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맞이한 봄에서(3)
사야가 귀수산을 벗어나 향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윤사해는 그녀에게 귀수산을 ‘절대로’ 벗어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사야는 그렇게 했다.
가족과 다름없는 제 마수, 금강호가 답답함을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귀수산에만 있었을 거다.
-끼이잉, 이잉!
“왜 그래요, 강호. 나왔잖아요.”
사야가 작은 곰 인형 정도로 몸집을 줄인 금강호를 안아 들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건 안 된답니다. 사람들이 없다면 몰라도요.”
-끼이잉…….
금강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야는 풀이 죽은 제 마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에 한 번 더 나오죠. 그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드릴게요.”
금강호는 그제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기분이 풀어진 제 마수의 모습에 사야가 미소를 그릴 때였다.
가까이서 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아이고,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저기 앉고 싶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히힛.”
사야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편하게 앉으시기를.”
어차피 곧 일어날 생각이었다. 사야의 대답에 더벅머리의 남자가 헤실거렸다.
“아휴, 친절하셔라. 고맙수다.”
남자는 왼쪽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그는 품에서 소주를 꺼내 병째로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이라니.
이매망량에서 흔히 보던 광경이었지만,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마시는 건 보지 못했다.
사야가 놀란 눈으로 남자를 볼 때였다. 남자가 사야에게 반쯤 남은 소주를 들이밀었다.
“한 잔 하시렵니까?”
“아니요.”
사야는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려던 참이라.”
“아쉽구만.”
남자가 킬킬거리고는 다시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사야는 질린 눈을 하고는 금강호와 함께 자리를 떴다. 남자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봐요, 아가씨.”
사야가 걸음을 멈추고선 남자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를 떨어뜨리셨는데?”
남자의 손에는 진주와 닮은 붉은 보석이 들려 있었다. 사야는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것이 아니랍니다.”
저런 장신구는 착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크르릉…….
“강호?”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제 마수가 순식간에 모습을 키웠고.
-크아앙!
“강호!”
금강호는 순식간에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
푸드득-!
이름 모를 새들이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날씨 한 번 죽여준다.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제 아이들이 잘못한 건 없군요.”
담임 선생님인 백장미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윤사해가 입을 뗐다.
윤사해의 말에 백장미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백장미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내 죄는 단이가 우신우를 죽일 듯이 패는 걸 말린 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윤사해를 부를 일도 아니었는데 내가 그 과정에서 조금 다치는 바람에 아빠가 오고 말았다.
윤사해가 내 뺨에 붙은 반창고를 조심스럽게 만지고는 말했다.
“그래도 애들이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오늘 일찍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선생님?”
백장미가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준비물은 문자로 보내놓을게요, 아버님.”
“네, 감사합니다. 리사, 세상아. 책가방 챙겨서 나오렴.”
“네에!”
나와 저세상은 백장미에게 배꼽 인사를 한 뒤 교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신우가 복도에서 혼이 나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부모님이 우리를 붙잡아 사과하려고 했지만.
“크흠, 음.”
윤사해의 눈초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신우의 부모님은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자마자 도윤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리사야, 괜찮아? 세상이 형도 괜찮아요?”
“응, 나는 괜찮아. 윤리사가 다쳐서 문제지.”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조금 긁혔던 것뿐인 걸? 다친 것도 아니야!”
“그치만…….”
“나는 정말 괜찮아, 도윤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보다 단아는? 단아는 아직 안 왔어?”
“응, 아직 안 왔어.”
단아는 교장실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고, 단아는 한태극 의원과 함께 교장 선생님과 즐거운 면담 시간 중인 것 같았다.
“윤리사, 빨리 나가자.”
“응. 안녕, 도윤아. 내일 보자!”
도윤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도윤이만 두고 교실을 나서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윤사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교실을 벗어나 윤사해에게로 달려갔다.
“아빠!”
“리사.”
윤사해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속상하다는 듯이 내 뺨을 쳐다봤다.
나는 배시시 웃고는 윤사해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빠, 미안해.”
“응?”
“가랑이 사이를 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저세상이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윤사해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단다, 리사. 세상이 오빠를 위해 나서 준 것만으로도 큰일을 했는걸? 하지만 다음에는 아빠가 말했던 대로 꼭 때려 주렴.”
“응!”
내가 꼭 그 자식 후손을 끊어 줄게!
윤사해가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저세상에게 말했다.
“세상이, 너도.”
“네?”
“내가 보호하기로 한 이상, 너는 내 아이나 다름없단다. 그런데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저세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윤사해는 그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다음에도 그 자식이 그딴 식으로 말하면 가랑이 사이를 차 버리렴.”
“가, 가랑이 사이를요?”
“그래. 알겠니, 세상아?”
저세상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윤사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럼, 이매망량으로 가자꾸나. 너희를 돌봐 줄 사람이 따로 없어 지금은 길드로 가야겠구나.”
그 말에 나는 환호했다. 저세상 역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기쁜 듯이 보였다.
이매망량에 지금 몇 달 만에 가는 거지? 두 달? 석 달? 반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아빠, 빨리 가자!”
나는 윤사해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어대며 그를 재촉했다.
“그래, 알았단다.”
윤사해가 그렇게 좋으냐면서 웃었다.
당연히 좋지! 길드원들이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환영해줄까?
나는 윤사해의 <[S, 숙련 불가] 장승 행차>를 통해 형성된 안개 속을 거닐면서 설렘을 가득 안았다.
그렇게 도착한 귀수산.
이매망량은 여느 때와 똑같이 떠들썩했다.
“광혜원 헌터! 사야 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서 비서님은 길드장님께 어서 연락이나 넣어요! 아니다, 화홍아! 네가 길드장님께 좀 다녀와!”
그 떠들썩함이 좋은 의미로 그런 것이 아니라서 문제였지.
서차웅의 품에 누군가 안겨 있었다. 온몸에 상처를 잃고 정신을 잃은 여자.
사야였다.
“이게, 무슨……!”
사야를 품에 안고 있던 서차웅이 윤사해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를 치켜들었다.
“길드장님!”
윤사해가 류화홍에게 우리를 맡기고선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사야가 왜 이렇게 된 것이야!”
“저희도 몰라요! 강호가 바깥에서 시끄럽게 울어대서 무슨 일인가 해서 봤더니…….”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에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웬 커다란 호랑이가 사야의 주변을 연신 맴돌고 있었다.
광혜원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고는 말했다.
“급한 조치는 끝냈어요. 일단 길드 안으로 옮기죠.”
윤사해가 사야를 번쩍 안아 들고는 말했다.
“류화홍 헌터, 우리 애들 좀 잘 부탁하겠네.”
“네, 길드장님.”
그렇게 답하는 류화홍의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얼굴 역시 창백하게 질려서는 누가 보면 금방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류화홍의 손을 잡고 그를 안심시켰다.
“오빠, 혜원이 언니가 괜찮다고 했잖아. 사야 언니 괜찮을 거야.”
괜찮다고는 안 했지만, 급한 조치는 끝냈다고 했으니까 말이지.
내 말에 류화홍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맞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러고는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이 그는 활짝 웃으면서 나와 저세상을 안아 들었다.
“우리도 들어갈까요? 안에 맛있는 거 많아요. 아가씨랑 세상이가 길드에 놀러 오면 주겠다고 다들 맛난 걸 많이 사 놓았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단숨에 풍경이 뒤바뀌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건, 길드 곳곳에 뚝뚝 떨어져 있는 붉은 핏물.
류화홍이 나와 저세상을 내려 주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네요. 아가씨랑 도련님은 먼저 올라가서 놀고 있으실래요? 금방 갈게요.”
“으응.”
우리는 쭈뼛거리다가 서차웅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놀이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류화홍을 흘긋거린 건…….
그의 뒷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