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찾아온 겨울(3)
CW백화점, 6층을 벗어나기 직전 윤사해를 부른 사람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적당히 다듬은 검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핏빛보다도 붉은 눈을 찡그렸다.」
최설윤.
아래아의 길드장이었다.
“최설윤 길드장?”
윤사해가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최설윤이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지? 애들이랑 같이 쇼핑 나왔나 보네? 안녕, 얘들아?”
“아, 안녕하세요…….”
나와 저세상은 쭈뼛거리며 최설윤에게 인사했다.
최설윤이 그런 우리들이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고는 뒤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최화백, 너도 애들한테 인사해야지? 멀뚱히 서서 뭐해?”
최설윤의 조카 최화백.
『각성, 그 후』에서 청해솔과 동갑으로 나왔으니, 그의 나이는 지금 스무 살일 거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최화백이 윤사해에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하세요, 윤사해 길드장님.”
“윤사해 길드장한테만 인사하는 거야? 애들한테는 안 해?”
“후우…….”
최화백이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우리에게 인사했다.
“안녕.”
짧고 간결한 인사였다. 최화백은 그대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설윤이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너희가 이해해. 쟤가 아직 사춘기거든.”
“고모.”
최화백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최설윤을 말렸다. 최설윤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였지만 어깨만 으쓱였다.
그때 윤사해가 말했다.
“최설윤 길드장, 자네는 뭣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선물 사러 왔어. CW에서만 취급하는 물건인데, 유영점에 딱 하나 남아 있더라고.”
최설윤이 윤사해에게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 하나를 보여 주고는 웃었다.
“우리 애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지? 걔 내일 복귀하거든.”
“흐음, 그대로 길드를 나갈 줄 알았더니.”
“아주 악담을 하지 그래?”
최설윤이 얼굴을 찌푸리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내일 복귀한다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암만 봐도 길드원인 것 같단 말이지. 애는 저기 있으니.’
내가 가리킨 애는 최화백이었다.
최화백은 최설윤이 윤사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관심 밖이라는 태도였다.
‘훗날, 최설윤이 자신의 다음 후계자로 지목하는 게 최화백인데…….’
지금 모습만 보면,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윤사해는 최설윤과의 만남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계속 나와 저세상을 흘긋거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우리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고 싶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최설윤은 계속 재잘거렸다.
“내가 그저께 AMO에서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알아? 땡중 새끼 그만 쫓으라는 연락을 받았었어!”
“최설윤 길드장, 여기 애들도 있다네. 말조심 좀 하게나.”
“아참, 그랬지.”
윤사해가 최설윤의 바르고 고운 말을 지적했다.
그보다 땡중이라니.
‘유랑단의 중을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대화 중간중간에 마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으니 말이다.
『각성, 그 후』에서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탈쟁이가 이맘때쯤에는 활개를 쳤었나 보구나?
최설윤의 입에서 언급된 탈쟁이의 이름에 저세상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중이 『각성, 그 후』에서 다른 탈쟁이들보다 사회에 끼친 해가 적다고는 하나 그 역시 ‘탈’이었다.
‘중의 별명은 마수 사냥꾼.’
마수를 기르는 사육사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라고 했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사야.
거대한 호랑이를 마수로 기르고 있던 이매망량의 길드원이었다.
『각성, 그 후』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설마, 이때 중한테 당했다던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에이, 설마.
……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는, 아니. 『각성, 그 후』에서는 ‘설마’가 사람 잡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어.’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돌아가자마자 검색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최설윤의 입은 쉴 새가 없었다.
그렇게 윤사해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을 때 타이밍 좋게 전화가 왔다.
“잠깐만, 윤사해 길드장. 나 전화 좀 받고.”
최설윤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윤사해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우리를 데리고 후다닥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최설윤이 윤사해를 붙잡았다.
“에헤이, 지금 어디 가려고? 응, 미안. 지금 윤사해 길드장이랑 있어서. 갑자기 왜? 뭐……?”
최설윤이 윤사해의 코트 자락을 놓아 주고는 입을 뻐금거렸다. 그것도 잠시.
“죽기는 누가 죽어?!”
그녀가 경악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최설윤의 쨍한 목소리가 CW백화점 6층 로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줄곧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던 최화백이 폰을 집어넣었다.
최설윤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 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전화기 건너의 상대방에게 말했다.
“알았어, 지금 갈게.”
탁, 최설윤이 전화를 끊고는 윤사해에게 말했다.
“윤사해 길드장,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자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 보게. 급한 일인 것 같은데.”
꽤나 급한 일인지, 최설윤은 윤사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고모! 같이 가야지!”
최화백이 허겁지겁 윤사해에게 인사하고는 최설윤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우리끼리만 남게 됐다.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와 저세상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얘들아.”
“아니야! 리사는 저 언니 이야기 듣는 거 좋았어!”
“언니가 아니라 최설윤 길드장님.”
저세상이 최설윤의 호칭을 정정해 줬다. 나는 저세상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저세상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윤사해가 저세상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면, 최설윤은 그에게 있어 스승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윤사해가 저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게 물었다.
“듣고 있었니, 리사?”
“응! 땡중 새끼가 최설윤 길드장님의 길드원을 공격했고, 그래서 최설윤 길드장님이 엄청 화나서……!”
“리사, 그만. 조금 전에 뭐라고 했니? 새끼?”
헉, 망했다.
오랜만의 외출에다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나서 나도 모르게 들떴나 보다.
하지만 무너진 천장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지.
나는 방긋 웃었다.
“리사는 최설윤 길드장님이 말씀하신대로 말한 것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파더?
윤사해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순진무구한 척 배시시 웃어줄 뿐이었다.
결국 윤사해는 나를 추궁하는 것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었다.
“학용품 사러 가자꾸나.”
“응!”
그렇게 말한 윤사해는 은근슬쩍 무기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림도 없지!
나와 저세상은 그런 윤사해를 억지로 학용품이 즐비한 곳으로 데려갔다.
우리의 쇼핑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고, 돌아온 집에는.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리사, 세상아. 쇼핑은 잘했어?”
“잘했겠지! 사 온 것 좀 보자, 얘들아!”
윤리오와 윤리타가 도서관에서 돌아와 있었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나는 곧장 윤리오와 윤리타에게로 달려갔다. 윤리오가 윤리타를 옆으로 밀치고서 나를 안아들었다.
“윤리오! 치사하게!”
“밀친다고 밀쳐진 네 잘못이지.”
윤리오가 윤리타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오늘도 우리 쌍둥이 오라버니들은 참으로 사이가 좋았다.
윤리타가 윤리오의 놀림에 불퉁해하려는 찰나, 윤사해가 두 아들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리오, 리타.”
그러고는 둘에게 백화점에서 사 온 것을 내밀었다.
듣기로는 12공방에서 특수 제작한 방어 아이템이라던데, 어떤 효과를 달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억을 호가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좋은 아이템일 거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그 수억 짜리 아이템을 흔쾌히 결제하는 윤사해의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윤리오와 윤리타가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윤사해가 그런 아들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길드에서 보기를 기대하마.”
윤사해의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나는 부디 윤리오와 윤리타가 윤사해와 함께 이매망량에서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랐다.
***
다행히도 윤리오와 윤리타는 이매망량의 시험을 통과했다. 정확히는, 시험 합격이 기정사실이 됐다.
가채점 결과, 합격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가채점을 확인한 즉시 환호성을 내질렀었다.
‘우와! 윤리오, 우리도 이제 명패를 가질 수 있어!’
‘앗싸! 아버지한테 지금 당장 달라고 하면 안 될까?’
‘한 번 여쭤볼까?’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러다 마킹 실수해서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될 수준이었다.
어쨌든.
“윤리사! 여기 좀 봐봐, 사진 한 번 더 찍자!”
“윤리타, 리사 좀 귀찮게 하지 마.”
“에이, 뭐 어때? 아직 식이 시작되지도 않았잖아. 세상아, 리사랑 같이 사진 찍지 않을래?”
“저는 괜찮아요.”
그건 월요일의 일이었고, 오늘은 이틀이 지난 수요일이다.
2월 24일, 2월의 마지막 주.
자라나리 유치원의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란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