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거예요.”
“아닌데. 아빠랑 약속했는데. 주말에는 리사랑 같이 놀기로.”
류화홍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시간을 내기는 어려우실 테니까요! 저녁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비우시겠지만요!”
그것도 그랬다.
“여기 가요! DMO에서 운영 중인 생태 학습장인데, 이것저것 체험할 게 많아서 놀기 좋을 거예요!”
“그럼, 화홍이 오빠! 도윤이도 같이 가도 돼?”
류화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윤이라면, 길드장님 친구 분의 아드님 맞으시죠?”
“응! 도윤이가 이번 주말에 집에 혼자 있어야한다고 했거든! 같이 놀고 싶어!”
저세상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한테 맞을까 봐 무섭나 보다.
류화홍이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도윤이랑 같이 주말 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어때요?”
“어떻게?”
“생태 학습장을 다녀온 후에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는 거죠! 도윤이라는 친구도 여덟 살일 거 아니에요? 혼자서 많이 무서울 텐데, 이번 주말에 아예 함께 지내세요!”
오, 좋은 생각인데? 그보다 파자마 파티라…….
“그럼, 단예랑 단아, 단이도 초대할래!”
“아저씨가 싫어할 것 같은데…….”
나는 저세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윤사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좀 안 될까, 사해야?
“안 돼.”
윤사해는 지금 오랜 친구인 백시준의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윤사해의 단호한 거절에 화면 너머에서 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시진이도 출장이 겹쳐 버려서 도윤이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응?
“선생님 계시잖아.”
-비나리 고등학교 실습으로 많이 바쁘신 것 같았어.
“그래도 그 분께 부탁하지 그래.”
백시준이 곤란하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사해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백시준이 어떻게든 제 아들을 자신에게 맡길 요량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마침 하나뿐인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끊을 명분을 찾은 윤사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한테 전화 왔어. 끊어.”
-잠깐만, 사해야……!
윤사해는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는 백시준과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응, 리사.”
-아빠, 바빠?
“아니, 괜찮단다. 무슨 일이니?”
묻자마자 아이의 재잘거림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윤사해는 귀를 기울이며 이를 듣다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무슨 파티……?”
-파자마 파티! 도윤이랑 단예, 그리고 단아랑 단이를 초대할 거야!
윤사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