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냥 평화롭지는 않은(5)
“이제 안 만난대! 연락이 끊겼다고 했어.”
들린 말에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도윤이에게 되물었다.
“끊겼다고?”
“응, 갑자기 뚝 끊겼대. 그래서 누나가 엄청 속상해했어.”
도윤이는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다.
“시진이 삼촌이 제인 누나랑 같이 테마 파크로 데이트 간 것도 누나가 계속 기운 없이 있어서 그런 거야!”
“친구랑 연락이 뚝 끊겨 버려서?”
“응, 그 사람이 제인 누나 연애 상담도 해 주고 이것저것 힘든 일을 많이 도와줬다고 그러더라고.”
이어지는 도윤이의 말에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망할, 할미.
그녀는 제인 아일리의 호감을 얻어낸 뒤 그녀의 혼을 끄집어 낼 생각이었을 거다.
“그런데 리사. 누나 친구는 갑자기 왜 물어봐?”
“으응? 아니, 그냥 궁금해서.”
만나면 뺨 한 대 때려야 하거든. 하관이 돌아갈 정도로 말이야.
나는 뒷말을 삼키며 도윤이를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그때 꽃님반의 앞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리사! 백도윤!”
“단아다! 단아야, 너 어제 리사랑 같이 테마 파크에서 놀았다며?!”
도윤이가 단아에게 달려갔고, 나는 웃는 낯으로 그 뒤를 따랐다.
단아는 도윤이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했다.
“응! 부럽지? 한단예랑 한단이랑 같이 윤리사랑 놀았다?”
“셋째야, 리사 말고도 세상이 오빠랑도 놀았었잖니.”
“맞아. 세상이 형이랑도 재밌었잖아, 단아야.”
단아의 뒤로 단예와 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윤이가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웠었어. 그러니까 오늘 재미있게 놀자, 도윤아.”
“응! 단이야!”
나는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괜히 코 밑을 닦았다.
우리 어린이들, 앞으로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자라기야.
***
윤리사가 자라나리 유치원 꽃님반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있을 때였다.
자라나리 유치원과는 달리 볕이라고는 들지 않는 곳.
아니, 해조차 뜨지 않은 공간에서 할미는 사지가 결박당한 채 웃고 있었다.
“우리 수장님, 내가 하는 일에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녀는 두 팔, 두 다리가 결박당했을 뿐만 아니라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에 묶여 있기까지 했다.
양반의 속임수에 넘어가 백정이 베어 버린 것.
할미가 묶여 있는 곳은 각시가 태어나는 탄생목이었다.
할미의 앞에 누군가 발을 디디며 입을 열었다.
“오해 마시기를. 수장님께서는 당신 하는 일에 관심 없습니다, 할미.”
“이게 누구야? 양반 새끼가 뒈져 버린 후 잠적하셨던 선비 새끼잖아?”
선비는 할미를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 때문에 탄생목이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수장님은 그에 대해 벌을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미친 사람처럼 웃기만 하던 할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기껏 마지막 공양으로 바치라고 내가 애새끼를 보내 줬더니!”
할미는 선비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 애새끼를 바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네가 헛짓거리를 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빌어먹을 새끼야!”
“그러게 왜!”
선비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윤사해의 아이를 공양으로 바치라며 제게 보내서 이 사달을 만드셨냔 말입니다.”
짓씹듯이 내뱉은 목소리에 할미가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 선비 새끼가 윤사해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조소가 섞인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선비가 당장에라도 자리를 피할 자세를 취했으나.
“왜 그렇게 경계해, 선비 님?”
그러기도 전에 그는 백정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백정이 입꼬리를 올리고선 선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설마 너를 해칠까 봐? 해쳤다가는 수장님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는데.”
선비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왜 왔기는?”
백정은 선비를 지나쳐 할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내게 재미난 일이 있다면서 유랑단에 돌아올 것을 종용하셨던 할미 님이 이리 묶여 계시는데…….”
백정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구경 와야하지 않겠어?”
분명한 조롱.
그에 할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랴?”
“성격하고는.”
백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미가 그런 백정을 보며 악을 내질렀다.
“너 역시 망할 새끼야, 백정! 이 나무는 네가 베었는데, 왜 내가 이렇게……!”
“묶여 있냐고? 그야, 선비 님의 말대로 네가 윤사해의 아이를 공양으로 보내지만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기에.”
백정이 태연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자 할미는 발광했다.
“아아악! 둘 다 꺼져, 내 앞에서 좀 꺼지라고!”
백정은 광인과도 같이 발광하는 할미를 향해 조소를 보내며 걸음을 돌렸다.
“아, 맞아. 선비 님.”
그러다 선비의 앞에 멈춰 서서는 그에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닥거려 주었다.
“수장님의 총애를 잘 붙잡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 총애를 잃는 순간, 내가 네 멱을 따 버릴 거거든.”
선비는 언짢은 기색을 얼굴 밖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정은 그런 그를 비웃어 주고는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탄생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기 무섭게 불청객이 또 한 명 나타났다.
“우와, 백정 씨가 선비 씨를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매.”
“너는 또 왜 온 거야!”
할미가 두 눈을 번뜩이며 비명과도 같이 그리 내질렀다.
그녀를 붙잡아 사지를 결박하고, 탄생목에 묶어 놓은 이가 바로 이매였기 때문이다.
이매는 곧장 할미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에 탈을 씌워 주며 말했다.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랍니다? 수장님께서 할미 씨께 전해주라는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에요.”
“수장님께서 내게 전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네, 할미 씨.”
이매는 할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탈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미소를 그렸다.
“당신의 형벌 기간은 탄생목이 다 자랄 때까지. 그 때까지 이곳에 묶여 있으랍니다, 할미.”
이매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할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아하하하!”
그도 잠시, 할미는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수장을 불러댔다.
“수장님…! 수장님……!”
선비는 주변을 공허하게 울리는 할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계셨어요, 선비 씨?”
그런 그를 이매가 붙잡아 세웠다.
선비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이매에게 쏘아 붙였다.
“당신이 알 바입니까?”
“알 바는 아니지만, 선비 씨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거든요.”
이매가 눈웃음을 지었다.
“선비 씨가 찾아 주실래요? 양반 탈을 가질 사람을.”
이매의 손에 어느새 주인을 잃은 양반 탈이 들려있었다.
선비는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이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선비는 아무 반응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든 나무 아래에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의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도윤이는 윤설아가 더는 제인 아일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또 실실 웃으며 제인 아일리의 앞에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래서 행방을 쫓은 후, 백시진에게 그녀에 관한 정보를 조금 흘려 줄까 했는데.
“쳇.”
스킬 발동이 취소되고 말았다. 역시 ‘윤설아’라는 이름은 가명이었나 보다.
‘윤설아가 아닌, 최설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더 스킬을 사용해볼까?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역시 되지 않았다.
윤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망할 탈쟁이!
아무래도 얼굴 위로 탈을 덮어쓴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보는 눈도 많거니와.
“리사야, 우리 차례야.”
“응? 벌써? 단예야, 남자애들은 어떻게 됐어? 누가 뽑혔는데?”
“도윤이.”
운동회의 계주 선수로 뽑히러 나가야했기 때문이다.
저번 주에 유치원 선생님께서 운동회에 대비해 오늘 계주 선수를 뽑을 거라고 알렸었는데.
‘깜빡했지.’
워낙 일이 많았어야지.
그리고 원래 이 시간에는 낮잠을 자고 있어야하나, 몇 개월 후면 초등학교 입학이라고 낮잠 시간은 사라지고 말았다.
학교 적응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나 뭐라나.
어쨌든.
‘할미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지만, 백시진에게 할미에 대한 건 알려 주는 게 좋겠지.’
문제는 이걸 어떻게, 어떤 식으로 알려 줘야 하는가인데…….
“윤리사! 어제는 졌지만, 오늘은 내가 꼭 이기고 말겠어! 두고 봐!”
지금 생각해야하는 건, 단아를 이기는 거였다.
“그래, 단아야! 그렇지만 오늘도 리사가 이길 거야!”
나는 머릿속을 지배하던 복잡한 생각을 깔끔하게 지우고는 단아와 함께 출발선에 섰다.
목표는 하나.
“준비……!”
탕!
초등학교 입학 전, 마지막 운동회의 계주 선수로 뽑혀 윤사해를 기쁘게 해 주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