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녹아내린 봄(3)
대한민국의 4대 길드 중 하나.
세력으로만 따지면 가장 작다고 하나, 그 유대감과 유서(由緖)에 있어서는 제일이라 불리는 아래아.
그곳의 본가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모! 제정신이야?! 도대체 사고를 얼마나 더 치려고 그래?”
“내가 뭐?”
“이매망량에 협조문 보냈다며! 사야 님 좀 보내 달라고!”
아래아의 길드장, 최설윤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어떤 자식이 조카놈에게 그걸 알린 거야?’
건드리면 등짝 한 대라면서 최설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뭐 어쨌다고?”
최설윤의 하나뿐인 조카, 최화백이 두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고모, 사야 님이 마수 사육사인 거 몰라서 그래? 귀수산 바깥으로 나오면 당장 중 새끼의 표적이 될 텐데……!”
“이미 됐어.”
“무, 뭐?”
최화백이 당황한 얼굴로 제 고모를 쳐다봤다. 최설윤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해 줄 뿐이었다.
“됐다고, 표적.”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고모는 그걸 또 어떻게 알고?”
질문에 답해 줄 의무는 없다. 그렇기에 최설윤은 입을 꾹 다물고선 방긋 웃었다.
최화백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고모!”
이게 어디서 성질이야?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최화백을, 최설윤은 애지중지 키웠었다.
그 결과, 하나뿐인 조카는 너무나도 배은망덕하게 자라 버렸다.
‘내 팔자지.’
최설윤이 자신의 처지를 소리 없이 한탄하고는 최화백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조카님? 오늘 아침 수업이 있지 않아? 왜 아직도 집에 있는 걸까?”
“그… 그건……!”
“고모가 하는 일에 신경 끄고 어서 수업이나 들으러 가.”
“싫어! 어차피 지금 가 봤자 지각이야! 안 가! 아니, 못 가!”
최화백이 마룻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버렸다.
‘학교 간 사이에 또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고모인 최설윤.
그녀는 지나치게 제 사람을 아꼈다. 너무 아껴서 탈일 정도로.
‘중 새끼 잡아 족치려는 거 방해한다고 AMO의 백시진 팀장을 때려눕힌 것만으로도 모자라……!’
서울 유영구의 동네를 족쳐 버렸다.
“절대로 못 가!”
최설윤이 심드렁한 얼굴로 제 조카가 하는 양을 보고선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나랑 같이 손님맞이하면 되겠네.”
“손님? 고모한테 무슨 손님이 찾아왔다고 그래?!”
“찾아왔는데.”
최설윤이 검지를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 장천의 회장.”
“안녕하십니까, 최설윤 길드장님. 그리고 화백 군도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최화백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설윤은 자신의 집에 멋대로 발을 들이민 객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대?”
“다쳤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걱정도 참. 내가 어디 쉽게 다칠 사람인가?”
“하하, 그건 그렇지만요. 하지만 직접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최설윤이 피식 웃었다.
“그럼, 온 김에 부탁 하나 들어줄래? 곤란하면 거절해도 되고.”
“최설윤 길드장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려야지요.”
그 말에 최설윤이 최화백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조카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후다닥, 최화백이 계단 너머로 사라지자 최설윤이 입을 열었다.
“유영구 내에서 수치노를 잃어버린 사육사가 없는지 좀 알아봐 줘. 사육사가 아니더라도 좋아.”
“흐음. 수치노라면 성년이 됐을 때 사람 말을 구사하게 되는 마수를 말하는 거지요?”
“응, 중 새끼와 싸우면서 애를 잃고 말았거든. 주인이 있는 애였는데, 그 주인한테 상황도 설명하고 보상도 해 줘야 해서.”
중과의 싸움에서 마수를 잃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제 마수뿐만이 아니라, 남의 마수까지 말이다.
다행이라면, 자신이나 그 마수의 주인이나 서로의 마수에게 애착을 느낄 정도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었다는 것.
“그리고 저번에 빌려 줬던 아이템 말이야. 한 번 더 빌려 줄 수 있을까? 보다시피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활동하기가 좀 그래.”
“어렵지 않지요.”
장천의가 방긋 웃고는 최설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중은 어떻게 됐습니까?”
“말해 뭐 해? 놓쳤지.”
어이쿠, 소리를 내면서 제 공격을 피해대던 가증스러운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근처에 학교가 있어 힘을 최소한으로 움직였다고 하나, 그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설윤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길드의 주인.
그녀는 몇 번의 공격 끝에 중의 목을 노릴 뻔했다.
즉, 실패로 끝났다는 말.
꽁지 빠지게 도망만 치던 중은 최설윤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 새끼 짓이겠지.’
최설윤이 이를 으득 갈았다.
“다음에 만나면 그 웃는 낯짝을 아주 시원하게 갈겨 찢어 버릴 거야.”
듣는 이로 하여금 간담 서늘하게 만드는 말이었으나, 장천의는 듣기 좋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곳.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유랑단의 공간에서 취기가 잔뜩 올라 있는 사내가 몸을 떨었다.
“으으…! 갑자기 소름이……!”
“누군가 중 씨의 살해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나 보네요.”
“아이고! 그런 말 말어, 이매! 내 심장이 얼마나 자그마한데, 그런 소리를 하셔?!”
중은 호들갑을 떨고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취한다!”
이매의 옆에 앉아 있던 선비가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최설윤에게 맞선 겁니까?”
“아, 정말! 최설윤인지 몰랐다니까? 왜 사람 말을 믿지 않아!”
“당신 말을 믿을 수 있어야지요.”
“선비 씨는 우리 중 아무도 믿지 않잖아요?”
선비가 이매를 향해 날선 시선을 보냈다.
“그나저나, 10년 만에 돌아왔는데 어째 여기 있는 녀석들은 변하지가 않아! 아니지. 지금 양반과 각시가 공석이라고 했던가? 아하하하하!”
중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이, 선비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비단 중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매가 선비의 얼굴 밖으로 드러난 불쾌감을 알아차리고선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시끄럽게 구시네요? 10년 전에 노린 사육사 분들은 4대 길드 바깥의 분들 뿐이지 않았나요?”
“그때는 유흥이었으니 그랬지. 그 전도, 그 전의 일들도.”
중이 키득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흥으로 즐길 수가 없어서. 물론, 즐기기야 할 거라네.”
타인의 것을 빼앗는 거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즐거움.
그로 인해 그 타인이 바스러지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제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
중이 빈 잔에 술을 따르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들, 나랑 일 한 번 해 보지 않겠는가?”
곧바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싫습니다.”
“선비 씨가 싫다면 저도 싫어요.”
선비와 이매의 매몰찬 거절에 중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듣기만 해 줘. 아니, 보기만 해 봐.”
보기만 하라니, 무엇을?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중이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따악-!
경쾌하게 울린 소리 뒤로 중의 어깨에 흐릿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연기가 만들어낸 형체에 선비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이매는 그와는 달리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중이 서로 다른 얼굴을 보이고 있는 둘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수장님의 허락은 내 이미 받아났다네.”
오랜만에 마음껏 날뛰어 보라더군.
***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즐겁게 날뛴 하루였다.
눈싸움에 이어 눈사람 만들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글루까지!
점심이 지나 저녁에 이르기까지, 이매망량의 길드원들과 함께 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했다.
“오늘 즐거웠니, 리사?”
“응! 진짜 진짜 즐거웠어!”
“세상이도?”
“네!”
나와 저세상은 윤사해의 손을 하나씩 잡고는 방긋 웃었다.
윤리오와 윤리타 역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나와 저세상이 눈을 가지고 놀 동안, 윤리오와 윤리타는 길드를 제 집 안방처럼 휩쓸고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둘의 옷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고 온 거야?
그때 윤리오와 윤리타가 서로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뭔가를 떠넘기는 것 같았는데.
“아빠, 저… 이번 주 주말에도 같이 이매망량에 가면 안 될까요……?”
저 질문을 하려고 그랬나 보다.
윤리타가 조심스럽게 묻자 윤사해가 눈웃음을 짓고는 자리에 섰다.
우리는 이미 귀수산의 이매망량에서 벗어나 집에 다다른 참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불안한 눈빛으로 윤사해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윤사해는 곧장 품에서 긴 끈이 둘러진 물건 두 개를 꺼내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건네주었다.
명패였다.
저세상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윤리오와 윤리타 역시 똑같았다.
윤사해만이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오, 리타. 이제 곧 매일 드나들게 될 텐데, 이번 주말에도 함께 길드에 가고 싶니?”
윤리오와 윤리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국보급 유물이라도 만지게 된 고고학자처럼 서 있는 윤리오와 윤리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각성, 그 후』에서 이매망량의 명패를 갖게 된 사람은 윤리타뿐이었다.
그마저도 스무 살.
AMO에서 진행하는 정규 헌터 시험을 치른 후, 길드에 입단하고 나서 받게 된 거라고 했다.
물론, 윤사해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길드원의 손을 통해서.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서 윤사해로부터 윤리오와 윤리타가 이매망량의 명패를 받는 것을 보게 된 거다.
“리오, 리타. 앞으로 이매망량 내에서는 나를 ‘길드장님’으로 불러야 한단다. 그럴 수 있지?”
“네! 아버…… 아니, 길드장님!”
윤리오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윤리타는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입만 뻐금거렸다.
윤사해가 윤리타의 눈가를 한 번 닦아 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단다. 이매망량 내에서, 실습을 진행하는 동안에만 그리 부르면 돼.”
윤리오와 윤리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습생은 길드에서 붙여 주는 사람과 함께 다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쌍둥이가 힘있게 대답했다. 그에 윤사해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함께 다닐 사람은 사야. 실습생으로 이매망량에 오면 제대로 소개하겠지만, 미리 알려 주마.”
윤사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야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잠깐.
왜 굳이 사야를 이런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