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99)화 (99/500)

99화. 찬 이슬이 맺히기 전에(4)

내 말을 끝으로 서차윤은 침묵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쌀쌀함을 머금은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불어온 바람에 서차윤의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그는 나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혼자서 너무 감내하려고 하지 마.”

서차윤이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을 들었다.

그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나 싶었지만, 그는 들었던 손을 주먹 쥐고선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내게서 시선을 거둬 화단에 심어진 꽃들을 보며 말했다.

“어린애가 벌써 혼자서 끙끙 앓고 그러면 안 된다? 네 알맹이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해도 그러면 안 돼.”

나는 입술을 씰룩였다.

“아저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리사한테 잔소리하려고 찾아온 거죠?”

서차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해한테는 네가 어디에 있었고, 그곳에서 뭘 겪었는지 말 안 해 줄 거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서차윤의 말대로였다.

윤사해는 줄곧 내가 그 날의 일에 대해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마는.

“네, 말 안 해 줄 거예요.”

나는 윤사해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라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리사는…….”

나는 목소리의 끝을 길게 흐렸다가 이내 말했다.

“저는 아빠가 저 때문에 다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싸우지도 말고요.”

그러니까 말해 주지 않을 거다.

윤사해라면 단신으로도 유랑단에 쳐들어갈 인물이니.

서차윤이 내 말에 미소를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 줘.”

“그럴 거예요. 다만, 아빠가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면요.”

“백발의 할아버지……?”

“네, 그래야 유랑단에 안 쳐들어갈 테니까요! 기력이 없어서요!”

서차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똑똑한데, 윤리사? 사해라면 네 이야기를 듣는 즉시 유랑단에 쳐들어가려고 할 테니까!”

웃음기가 가득 담겼던 목소리도 잠시, 서차윤이 두 눈을 낮게 가라앉히고선 걸음을 옮겼다.

서차윤의 몸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했다. 툭 건드리면 점점이 흩어질 것 같은 모습.

나는 그런 서차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제 가요, 아저씨?”

서차윤이 자리에 멈춰 서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원하면 조금 더 있어 줄 수 있는데.”

그 말에 나는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하, 맹랑하기는.”

서차윤이 작게 키득거리고는 내게 물었다.

“오늘이 가면 또 언제 너를 볼 수 있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 있겠지?”

“리사는 지금도 큰데요.”

“아니야, 작아.”

서차윤이 고개를 젓고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오도 여전히 작고, 리타도 여전히 작지.”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는데, 서차윤은 머뭇거리다 내게 다가왔다.

내 앞에 멈춰선 그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윤리사, 혼자서 너무 끙끙 앓지 말고. 위험한 일은 적당히 피하고.”

“아저씨, 진짜 잔소리하려고 리사 찾아온 거구나? 우리 아빠도 리사한테 잔소리 안 하는데.”

“거짓말. 사해는 나보다 더 심한 잔소리를 할 텐데?”

정답이었다.

눈앞의 서차윤이 괜히 얄미워져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그런 내 모습에 서차윤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못생겼어.”

“아저씨도 못생겼거든요?!”

서차윤이 키득거리고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리사.”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꼭 윤사해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 같았다는 말이다.

“언젠가 네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차윤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목소리를 내었다.

“그때는 꼭 도와줄게. 그로 인해 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머리칼에 손길이 닿았다. 그러나 그뿐, 그는 쓰다듬거나 하지 않았다.

내게 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나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마시고 성불이나 하세요.”

“나는.”

“귀신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서 가기나 하세요.”

서차윤의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서차윤이 말하기를, 윤사해도 그의 쌍둥이 아들들도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했지만.

“윤리사?”

저세상은 자신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단 말이야!

갑작스레 들려오는 주인공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서차윤의 손이 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윤리사, 거기서 뭐해? 잔다고 했잖아.”

“자, 잠이 안 와서 꽃 좀 구경하고 있었어!”

“꽃?”

나는 넓은 창을 얇은 커튼으로 가리고는 불청객을 향해 방긋 웃었다

“응! 세상이 오빠랑 같이 심은 꽃들을 좀 구경하고 있었어!”

얇은 커튼 뒤로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내 방을 침입한 망할 주인공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커튼은 갑자기 왜 친 거야? 밖에 뭐 이상한 거 있어?”

저세상이 그렇게 말하고는 커튼을 걷어 버렸다. 내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말이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며시 뜨며 바깥을 살폈다.

“웬 꽃인가 했는데, 아직도 피어 있네? 금방 질 줄 알았는데.”

보이는 거라곤 꽃들뿐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저기 저 부적들 좀 봐. 그리고 나무에 설치되어 있는 아이템도. 아빠가 온실처럼 꾸미겠다고 저래 놓은 거야.”

“아저씨도 참…….”

저세상이 피식 웃고는 다시 커튼을 쳤다. 열려 있던 창을 꼭꼭 닫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나는 저세상이 하는 양을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세상이 오빠, 왜 왔어?”

“그냥.”

그냥은 무슨.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찾아온 거겠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선 망할 주인공님이 무슨 꿍꿍이인가 살피는데 그가 말했다.

“그런데 너 오늘 진짜 잘 달리더라? 리오 형이랑 리타 형 말대로 나중에 육상 선수 되는 거 아니야?”

웬 헛소리인가 했다.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벅이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이 오빠, 설마 리사 칭찬해 주려고 방까지 찾아온 거야? 오늘 열심히 잘 달렸다면서?”

내 말에 저세상이 소리 질렀다.

“아니거든?! 칭찬은 무슨 칭찬이야! 착각하지 마!”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성질이람?

고막을 때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저세상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나는 진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찾아온 거야!”

“그렇구나아.”

나는 저세상의 검지를 손등을 향하게 접어 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리사는 또 세상이 오빠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려주려고 찾아왔나 싶었지.”

예를 들면, 『각성, 그 후』에 관한 것들 말이다.

저세상이 접힌 검지에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프면 놔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는 죽어도 하지 않는 저세상이었다.

“그래서 리사는 왜 찾아온 건데?”

“그냥…….”

“이라고 말하지 말고.”

단호하게 말을 끊어내자, 저세상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네 방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찾아온 것뿐이야.”

마른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는 말이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저세상의 손을 놓아 주며 말했다.

“리사 방에는 리사밖에 없었거든?”

저세상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리사, 세상아?”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빠!”

나는 저세상의 검지를 놓아 주고는 윤사해에게 달려갔다. 윤사해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물었다.

“리사, 잔다면서 세상이 오빠랑 뭐하고 있었니?”

“같이 꽃구경하고 있었어! 저기에 세상이 오빠랑 리사가 같이 심어놓은 꽃 있잖아!”

윤사해가 내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상이 오빠가 리사 칭찬해 줬다? 오늘 잘 달렸다고!”

“아니……!”

저세상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주인공님께서 갑자기 입을 닫으시자, 윤사해가 걱정된다는 듯이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아?”

“네, 아저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윤리사 말이 맞아요.”

“음?”

“윤리사 오늘 엄청 잘 달렸잖아요? 많이 피곤할 것 같아서 안 오려고 했는데 그래도 잘 달렸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요.”

저세상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아주 청산유수였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주인공님의 낯짝에 질색하는데, 윤사해가 흐뭇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둘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꽃구경하고 있었니?”

“응!”

나는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년에는 해바라기 심을 거야!”

“그래, 해바라기든 뭐든 리사가 좋아하는 꽃을 또 심자꾸나.”

윤사해가 내 이마에 입을 짧게 맞추고는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자야겠지? 그래야 쑥쑥 자라서 해바라기를 심을 수 있을 거란다.”

“네에!”

“그런데 리사.”

“응?”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양치는 했니? 아빠는 우리 리사가 양치하는 거 못 본 것 같은데.”

아하. 아버님, 그래서 제 방에 찾아오셨군요? 딸내미 양치시키려고.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렸다. 어떤 답을 내놓아야 양치하지 않고 잘 수 있을까 해서다.

그렇게 양치를 피하기 위해 궁리를 하는데.

“윤리사 양치 안 했어요.”

망할 저세상이 초를 쳤다.

결국 나는 윤사해의 품에 안긴 채 욕실로 향했고, 치카치카를 끝낸 뒤에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러기 무섭게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자지 않으려고 두 눈에 힘을 줬다.

모습을 감춘 서차윤이 다시 나타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하암…….”

청팀을 우승으로 이끄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써 버렸는지,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날의 만남이 서차윤과의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계속 기다렸을 텐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도와줄 거라면서요.

제발 좀 도와줘요, 아저씨.

***

훗날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조용히 잠에 빠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