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마냥 평화롭지는 않은(4)
장천의는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최설윤 길드장님.”
최설윤.
금강산에 위치한 모든 던전을 소유 중인 아래아의 길드장으로, 한국에 몇 없는 S급 각성자이기도 했다.
그와는 사업적으로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기에 장천의는 최설윤을 기쁘게 맞이했다.
“무사히 귀국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마중은 무슨.”
최설윤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여기서 음침하게 뭐하고 있는 거야, 장천의 회장? 관람객들 구경? 그런데 우리 장천의 회장께서 보고 계시는 관람객이…….”
최설윤은 장천의의 앞에 펼쳐져 있는 여러 개의 윈도우 창 중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꽤나 익숙한 얼굴이네?”
최설윤이 말한 사람은 윤사해였다.
“어때, 장천의 회장? 아는 척하러 가 볼까?”
“윤사해 길드장님께서는 오랜만에 자녀분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랍니다, 최설윤 길드장님.”
그러니 만나러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소리였다.
최설윤이 이를 알아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였어. 그보다 애들이랑 관계가 많이 풀렸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진작 저렇게 할 것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장천의가 공감한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윤사해 길드장 옆에 있는 검은 머리 남자애는 누구래?”
최설윤이 가리킨 사람은 저세상이었다. 그를 본 장천의는 자신도 모르게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최설윤 길드장님께서는 알 필요 없는 녀석입니다.”
“응……?”
장천의가 저세상을 향해 내비친 감정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를 읽은 최설윤이 의문을 표하려는 찰나, 장천의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윤사해 길드장님께서 후원을 자처한 아이랍니다.”
“윤사해 길드장이?”
“네. 따님께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셨는데, 그때 따님을 도와준 아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최설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천의가 아이를 향해 보였던 감정은 까맣게 잊은 듯 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귀국하자마자 장천의 회장 보러 온 거라 들은 게 없네.”
“네, 최설윤 길드장님께서 한국을 비우고 계실 때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그보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완전 최악이었어. 나 바티칸에서 일 치를 뻔 했었잖아.”
최설윤이 장천의의 옆에 앉아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로저 신부가 아니었으면 바티칸 사제님들 몇 명 때려잡았을걸?”
“로저 신부라면…….”
장천의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다 최설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로저 에스테라 말입니까?”
“응, 내가 그 인간 말고 ‘신부’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어?”
최설윤의 말에 장천의는 표정을 굳혔다.
‘설윤 씨와 관련된 소식이 왜 들어오지 않았나 했더니.’
로저 에스테라가 최설윤이 바티칸에서 겪었어야 할 충돌을 막았을 줄이야.
장천의는 로저 에스테라의 낯짝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인간이 왜 바티칸에 있었답니까? 좀처럼 한국을 벗어나지 않는 분께서.”
“봉헌금에 문제가 있었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몰라.”
봉헌금에 문제가 있었다니?
단 한 번도 그와 관련된 일로 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없는 로저 에스테라였다.
“왜 그래, 장천의 회장? 표정이 안 좋은데?”
“아하하, 그래 보입니까? 그런데 최설윤 길드장님, 못 보던 팔찌가 있군요. 제가 선물해 준 것과는 다른 팔찌가요.”
장천의는 최설윤이 착용 중인 진주 팔찌를 가리키며 대화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우리 장천의 회장님, 눈썰미 하나는 정말 좋다니까? 그게…….”
최설윤은 제 손목에 걸린 진주 팔찌에 얽힌 비화를 장천의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퍼레이드의 행렬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
사방에서 날리는 꽃가루 사이로 윤사해가 말했다.
“리사, 세상아. 앞으로 조금만 더 나오렴. 리오랑 리타는 좀 더 붙고.”
우리의 뒤로는 CW 테마 파크의 마스코트가 서 있었다.
회중시계를 손에 들고 있는 토끼였는데, 누가 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흰 토끼였다.
윤사해는 그런 토끼를 배경 삼아 우리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때 한태극이 윤사해에게 말했다.
“윤사해 길드장, 자네도 애들이랑 가서 같이 찍게. 내 한 장 찍어 주도록 하지.”
“그래 주시겠습니까?”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더니 웬걸.
윤사해는 망설임 없이 한태극에게 사진기를 넘겨줬다.
그러고 보니 윤사해, 어제 경품에서 나랑 저세상이 타온 ‘CW-참 좋은 사진관’ 가족사진 이용권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었지?
여름 때 놀러 간 별장에서도 수시로 우리를 찍어 댔고 말이야.
‘하긴, 지금까지 우리 사진을 제대로 찍어 놓지 못했을 테니까.’
윤사해의 입장에서는 지금부터라도 추억을 하나하나 남기고 싶은 심정일 거다.
그렇게 한태극의 배려 아래에 가족사진 한 장을 찍은 순간이었다.
“윤리사! 나랑도 찍어!”
단아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단아를 보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자리를 피해 줬다.
우리 오라버니들, 드디어 철이 들었나 보다.
나는 단아를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한태극의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불렀다.
“단예랑 단이도 같이 찍자!”
단예랑 단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어디 가, 세상이 오빠? 세상이 오빠도 같이 찍어야지.”
저세상이 은근슬쩍 몸을 피하려고 했다. 나는 저세상의 옷깃을 꽉 붙잡고는 내 곁에 서게 했다.
“너희끼리 찍으면 되잖아?”
저세상이 불만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세상이 오빠, 봐봐. 윤사해가 열렬히 우리를 찍어 대고 있다고.
나중에 사진 확인하는데, 단예랑 단아 그리고 단이는 잘려 있는 거 아니겠지?
뭔가 그럴 낌새였다.
괜히 불안해져서 윤사해에게 내 친구들도 제대로 찍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도윤이가 없어서 아쉽네.”
“그러게. 도윤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단예와 단이가 사진기를 향해 한껏 꾸민 웃음을 보이며 그리 말했다.
그러자 단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단예, 한단이. 이 멍청이들아! 백도윤이랑은 다음에 놀면 되잖아! 아쉬울 게 뭐가 있어? 그치, 윤리사? 내 말 맞지?”
“으, 응? 어어, 맞아. 도윤이랑은 다음에 놀면 되지!”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도윤이와 함께 제2 CW 테마 파크를 방문하겠다는 말이었다.
윤사해가 알게 된다면 기겁하겠지.
하지만…….
‘단예와 단이의 말대로 도윤이가 없어서 아쉬운걸.’
도윤이가 있었다면 퍼레이드가 끝난 후에도 놀 수 있었을 텐데.
윤사해는 열심히 우리를 찍어 대던 것을 멈추고 사진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사해가 사진기를 내리기 무섭게 단예가 말했다.
“리사는 이제 가겠네? 세상이 오빠도요.”
단예의 말에 단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나는 그런 단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단아야, 어차피 내일이면 보잖아? 내일 리사랑 신나게 놀자!”
“오늘도 놀고 싶은데.”
단아가 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리사, 이제 가자꾸나.”
찍은 사진을 모두 확인한 윤사해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저세상은 어느새 윤사해의 한쪽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거참, 빠르기도 하지.
“그럼, 내일 보자!”
나는 친구들을 향해 그렇게 인사한 후 윤사해의 다른 손을 잡았다. 윤사해가 내 손을 놓칠세라 힘주어 잡고는 한태극에게 말했다.
“의원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게.”
오는 말이 곱다면 돌아오는 말이 곱다는데 한태극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한태극의 세쌍둥이 손주들은 할아버지와는 달랐다.
“안녕히 가세요, 윤사해 길드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확히는 단예와 단이만 달랐다.
단아는 한태극의 뒤에서 두 뺨을 부풀린 채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런 단아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줬고, 한태극을 향해서도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했다.
윤사해에게로 돌아오는 말이 곱지가 않았지만, 우리 가족사진을 찍어 줬으니까!
그렇게 한태극과 그의 세쌍둥이 손주와 헤어지고 테마 파크를 나서는 길이었다.
“아빠, 기념품 가게에 잠깐 들르면 안 될까요?”
윤리타가 입구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르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윤리타가 청해진한테 선물 사 주고 싶대요.”
윤리오의 말에 나는 손을 들었다.
“아빠, 리사도! 리사도 기념품 가게에 들르고 싶어!”
오늘 함께 하지 못한 도윤이에게 아기자기한 선물 하나를 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윤사해는 흔쾌히 우리의 말을 들어줬고, 기념품 가게로 걸음을 돌렸다.
저세상이 의아한 듯이 말했다.
“외국으로 여행 온 것도 아닌데, 기념품은 왜 사려는 거야?”
“리타 오빠! 세상이 오빠가압!”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저세상이 내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리사? 세상아?”
윤리오와 함께 청해진의 선물을 고르고 있던 윤리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듯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리타 형, 해진이 형한테는 그거 말고 저기 저 개구리 인형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저거로 해야겠다.”
저세상의 말에 윤리타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저기요, 윤리타 씨? 당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의 입이 저세상의 손에 틀어막힌 게 보이지 않나요?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는 저세상의 발목을 걷어찼다.
“악……!”
저세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지만, 나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도윤이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을 골랐다.
그러고는 곧장 윤사해에게 이를 내밀었다.
아빠, 계산해 줘.
윤사해가 내가 고른 것을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물었다.
“이게 마음에 드니, 리사?”
“응! 도윤이한테 잘 어울려!”
내가 고른 건, 도윤이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꼭 닮은 곰 인형이었다.
윤사해가 내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얼굴을 찌푸렸다.
“도윤이?”
“응! 도윤이 선물로 줄 거야! 안 사 주면 알지, 아빠?”
“…….”
윤사해는 말없이 곰 인형을 계산해 줬다.
***
그렇게 내가 산 곰 인형은 다음날, 곧바로 도윤이의 품에 안겼다.
“우와! 리사, 고마워!”
도윤이가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활짝 웃었다.
“CW 테마 파크에서 단예랑 단아랑 단이를 만났었다니! 삼촌한테 조를 걸 그랬어!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삼촌? 시진이 아저씨도 테마 파크에 놀러 왔었어?”
“응, 제인 누나랑 데이트!”
오랜만에 듣는 제인 아일리의 이름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윤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도윤아, 혹시 제인 언니. 여전히 그 친구 분을 만나셔?”
“제인 누나의 친구?”
“응, 도윤이 네가 그랬잖아. 제인 언니한테 요리 가르쳐 주는 단짝 친구가 있다고.”
단짝 친구라고는 안 했지만, 도윤이는 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차렸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