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때 아닌 눈(1)
이매망량 내에 마련되어 있는 놀이방에는 몇 달 전보다 더 많은 장난감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난감뿐만 아니라 수십 권의 책도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중 하나를 골라잡아 자리에 앉았다. 그때 저세상이 내 옆에 앉고는 물었다.
“그 누나랑 잘 아는 사이야?”
“응?”
“사야…… 라고 했던 누나 말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몰라. 하지만 아빠랑은 잘 알고 있는 사이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아저씨네 길드원이니까.”
저세상이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리 말했다. 나는 괜히 입술을 씰룩였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저세상은 나와 마찬가지로 책 하나를 꺼내고는 입을 열었다.
“그 누나는 괜찮을 거야.”
느닷없이 들려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윤리사, 네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
저세상의 눈에는 내 모습이 그리 비쳐졌나 보다.
물론, 많이 놀랐고 걱정도 했다.
사람이 그렇게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크게 들었던 것은 의문이었다.
누가 이매망량의 길드원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답을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 누나 옆에 돌아다니던 마수 봤지? 금강호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네.”
“맞아, 금강호.”
“그래, 걔가 사야 누나 곁에 있었잖아. 중은 절대로 먼저 사육사를 죽이지 않아. 그 사육사의 마수를 먼저 죽이지.”
오호, 중에 대한 정보 하나가 추가됐다.
그보다 우리 주인공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난 회차의 이야기를 말해 주시네?
저세상이 책을 펼쳐 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누나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윤리사. 상처도 그리 깊어 보이지는 않으셨고.”
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세상이 오빠는 지금 사야 언니를 그렇게 만든 범인이 중이라는 거지?”
저세상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불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금강호가 죽지 않는 이상, 사야 언니는 죽지 않을 거란 말이고? 그렇지?”
다르게 말하면, 금강호가 죽는다면 사야는 죽을 거란 말이었다.
저세상은 나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펼치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이 오빠는 도대체 모르는 게 뭐야? 구구단 말고.”
“시끄러. 그리고 나 구구단 이제 잘 외우거든?”
“9 곱하기 3 은?”
“18.”
이 자식이?
들고 있던 책을 저세상에게 냅다 던질 뻔했다.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
빌어먹을 탈쟁이 새끼가 사야를, 정확히는 윤사해와 인연이 깊은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책을 덮었다. 그 순간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
사야가 곁에 데리고 다니던 거대한 호랑이. 그녀의 마수, 금강호가 내는 소리였다.
헐, 뭐야. 호랑이가 방문을 열었어.
***
금강호가 아이들이 있는 놀이방의 방문을 열고 있을 때, 류화홍은 길드 곳곳에 떨어진 핏물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후우…….”
열심히 길드를 청소 중이던 류화홍이 밀대를 지지대처럼 삼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얀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사야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괜찮으실까?’
괜찮으셔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누군가 류화홍을 불렀다.
“화홍아.”
“혜원이 누나!”
이매망량 내에서 가장 뛰어난 힐러, 광혜원이었다.
류화홍이 그녀에게 조르르 달려가서는 물었다.
“사야 님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하나씩 좀 천천히 물어봐!”
안 그래도 사야를 치료하느라 힘을 다 쓴 참이었다. 광혜원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다행히 크게 부상을 입으신 곳은 없어서 금방 깨어나실 것 같아.”
“하지만 정신을 잃으셨잖아요!”
“그건…….”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사야의 머리 부근에 나 있던 상처를 떠올렸다.
짐승의 앞발에 할퀴어진 듯 나 있던 상처. 사야는 아마 그것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 짐승은 한 마리뿐이지.’
광혜원이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보다 강호 못 봤니?”
“같이 갔던 것 아니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광혜원은 옆구리에 팔을 얹고는 말했다.
“이 녀석은 제 주인 곁에 붙어 있을 것이지,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러다 랑야 님 만나면 어쩌려고!”
“랑야 님은 왜요?”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해도 사야 님께서 저렇게 정신을 잃으셨잖아. 그걸 랑야 님이 모르실까 봐?”
“아…….”
류화홍이 탄식했다.
거주자는 자신의 피를 타고난 후손의 안위를 언제든 느낄 수 있었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그들이 제 자식들의 안부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마 지금쯤 길드장님께서 랑야 님을 밖으로 불러내셨을 거야.”
“강호를 빨리 찾아야겠네요. 괜히 랑야 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그때였다.
“흐아아앙!”
“야! 호랑이! 멈춰!”
2층,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인영들도 아주 똑똑하게 보였다.
광혜원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류화홍에게 물었다.
“뭐, 뭐야? 방금 뭐였어?”
“리… 리사 아가씨랑 강호요. 금강호…….”
그 말에 광혜원이 입을 쩌억 벌렸다가 소리 질렀다.
“뭐 하고 있어?! 어서 가서 붙잡아! 저러다 아가씨랑 도련님 다치면 우리 둘 다 죽어!”
“악! 알았어요!”
광혜원에게 한 대 얻어맞은 류화홍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이 미친 호랑이!
나는 금강호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야! 호랑이! 멈추라니까?!”
저세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이 왜 이렇게 됐지? 어쩌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게 된 거람?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렸다.
***
사건의 발단은 금강호가 나와 저세상이 있는 놀이방으로 찾아온 것.
꼭꼭 닫혀 있던 문을 호랑이가 연 것도 신기한데, 마수는 그대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었다.
나는 놀라 금강호에게 다가가서는 둥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랑아, 왜 울어?”
금강호와 나의 사이는 좋다고는 말 할 수는 없었다.
그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 망할 호랑이는 나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고.
하지만 짐승이, 아니. 마수가 흘리는 닭똥 같은 눈물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사야 언니 때문에 그래? 언니 괜찮을 거야. 울지 마.”
내 위로가 통했는지 몰라도, 금강호가 앞발을 들고선 제 눈가를 스윽 닦았다.
그러고는.
-켁! 케엑!
뭔가를 입에서 토해냈다.
“호랑아?!”
기겁하며 금강호에게 다가가려는데, 저세상이 곧장 내 팔을 잡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나는 저세상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그의 손을 꼭 잡고선 물었다.
“세상이 오빠! 이매망량에 수의사 없지?”
“여기에 수의사가 왜 있어! 그리고 쟤는 마수야, 마수! 동물이 아니라고!”
저세상이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는 금강호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호랑이는 낑낑거리며 자신이 토해낸 구슬을 우리에게 슬쩍 내밀었다.
그에 나는 저세상의 뒤에서 고개를 빼곰 내밀고는 금강호에게 물었다.
“호랑아, 우리한테 주는 거야?”
-끼이잉.
금강호가 맞는다는 듯이 우는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호랑이에게 다가갔다.
“야, 윤리사. 위험해.”
“아니야, 안 위험해.”
나를 위협하려면 진작 위협했겠지. 그리고 설사 그럴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뺨 한 대 때리고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금강호가 토해낸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으음, 뭔지 모르겠는데.”
금강호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하지만 아빠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끼잉?
“그러니까 이거.”
윤사해에게 가서 보여 주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응……?”
“엇……?”
순식간에 몸이 들렸다. 금강호가 내 옷 뒤를 물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망할 호랑이는 그대로 나를 등에 태우고선 내달리기 시작했다.
“흐아앙! 세상이 오빠!”
“야! 윤리사!”
나와 저세상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다.
저세상은 뒤쳐진 지 오래였고, 나는 울상으로 금강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망할 호랑이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두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내 팔이 너무 짧았다.
‘위험하기도 하고.’
도대체 이 망할 호랑이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때였다.
“강호! 스탑!”
“화홍이 오빠!”
하지만 류화홍은 금강호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커다란 문이 호랑이의 몸통 박치기에 활짝 열려 버렸기 때문이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금강호의 등에 올라탄 채 방 안으로 들어서게 됐다.
“이… 이게 무슨…….”
들어선 방은 윤사해의 집무실이었다.
깜짝 놀란 듯, 윤사해는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의 주위로 일렁거리는 반투명한 그림자는 덤이었다.
윤사해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금강호의 등에 올라타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사?”
“히힛, 아빠 안녕.”
나는 윤사해를 향해 어색하게 인사해 주고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서도 인사했다.
“랑야도 안녕.”
〖허, 나참.〗
랑야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망할 호랑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