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녹아내린 봄(1)
눈이라니!
기상 캐스터가 벚꽃 개화 시기를 알려 준 게 바로 어제인데!
이러다 이번 봄에 벚꽃 못 보는 거 아니야?
정신없이 바깥을 구경 중인데, 윤리오가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눈 왔네?”
“응! 어떡해, 리오 오빠? 벚꽃이 피기도 전에 지겠어!”
윤리오가 내 걱정이 귀엽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리사. 오빠가 어릴 적에도 이런 식으로 눈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해 봄에 벚꽃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만개했었거든.”
그러니까 올 봄도 그럴 거라면서 윤리오는 나를 달랬다.
윤리타가 말했다면 그 진위 여부를 의심했겠지만, 화자가 윤리오니 믿기로 했다.
그때 윤리타가 크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하암, 눈 왔다고?”
바깥 풍경을 확인한 윤리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진짜네? 그것도 엄청 왔잖아? 애들 학교 갈 수 있을까? 못 갈 것 같은데.”
윤리타의 걱정에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목소리가 대꾸했다.
“학교에 연락을 해 봐야겠구나.”
“아빠!”
나는 후다닥 윤사해에게 달려갔다.
윤사해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윤사해는 어젯밤 느지막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서차웅에게 붙잡혀 서류를 처리한 결과였다. 그 때문인지 윤사해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생겼다, 우리 아빠.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희도 잘 잤니? 세상이는?”
윤리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말했다.
“아직 자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 일어났어요.”
저세상이 한쪽 눈을 비비고는 배꼽 인사를 했다.
“아저씨, 형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세상이 오빠, 리사는?”
“너는 잘 잔 것 같아서.”
저 자식이?
두 눈을 부릅뜨고 저세상을 노려보는데, 윤사해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저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윤사해의 폰이 울렸다. 윤사해가 한 쪽 팔로 나를 받쳐 안고는 화면을 켰다.
“빛나리 초등학교가 오늘 휴교라는구나.”
앗싸!
나는 두 손을 주먹 쥐고는 만세를 불렀다.
윤리오는 다행이라면서 윤사해에게 물었다.
“출근 괜찮으시겠어요?”
“나야 문제없지. 류화홍 헌터가 있으니.”
문제는 우리였다.
눈이 적당히 쌓였으면 다 같이 눈싸움이라도 하면서 놀았을 텐데, 내린 눈은 내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고사하고 잘못하면 집에 갇힐 것 같았다.
저 쌓인 눈이 얼기라도 해 봐! 누가 언제 어떻게 치우겠어?
윤리오가 나와 똑같은 걱정을 했는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출근하시면 눈부터 치워야겠어요. 지금 치워야지, 저대로 뒀다가 얼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그 말에 윤리타가 말했다.
“청해진 부를까? 눈도 대기 중의 수분이 얼어서 내리는 거잖아. 간단하게 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솔이 누나라면 몰라도 청해진은 안 돼. 아직 누나 정도의 스킬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하나뿐인 친구에 대한 평가가 냉정했다.
“그럼, 윤리오. 너하고 같이 삽질해야해?”
생각만으로도 싫다는 듯이 윤리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세상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도울게요.”
“리사도 도울게!”
윤리타가 나와 저세상의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너희 둘의 손을 빌릴 정도로 나랑 윤리오는 나약하지가 않거든.”
못미더운 말이었다.
윤리오라면 몰라도 윤리타는 눈을 치우는 도중에 나가떨어질 것 같단 말이지?
윤리오한테 더는 못해먹겠다면서 징징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착각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윤사해가 입을 열었다.
“눈은 저대로 두렴. 사람을 불러 치우게 하마.”
그러고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아빠랑 같이 길드에 가자꾸나.”
아주 놀랄 만한 말을.
나랑 저세상은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두 눈이 아주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으니 말이다.
그 모습에 윤사해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아들들에게 물었다.
“시… 싫니……?”
“그럴 리가요!”
윤리오와 윤리타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지금 당장 옷 갈아입을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빠!”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윤리오와 윤리타의 방문이 닫혔다.
윤사해가 닫힌 방문을 보다가 흐뭇하게 시선을 돌렸다.
“리사랑 세상이는?”
말해 뭐해!
“갈 거야! 무조건 갈 거야!”
“저도요!”
윤사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나와 저세상을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아침을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이매망량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우리 쌍둥이는.
“야! 윤리타! 그거 내 옷이잖아!”
“네 옷, 내 옷이 어디 있어? 네 게 내 거고, 내 건 내 거지.”
“야!”
많이 들뜬 모양이었다.
윤사해가 소란이 들려오고 있는 쌍둥이 아들들의 방을 향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리오, 리타. 싸우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렴. 아침은 먹고 가야하지 않겠니?”
아침부터 떠들썩한 우리 집이었다.
***
이매망량이 위치한 귀수산.
귀수산에도 계절에 맞지 않은 눈이 한가득 내렸다.
“아이고, 골병들겠다. 이 망할 눈! 꽃이 피어도 시원찮을 판에 눈이 내리고 난리야! 쯧.”
투덜대는 사람은 태운.
이매망량 내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길드원으로, 윤사해가 길드를 일으킬 때 흘러들어온 남자였다.
“어떻게 된 게, 이리 눈이 내렸는데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어?!”
아니지, 나온 사람이 있기는 하지.
태운은 건물 뒤편으로 이어지는 발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는 사람의 것이고, 하나는 짐승의 것이었다.
저 발자국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태운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곳, 이매망량에서 짐승과 함께 다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니.
태운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비질을 시작했다.
이매망량에 들어서는 대문에서부터 건물의 입구까지.
쌓인 눈을 태운 혼자서 치웠다.
“이 길드는 나 없으면 어떻게 될까 몰라? 길드장님 오시면 말 좀 해야겠어. 여기, 눈을 이리 치웠는데 인센티브 없냐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열심히 비질을 하던 태운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바로 폈다.
“어휴, 이리 눈이 내렸는데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구만.”
귀수산 바깥도 이런 날씨라면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을 터.
태운은 궂은 날씨에 쯧쯧 혀를 차며 다시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다다다-!
“……?”
아니, 하려고 했다.
정돈된 길을 따라 누군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이 아닌, 둘.
태운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을 살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명확한 형체를 띄었을 때.
“리, 리오 도련님? 리타 도련님?”
태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안녕하세요, 태운 아저씨!”
윤리오의 인사 뒤로 윤리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건강하게 잘 지내셨어요? 하나도 안 늙으셨네요!”
“치, 칭찬 감사합니다?”
태운이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거렸다.
아니, 잠깐. 도련님들이 왜 여기에 계신 거지?
태운의 머릿속에 뒤늦게 의문이 떠올랐다. 의문은 금방 해소가 되었다.
“태운! 애들 좀 잡게!”
“길드장님?”
윤리오와 윤리타의 뒤를 이어 이매망량의 주인인 윤사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품에 윤리사와 저세상을 안고서.
태운은 두 눈을 멀뚱멀뚱 끔벅이다가 윤리오와 윤리타를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
열심히 길을 닦아내고 있던 태운이 윤사해의 부르짖음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뒤를 쫓아갔다.
들고 있던 빗자루는 저 멀리 내팽개치고서 말이다.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미 안개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후우……!”
윤사해가 자리에 멈춰 서고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나는 그런 윤사해를 보며 말했다.
“아빠, 화홍이 오빠 다시 부르는 게 어때? 우리는 화홍이 오빠한테 맡기고 오빠들 잡으러 가 봐.”
류화홍은 우리 가족을 데려다준 뒤에 곧장 떠나 버렸다.
‘슬프게도 대학생에게는 휴교란 게 없답니다. 흑흑.’
……라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서 말이지.
내 말에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저씨. 아니면 저희끼리 있을게요.”
윤사해가 고민된다는 듯한 얼굴로 나와 저세상을 쳐다봤다.
윤사해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 길드장님?”
“광혜원 헌터!”
그에게 구세주가 나타난 까닭이다.
윤사해가 밝게 펴진 얼굴로 광혜원을 반겼다.
“웬일로 자네가 이 시간에 깨어있는가!”
“모처럼 일찍 출근했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어쨌든 마침 잘 왔네!”
윤사해가 나와 저세상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우리의 손을 하나씩 광혜원의 손과 맞잡게 하였다.
“리사랑 세상이 좀 부탁하겠네!”
그러고는 광혜원이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길드로 뛰어들어 갔다.
“리오! 리타! 거기서!”
윤사해의 입에서 들린 이름들에 광혜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을 왜 부르시는 거지? 잠깐, 설마…….”
광혜원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방긋 웃어 주었다.
“그 설마가 맞아요.”
“세상에.”
광혜원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길드장님께서 리사 아가씨랑 세상 도련님을 데리고 길드에 왔을 때, 언젠가는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도 데리고 오시겠거니 했지만 말이에요.”
“그런데요?”
“진짜로 데리고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진행한다는 실습 때나 오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광혜원이 이내 이유를 말해 줬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리오 도련님과 리타 도련님이 어릴 적에 친 사고가 굉장히 많대요.”
가볍게는 명패를 불태우는 것부터, 심하게는 윤사해의 집무실을 불태우는 것까지.
광혜원은 윤리오와 윤리타가 어릴 적에 이매망량에서 친 사고들을 쭉 나열해 줬다.
길드원들의 명패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듣긴 했지만, 집무실도 태웠어?
아니, 오빠들. 사고 친 스케일이 왜 이래? 내가 친 사고는 별것도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