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때 아닌 눈(2)
금강호는 사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떨기만 했다.
저기요, 금강호 씨?
저를 태우고 윤사해의 집무실을 호기롭게 부숴 버렸잖아요. 그 기세는 어디로 사라지셨나요?
나보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라는 건지, 두 눈만 데굴 굴리고 있는데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리 찾아와 주다니.〗
나요?
떨떠름한 얼굴로 랑야를 쳐다봤다. 하지만 랑야의 시선은 내가 아닌 금강호에게로 향해 있었다.
〖내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하찮은 미물인 너를 내 따님 곁에서 치우지 않는 건, 그만한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목소리의 끝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랑야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금강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네 쓸모는, 내 따님이 위험에 처했을 때 고기 방패가 되는 거야. 그런데……!〗
“랑야!”
나도 모르게 랑야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두 팔을 벌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애가 겁먹었잖아요! 그만해요!”
〖애?〗
랑야가 내 뒤를 흘긋거렸다.
금강호는 어느새 몸집을 줄이고선 낑낑거리며 우는 중이었다. 그에 랑야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작아진 금강호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랑야를 노려봤다.
랑야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 내 따님의 하찮은 미물께서 든든한 아군을 얻으셨군.〗
저 아저씨가 진짜!
그보다, 뭐?
나는 랑야가 계속해서 언급했던 ‘내 따님’이란 단어에 뒤늦게 주목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단어에 알맞은 사람은 한 명뿐이다.
금강호의 주인, 사야.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윤사해가 랑야의 어깨를 잡았다.
“랑야, 리사 말대로 그만 하게. 지금 괜히 강호에게 화풀이를 하는 중이지 않나.”
〖내가 언제 화풀이를 했다고.〗
“그리고 리사 앞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그만하고.”
〖내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해도 네 따님께서는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
윤사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굽히고선 나와 눈을 맞췄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니, 리사? 세상이는 어쩌고?”
저세상은 지금 복도 한복판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중일 거다.
나는 저세상의 안부를 묻는 윤사해의 질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선 말했다.
“이거!”
“……?”
내가 내민 건 금강호가 토해낸 구슬이었다.
“강호가 나한테 준 거야! 중요한 거 같아서 아빠한테 보여 주려고 찾아왔어!”
“기특하구나, 우리 딸.”
윤사해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구슬을 받아들었다.
〖이리 줘 봐.〗
그리고 곧장 랑야에게 빼앗겼다.
랑야가 붉은 빛이 도는 작은 구슬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마수를 극도로 흥분케 하는 물건이군.〗
저 구슬이 뭐였나 하니, 캣닢 같은 거였나 보다. 랑야가 금강호를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하찮은 미물 녀석, 이걸 먹었나 보지? 그리고 눈이 돌아가서 내 따님을 공격했을 테고. 그렇지?〗
-끼잉.
랑야의 매서운 눈초리에 금강호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금강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애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온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금강호를 신경 쓰는 건 나뿐이었다.
윤사해는 랑야의 말에 턱 언저리를 쓸고는 말했다.
“일단, AMO에 연락을 취해야겠군. 그 전에…….”
〖윤사해. AMO고 자시고 내 따님을 공격한 빌어먹을 새끼를 바로 쳐야지!〗
랑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윤사해의 말을 끊었다.
윤사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랑야, 내가 말한 녀석이 사야를 공격한 것이 맞는지 아직 확실치 않네. 그리고.”
윤사해가 랑야가 들고 있는 작은 구슬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그딴 걸 가지고 이딴 일을 벌일 놈이 아니네. 만약 그렇다고 해도 10년 전과 매우 다른 행보를 보이는 건데, AMO 측에 알려 줘야지.”
윤사해와 랑야는 이미 ‘중’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친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씰룩였다.
암만 봐도 사야를 공격한 건 탈쟁이 녀석인 것 같은데 말이야.
그냥 바로 유랑단 쪽을 공격하면 안 되나?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윤사해라면 우리를 충분히 노릴 수 있는 강자지. 윤사해뿐만 아니라, 아래아의 최설윤도. 그리고 장천의와 로저 에스테라까지.’
‘하지만 봐봐. 내가 이곳에서 나고 이렇게 자랄 때까지 유랑단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어.’
양반, 그와 나눴던 대화였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명맥이 왜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을까요? 4대 길드의 사람들은 왜 저희를 소탕하지 않고요.”」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이 받았던 질문.
나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사야를 공격한 범인은, 누가 봐도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인 ‘중’으로 보였다.
일전, 아래아의 최설윤이 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 있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윤사해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건…….
“세상에, 화홍아! 죽었니? 안 죽었지? 안 죽었으면 어서 일어나 봐!”
찰싹찰싹.
누군가 뺨을 맞는 소리에 생각이 멈췄다.
나는 슬쩍 바깥을 쳐다봤다. 류화홍이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광혜원과 저세상이 있었는데, 광혜원이 끊임없이 류화홍의 뺨을 때리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류화홍. 금강호를 붙잡는데 실패했지. 그 과정에서 바닥이랑 부딪치기라도 했나?
그러지 않고서야 기절할 리가 없는데.
“류화홍! 일어나 보라니까?”
광혜원의 쨍한 목소리 뒤로 저세상이 말했다.
“윤리사는 어디 있어요, 화홍이 형? 어서 일어나 봐요!”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윤사해가 바깥의 소란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부서진 문을 우지끈, 완전히 떼어내고는 말했다.
“광혜원 헌터. 문이 부서진 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앗… 길드장님…….”
광혜원이 쭈뼛거리며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윤사해는 저세상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상아. 형을 그렇게 때리면 안 되지.”
저세상은 우물쭈물하며 류화홍의 뺨을 때리고 있던 손을 감췄다.
그러는 동안에도 류화홍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사해는 두 눈을 꼭 감고 기절해 버린 류화홍을 보고선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광혜원 헌터, 우리 애들 좀 잠깐 봐 주게.”
“나가시려고요?”
“사야가 어디서 금강호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확인 좀 하려고 하네.”
광혜원이 몸을 움찔거렸다.
“강호가 사야 님을 공격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윤사해가 구체적인 건 묻지 말라는 듯이 그리 말했다.
“리사, 세상아.”
윤사해가 커다란 손을 들어 나와 저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단다.”
“응!”
“네!”
우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사해는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랑야가 따랐다.
그러나 랑야는 윤사해의 집무실을 완전히 나가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나 했더니.
〖하찮은 미물 녀석아, 내 따님께서 잘못되면 너는 그 날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금강호에게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경고라기보다는, 위협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끼잉, 이잉.
금강호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벌벌 떨었다.
나는 작은 호랑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랑야에게 말했다.
“애 그만 괴롭히고 어서 아빠 따라서 가기나 해요!”
랑야는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를 떠났다.
랑야가 윤사해와 함께 떠난 뒤에도 금강호는 벌벌 떨며 내 품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세상이 두려움에 잔뜩 몸을 떨고 있는 불쌍한 마수를 보며 물었다.
“이제 그만 내려놓지?”
“너는 그런 말이 나와? 애가 무서워서 떠는 거 안 보여?”
“응, 안 보여.”
눈은 장식인가 보다.
나는 저세상을 향해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려 주고는 광혜원을 보았다.
“혜원이 언니. 사야 언니는 괜찮아요? 보러 갈 수 있어요?”
“네, 지금쯤 깨어나셨을 것 같네요. 강호 때문에 그러세요?”
“네.”
우리 불쌍한 호랑이, 주인한테 데려다 주려고요.
그런데 사야가 금강호를 안 만나려고 하면 어쩌지?
윤사해와 랑야의 말을 들어보니, 금강호가 사야를 공격해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같았는데.
***
그런 내 걱정은 기우였다.
“강호.”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야가 금강호를 보자마자 다정하게 자신의 마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금강호가 사야의 부름에 단숨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사야 님, 일어나셨으면 저를 부르시지!”
광혜원의 말에 사야가 눈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에 일어났답니다. 혜원 씨가 치료해 준 거죠? 고마워요.”
광혜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 비서님은요? 사야 님 좀 보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길드장님께 연락을 넣으러 가셨답니다. 강호로 하여금 저를 공격하신 분을 찾고 계실 것 같아서요.”
사야가 그렇게 말하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걸 보니, 서 비서님의 연락이 조금 늦은 것 같군요.”
“안타깝게도요. 그보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네, 혜원 씨의 치료가 워낙 좋아서요.”
사야가 광혜원과 너스레를 떨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데, 금강호가 울기 시작했다.
-끼이잉……!
“울지 마요, 강호. 저 괜찮아요.”
사야가 제 마수를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손길에 안심이 됐는지, 금강호는 더욱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강호, 누가 보면 제가 죽는 줄 알겠어요. 그만 뚝해요, 뚝.”
그럼에도 금강호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그러자 사야가 곤란한 듯 난처한 미소를 보였다.
아직 부상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한 듯, 파리한 안색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랑야가 많이 혼냈어요, 언니.”
“네?”
“언니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면서 랑야가 강호를 엄청 혼냈거든요. 그게 많이 무서웠나 봐요.”
사야가 눈가를 찡그렸다.
“역시, 아버지가 찾아오셨었나 보네요.”
지금은 돌아갔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목소리였다. 때문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랑야는 아직 안 돌아갔는데.”
“아직 안 돌아가셨다고요……?”
“응! 우리 아빠랑 같이 귀수산 바깥으로 나가셨어요!”
내 말에 사야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짓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