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녹아내린 봄(2)
“윤리오, 윤리타.”
윤사해의 나지막한 부름에 그의 두 아들들이 입술을 씰룩였다.
“이매망량은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아빠.”
무려 10년.
아니, 11년 만에 방문한 이매망량이었다.
어릴 적에는 놀이터보다 자주 드나들던 곳.
윤리오와 윤리타가 시무룩하게 제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이해한단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렴. 아니, 이러면 안 된단다.”
윤사해의 머리칼에는 도깨비바늘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사고를 치기 직전, 이를 막느라 벌어진 참사였다.
윤사해가 제 머리칼에 붙은 도깨비바늘 하나를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이매망량에 실습 나와서도 이런 사고를 치려는 건 아니겠지?”
윤리오와 윤리타가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씀은……!”
“저랑 윤리오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이죠?!”
이매망량에 실습을 나오기 위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하는 시험.
가채점을 통해 합격점인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윤사해에게서 확답을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윤사해가 환한 얼굴로 저를 보는 아들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반성문부터 쓰렴.”
“네, 아버지!”
“네, 아빠!”
윤리오와 윤리타가 밝게 웃으며 흰 종이에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윤사해는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들을 보다가 제 옆에 서 있는 서차웅에게 소곤거렸다.
“리사랑 세상이 좀 보고 와 주겠나? 광혜원 헌터한테 애들을 맡겼는데, 조금 불안해서 말이네. 지금쯤 놀이방에 가 있겠군.”
서차웅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윤리오와 윤리타와 함께 있는 이 자리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윤사해의 비서이기 이전에, 이매망량의 부길드장이었던 서차윤과 형제였던 이.
비록, 어머니만 같은 서로 서먹한 사이였다고 하나…….
‘형님께서 두 분 도련님께 지은 죄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 증거로, 윤리오는 자신만 보면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에야 윤사해와 있는 시간이 즐거워 저를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 같지마는.
어쨌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은 건 사실.
서차웅은 조용히 윤사해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놀이방으로 향했다.
***
광혜원은 나와 저세상을 놀이방에 데려다줬다. 그러고는 자신은 할 일이 있다면서 얌전히 놀고 있으라며 나가 버렸다.
놀이방에는 새로운 장난감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건, 창밖의 풍경이었다.
“눈싸움하러 나가고 싶다.”
옅어진 안개 사이로 희게 칠해진 풍경이 보였다.
“세상이 오빠, 리사가 한 말 들었어? 조금 전에 눈싸움하러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응, 들었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저세상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뚱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저세상이 질색하는 얼굴을 보이고는 말했다.
“밖에 추워. 괜히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목도리 꼭 매고 장갑도 꼭 끼면 괜찮은데.”
그리고 해가 높이 뜰수록 날씨가 점점 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세상은 단호했다.
“그래도 안 돼. 그리고 지금 우리 둘밖에 없잖아. 둘이서 무슨 눈싸움을 하겠다고.”
오호라?
“그럼, 리사가 눈싸움 같이 할 사람을 더 데리고 올게!”
“뭐?”
저세상이 의문을 표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방문을 향했다.
“야! 윤리사, 잠깐만……!”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나는 곧장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기 무섭게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크흠, 흠!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등을 돌린 채, 연신 헛기침을 터트리며 내게 인사하는 이매망량의 길드원들 모습이었다.
그들 중에서는 윤사해의 명령에 따라 윤리오와 윤리타의 뒤를 쫓았던 태운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들 머리에 도깨비바늘을 붙이고 있는 거야?
길드원들은 놀이방을 박차고 나온 나의 등장에 하나같이 딴청을 피워댔다.
하하, 귀여우셔라.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놀이방 앞을 서성이고 있는 건, 진작 알아차렸었다.
태운이 윤리오와 윤리타를 잘 잡았을까 싶어서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을 사용해 봤기 때문이었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를 얻게 된 지도 벌써 몇 달.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이제 꽤 익숙해졌다. 문제는, 아직 여러 명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수에게 이 스킬을 적용하기에는 눈의 피로가 너무 심했다.
이를 극복해야 훗날 스킬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뭐, 이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나는 방긋 웃으며 길드원들에게 물었다.
“있잖아요. 리사가 지금 같이 눈싸움 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같이 할래요?”
안 하면 조금 슬플 것 같은데.
다행히도 길드원들은.
“물론이지요, 아가씨!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눈싸움으로 세상을 제패할 실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저는 이매망량에 들어오기 전에 눈싸움 하나로 먹고 살았던 놈입니다, 아가씨!”
“아가씨, 저는……!”
자신들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내 제안에 응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은 일곱.
나와 저세상을 포함하면 아홉인 숫자였다.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좋은데, 어디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 없나?
“다들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서 비서님!”
때마침 서차웅이 나타났다.
나는 곧바로 서차웅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 비서님도 같이 해요!”
“네? 뭐, 뭐를 같이 하시자는 건지…….”
“눈싸움이요!”
참고로 거절은 거절입니다.
***
나와 저세상은 가위바위보를 통해 팀을 나눴다.
저세상은 끝까지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눈싸움에 돌입하자 그 누구보다도 승부욕을 불태웠다.
“아야…! 윤리사, 너……!”
그래봤자 나에게는 안 됐다.
결국, 눈싸움의 최종 승리자는 바로 나.
저세상이 분하다는 듯이 씩씩거렸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한 번 더 해!”
“싫은데!”
때문에 나는 저세상에게 혀를 날름거려 준 뒤, 눈사람 만들기로 종목을 변경했다.
어른 여덟이 모여 있는 터라, 눈은 금방 두 덩어리로 크게 뭉쳤다.
“리사가 눈사람 팔로 할 나뭇가지 찾아서 가지고 올게요! 세상이 오빠는 당근 가지고 오기!”
“당근을 어디에서 가지고 와!”
저세상이 버럭 소리 질렀지만, 나는 무시하고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아가씨!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서차웅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번 오가면서 알게 된 건데, 이매망량의 건물 뒤에는 꽤 규모가 큰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나뭇가지가 곳곳에 널려 있다는 말!
아니나 다를까?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눈사람의 팔로 삼을 나뭇가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야 언니?”
의외의 사람도 마주쳤다.
벤치에 앉아 있던 사야가 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오셨다는 걸 들었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아니에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십니까!
황급히 두 손을 휘저은 나는 사야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분명,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지.
거주자의 후손이라 그런 건지, 사야의 상처는 아주 말끔하게 사라져있었다.
‘몸은 좀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왜인지 사야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강호는요?”
-크웅!
기다렸다는 듯이 금강호가 사야의 치맛자락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마한 호랑이가 반갑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심장을 잠깐 부여잡았다가 인사했다.
“강호 안녕!”
-크우!
어떡해! 너무 귀여워!
사야가 제 발 밑에서 금강호를 안아 올렸다. 금강호는 사야의 뺨에 얼굴을 비비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사야에게 물었다.
“리사 지금 아저씨들이랑 눈사람 만들고 있는데! 언니도 같이 만들래요?”
사야가 입술을 달싹였다.
거절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꼬리를 격하게 흔들고 있는 제 마수를 보고선 미소 지었다.
“그럴까요?”
***
귀수산 전체에 내려앉은 안개가 점점 옅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안개가 이렇게 걷힌 건 오랜만인 것 같군.’
머리칼에 붙어 있던 도깨비바늘을 모두 떼어낸 윤사해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두 눈덩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눈사람이라도 만드는 건가?’
할 일 없는 길드원들이 시간이나 때우려고 저러나 싶었지만, 곧 윤사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뭇가지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나는 딸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당근 하나를 들고 뛰어오는 아이도 보였다.
‘당근을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윤사해가 저세상의 모습을 보고선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아버지! 반성문 다 썼어요!”
“저도요!”
윤리오와 윤리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진짜로 사고 안 칠 게요! 그러니까 이만 나가 봐도 돼요?”
길드를 구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윤사해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들들의 반성문은 읽은 체 만 체였다. 그 고갯짓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환호하며 윤사해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저렇게 좋을까…….”
저리 좋아할 줄 알았으면 길드에 진작 데리고 올 것을 그랬다.
‘곧, 싫증이 나도록 길드를 드나들 테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매망량의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며칠이 지나면, 비나리 고등학교의 실습생으로 이매망량에 오게 될 터.
그때에 아들들은 이매망량의 길드원과 함께 조를 이루어 길드의 일을 배우게 될 거다.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제격인 사람은 당연 사야지.’
하지만…….
윤사해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명패 하나를 쳐다봤다.
아직 사야에게 돌려주지 않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 옆으로 두 장의 협조문이 놓여 있었다.
각각 아래아와 AMO로부터 온 것.
서로 다른 내용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누군가의 공조를 구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그 누군가의 침묵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를 읽는 윤사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