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찾아온 겨울(1)
10월 6일의 가을 운동회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저세상의 받아쓰기 점수가 70점을 넘어 90점을 넘보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는 동안 첫눈이 내렸고 어느새 한 해의 막바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빠! 리사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리사.”
윤사해가 나를 멈춰 세우고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목도리랑 장갑 좀 하자꾸나.”
“답답해서 싫은데!”
“그래도 감기 안 걸리려면 해야지. 안 그러면 주사 맞으러 가야한단다.”
나는 얌전히 목도리도 하고 장갑도 꼈다.
윤리타가 그런 나를 보고는 키득거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리타, 너도 해야지. 리오도.”
윤사해는 쌍둥이 아들들에게도 손수 목도리를 둘러 주고 장갑을 끼워졌다.
윤리오가 장갑을 낀 손을 몇 번 움직이다가 꿍얼거렸다.
“불편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갑을 벗지 않는 윤리오였다. 윤사해가 윤리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산도 챙겨가렴. 오후에 눈 온다고 하더구나.”
“그래요? 윤리타, 아버지 말씀 들었지? 네가 우산 좀 챙겨.”
“너는?”
“나는 리사 챙겨야지.”
윤리오가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윤리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 참.”
현관문을 열려던 윤리오가 몸을 돌려 저세상을 보았다.
“세상아, 오늘은 100점 기대해도 될까?”
“네?”
윤사해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저세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톱 끝을 뜯으며 말했다.
“네에.”
하는 행동을 보니 100점은 무슨, 어제처럼 90점만 받아도 감지덕지일 것 같았다.
윤사해가 귀엽다는 듯이 저세상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인사했다.
“다녀오렴.”
“네, 아버지. 아버지도 어서 출근 준비하세요.”
윤리오의 말을 뒤이어 윤리타가 해맑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희는 진짜로 다녀오겠습니다! 세상아, 집 잘 보고 있어!”
“네, 형.”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저세상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저세상에게 손을 흔들어줄까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문이 닫혀 버렸다.
그렇게 나선 등원 길.
“윤리사, 이제 곧 졸업이네?”
윤리타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놀렸다. 그에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아직 멀었거든?”
“곧이잖아, 곧.”
그러면서 윤리타는 말했다.
“우리 리사, 초등학교 가면 적응 잘 하려나 모르겠네. 화장실도 혼자 가야하고, 혼자서 밥도 척척 먹어야 할 텐데.”
“리사는 잘 할 수 있거든!”
“퍽이나.”
윤리타가 피식 웃으면서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나는 그대로 두 손을 들어 이마를 덮으며 울먹거렸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가 리사 때렸어!”
“그랬어? 혼내 줘야겠네.”
윤리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고는 윤리타의 발목을 걷어찼다.
“악! 윤리오……!”
“그러게 애를 왜 때려?”
윤리오는 윤리타에게 혀를 날름거려 주고는 말했다.
“그리고 리사 혼자 초등학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놀려? 리사, 초등학교에는 세상이 오빠도 같이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첫째 오라버니.
저세상과 함께 초등학교를 가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이랍니다.
저세상은 나와 함께 1학년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확정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이제야 한글을 뗀 수준이니.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사야!”
“도윤아!”
나는 윤리오의 품에서 빠르게 내려와 도윤이에게로 달려갔다.
도윤이는 백시진과 함께였다. 백시준을 대신해서 도윤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진이 아저씨!”
나는 백시진에게 배꼽 인사했다. 내 뒤를 따라 윤리오와 윤리타도 백시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진이 삼촌. 오랜만이에요.”
“도윤이 데려다주러 오셨나 봐요?”
윤리타는 도윤이를 친근하게 부르면서도 눈에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에헤이, 둘째 오라버니. 눈에 힘 좀 풀어. 우리 도윤이 겁먹었잖아.
윤리타의 말에 백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그간 잘 지냈니?”
“네, 삼촌은요?”
“나야 잘 지냈지.”
백시진이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살폈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네. 백도윤, 리사랑 싸우지 말고 잘 놀고 있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네에!”
도윤이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는 백시진을 붙잡았다.
“아저씨, 잠깐만요.”
“응?”
윤리오랑 윤리타의 정신은 나와 도윤이를 마중 나온 유치원 선생님께 팔려 있었다.
나는 쌍둥이의 눈치를 살피면서 백시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인 언니랑 잘 지내고 계시죠?”
백시진이 얘가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였다가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 대답에 나는 방긋 웃었다.
“우와! 언니랑 잘 지내고 계신다니 다행이에요! 그러면요, 아저씨. 혹시 언니 친구 분 기억나세요?”
“제인의 친구라면…….”
백시진이 미간을 좁혔다.
“설아 씨?”
“네, 맞아요! 제인 언니랑 엄청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 잊고 계셨나 보네요?”
백시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언니 얼굴은 기억나세요? 엄청 예뻤던 것 같은데.”
백시진이 입가를 만지작거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제인보다는 아니지만, 예쁘셨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그 대답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언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세요. 제인 언니 사랑하신다면요.”
할미의 행방은 가을에 접어들 무렵부터 알 수 없게 됐다.
꼭 뺨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백시진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리사, 네가 나에게는 아까운 여자라고 했으니, 남들에게도 그런 소리 듣지 않게 제대로 지켜야지.”
아이고, 같이 고기 먹으면서 했던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나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백시진은 그러는 나에게 고개를 살짝 꾸벅인 뒤 걸음을 돌렸다.
그러기 무섭게 도윤이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리사, 시진이 삼촌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애들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
내 말에 도윤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리사도 애면서.”
도윤이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단예랑 단아, 단이 보러 들어가자. 도윤아.”
“응!”
윤리오와 윤리타는 여전히 유치원 선생님과 대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나 했는데.
“리사가 구구단도 외울 줄 알아요? 그런 거 가르쳐 준 적 없는데.”
“윤리오, 리사가 너보다 똑똑한 거 아니야?”
“시끄러, 윤리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훗, 오라버니들. 리사가 좀 똑똑해.
***
각성자 관리 기구, AMO.
현장 제 1팀의 백시진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팀장님, 여기 부탁하셨던 자료들요. 갑자기 탈쟁이 놈들 자료는 왜 부탁하신 거래요?”
“그런 게 있습니다.”
백시진은 1팀의 막내 요원, 미우나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고는 그가 가지고 온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얼굴 제대로 찍힌 건 없습니까?”
“있을 리가요. 걔네가 암만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도, 탈 한 번 쓰면 관련 자료들 다 폐기되잖아요.”
미우나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얘 얼굴이 이렇다고? ‘몰라, 기억 안 나. 아닌 것 같아’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료를 폐기해 버린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백시진이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백시진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고는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가을 무렵부터 활동이 뚝 끊긴 유랑단의 아홉 탈에 관한 정보를 쫓을 때였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군, 백시진 팀장.”
“태지인 부장님?”
AMO 내의 모든 현장 부서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인물.
태지인이 백시진에게 서류 뭉치를 떠넘기듯 주고는 말했다.
“내가 아홉 탈에 관한 임무를 맡길 줄 알고 이렇게 미리 자료를 보고 있었던 건가?”
“네?”
아닌데요. 저는 그냥 미심쩍은 말을 들어서 이것 좀 확인해 보려고 한 건데요.
백시진은 차오르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는 태지인을 쳐다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태지인이 입을 열었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인 중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이라면…….”
“마수 사육사들을 상대로 주기적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놈이지.”
중이 저지른 마지막 살인은 10년 전.
윤사해의 쌍둥이 아들들의 납치 사건에 묻힌 감이 있지만, 언론에 떠들썩하게 다뤄졌던 일이었다.
“이번에 아래아 쪽의 인간을 건드렸다는군.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마수를 잃었다고 한다. 바로 눈앞에서.”
백시진이 들리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마수를 기르는 이들 대부분은 제 마수를 자식처럼 여겼다. 그만큼 애지중지하며 기른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잃고 말았다니.’
백시진은 짧게 혀를 찼다. 태지인은 백시진의 업무 책상에 기대며 그를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아래아의 최설윤 길드장이 길길이 날뛰기 전에 자네가 좀 처리해 줬으면 하는군. 잡는 건 바라지도 않아.”
태지인이 비딱하게 미소를 지었다.
“훼방만 놓게. 그가 마수 사육사들을 죽일 수 없도록.”
그 말에 백시진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마수 사육자는 제가 기르는 마수를 기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나 그렇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인간들도 포함해서 국내의 모든 마수 사육자들을 중 녀석한테서 보호하라고?’
백시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상관은 유유히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하아…….”
백시진이 한숨을 토해내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심이 지난 시간,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
낮잠 시간이 사라진 자라나리 유치원 꽃님반의 오후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우와, 눈이다!”
윤사해가 말한 대로 오후에 접어들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윤이의 말에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선생님!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돼요? 눈사람 만들고 싶은데!”
“나는 눈싸움!”
밖에 나가고 싶다면서 선생님께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결국 백기를 들었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외투를 챙겨 입고 뛰어나갔다.
“단아야! 코트 입어야지! 도윤아! 너도!”
물론, 외투를 입지 않고 무작정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단아와 도윤이의 외투를 들고는 두 아이의 뒤를 쫓았다.
“우리 셋째 때문에 선생님께서 고생이 참 많으시네.”
단예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고, 단이가 맞장구쳤다.
“그러게. 안 되면 내가 가서 억지로라도 입혀야겠어.”
“그러렴, 첫째야. 셋째가 네 말은 잘 들으니까.”
단예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리사야, 같이 눈사람 만들지 않겠니? 당분간 눈 소식이 없다고 들었거든.”
“정말?”
나는 단예의 손을 덥석 잡고는 울상을 지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 번 더 내렸으면 좋겠는데.”
“그러기는 할 거란다.”
단예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유치원 졸업하면 우리 곧 헤어지겠구나.”
단예와 단아, 단이가 사는 곳은 유영구가 아니었다.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자라나리 유치원이 서울 내에서 꽤 알아주는 명문 유치원이라서 이곳까지 보낸 거라고 들었었다.
그러니 졸업하고 나면 한태극의 세쌍둥이 손주들과는 헤어질 가능성이 꽤 컸다.
하지만.
“단예야, 리사랑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헤어진다니 뭐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내 말에 단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리사.”
단예가 내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꼭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꾸나. 헤어지는 일 없이.”
단예의 말에 단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같은 반도 되는 거지.”
이때는 몰랐다.
단예와 단이가 말한 대로 이뤄질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