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마냥 평화롭지는 않은(2)
어제 한태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탐탁치 않아하던 반응을 보아 윤사해라면 한태극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할배! 쿠키는 왜 안 담아 왔어?!”
“예끼, 이 녀석아! 한국인이 밥을 먹어야지!”
의외로 그는 순순히 한태극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우리 가족 옆자리에 앉은 한태극은 단아에게 각종 채소류를 퍼 주기 시작했는데.
“한단이, 너 다 먹어.”
단아는 그걸 그대로 단이에게 넘겨줬다. 그러고는 단예 몫의 국수를 끌고 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단아의 몫도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다 먹은 건지 빈 그릇이었다.
윤사해가 단아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태극에게 말했다.
“애를 어제부터 굶겼었나 봅니다, 한태극 의원님?”
“크흠, 흠.”
한태극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우리 막내가 좀 잘 먹네.”
너무 잘 먹는데.
단예 몫의 국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윤사해의 말대로 어제부터 애를 굶긴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야, 단아는.
‘점심시간마다 유치원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밥투정이 심하니까.’
단예가 나서야 그 밥투정이 해결될 정도인데, 저렇게 잘 먹다니.
난생 처음 보는 단아의 식탐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윤리오와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리타, 너보다 잘 먹는 애는 처음 봐.”
“나도 처음 봐.”
저세상은 그게 배에 다 들어간다니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단아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단이가 자신 몫의 국수를 단아의 앞에 밀어 주고는 내게 속닥거렸다.
“단아가 면 음식을 좋아하거든. 특히, 잔치 국수.”
“아하.”
유치원에서 잔치 국수가 점심이나 간식으로 나온 적이 없어서 몰랐다.
그 사이 단아는 단이 몫의 국수도 깔끔하게 해치운 상태였다.
우리 단아, 국수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내 몫의 것도 단아에게 줄까 하는데 윤사해가 말했다.
“리사, 친구랑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어서 먹으렴.”
“네에.”
단이랑 속닥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눈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결국 나는 단이에게 내 몫의 국수를 주는 것을 포기하고 열심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그릇을 비우는 순간, 한태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사해 길드장, 아침 먹고 바로 돌아가는가?”
“점심 때 퍼레이드가 예정되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것까지 보고 갈 생각입니다.”
“잘됐군.”
한태극의 말에 윤사해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한태극은 그런 윤사해를 보며 계략을 꾸미는 흑막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윤사해 길드장? 함께 움직이는 건.”
“좋습니다.”
“그래, 거절할 줄 알았…….”
한태극이 말을 멈추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꽤나 놀란 눈치였다.
윤사해는 태연한 얼굴로 멈췄던 젓가락을 다시 들며 입을 열었다.
“좋다고 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없네.”
한태극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리 답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에 윤사해가 말했다.
“아침 먹고 바로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내 연락 주겠네.”
“알겠습니다.”
윤사해의 대답에도 한태극은 미심쩍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약속은 잡혔고, 아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한태극의 연락에 리조트 로비로 내려왔다.
“왔군, 윤사해 길드장.”
한태극이 정말 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윤사해에게 그렇게 인사했고.
“윤리사!”
단아가 나를 반겼다.
“리사야, 오늘 하루 즐겁게 놀자.”
“세상이 형도요.”
물론, 단예와 단이도.
단이의 인사에 저세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 재미있게 놀자.”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단이는 저세상이 제 말에 대꾸해 줘서 고마운지 방긋 웃고 있었다.
우리 단이, 착하기도 하지.
어쨌든 한태극의 네 가족과 우리 다섯 가족. 총 아홉 명의 사람이 로비 한 가운데에 모이게 됐다.
이중 자라나는 청소년인 윤리오와 윤리타를 포함해 아이만 일곱.
넓기만 했던 로비가 순식간에 비좁게 느껴졌다.
윤사해 역시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지, 나를 번쩍 안아들고선 말했다.
“나가죠, 의원님.”
그렇게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윤리오와 윤리타는 우리와 헤어져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리오, 리타. 점심 전까지 아빠가 말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단다.”
“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하루, 시간이 부족해서 타지 못한 놀이 기구를 타러 가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움직이려고 했지만.
‘오늘이 아니면 사람들 때문에 타기 힘든 놀이 기구가 꽤 많을 거란다. 퍼레이드 때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되니, 편하게 놀다 오려무나.’
……라는 윤사해의 말에 둘은 사이좋게 놀이 기구를 타러 갔다.
그렇게 윤리오와 윤리타가 떠나간 후에 한태극이 윤사해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애들 놀기 편한 곳으로 이동하지. 어떤가, 윤사해 길드장?”
“좋습니다.”
나는 윤사해의 품에 안겼고, 저세상은 윤사해의 손을 잡았다. 한태극의 세쌍둥이 손주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녔다.
“단아야! 그 쪽으로 가면 안 돼!”
정확히는, 단아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단이가 무리를 이탈해 달려 나가는 단아를 가까스로 붙잡고는 한태극의 곁으로 데리고 왔다.
한태극이 단이에게 붙잡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고 있는 단아를 야단쳤다.
“한단아, 이 녀석아!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길 잃으면 할배가 나 찾으러 돌아다니겠지.”
단아의 기가 막힌 대답에 한태극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윤사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한태극을 놀렸다.
“애가 말을 정말 잘 듣는군요.”
“시끄럽네.”
한태극이 끙 앓는 목소리를 낼 때였다. 단아가 해맑기 그지없는 얼굴로 손가락을 들었다.
“우리 저거 타자! 어때, 윤리사?”
“셋째야, 세상이 오빠 의견은?”
“몰라! 윤리사만 좋다고 하면 돼!”
단아가 가리킨 건, 테마 파크 내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관람차였다.
문제라면,
“세상이 오빠, 탈 수 있어?”
“탈 수 있거든. 윤리사, 너야말로 탈 수 있겠어?”
110cm 미만은 탈 수 없는 어린이용 놀이 기구였다는 거다.
***
다행히도 아이들의 키는 모두 110cm가 넘었기에 무리 없이 놀이 기구에 탑승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리를 비우자 한태극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인가, 윤사해 길드장? 지금까지 나와의 만남을 잘도 피해 왔으면서 말이네.”
“그걸 아시는 분께서 태연하게 같이 움직이자고 하셨습니까?”
윤사해가 다소 짜증이 서린 목소리로 한태극에게 쏘아 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 왜 저와 만나고 싶어 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팔라크의 둥지와 관련해서겠지요.”
“잘 알고 있는군.”
한태극의 대답에 윤사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미 청 가문의 소유가 된 던전에 왜 그리 관심을 가지시는지…….”
“말은 똑바로 하게, 윤사해 길드장. 나는 던전에는 관심이 없다네. 그곳에서 나오는 아이템에 관심이 많을 뿐이지.”
윤사해가 한태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태극은 시선을 아이들이 타고 있는 놀이 기구로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곳에서 L급의 회복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윤사해 역시 알고 있는 정보였다. 진작 서차웅에게서 보고를 받은 내용이기에.
일명, 팔라크의 영약이라 불리는 아이템이었다.
이상 각성자라는 이유로 하루하루 죽어가던 제 첫째 손주의 건강을 단번에 회복시킨 것.
한태극이 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것을 청 가문이 독점하게 둬서는 안 되네. 일부라도 유통이 되게 만들어야 해.”
“이제 와서 말입니까?”
웃기는 소리였다.
그야, 한태극이 아니었으면 L급의 회복 아이템을 청 가문이 독점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사해의 날선 목소리에 한태극이 변명했다.
“내 설마 L급의 회복 아이템이 나올 줄은 몰랐다네.”
아무리 잘해도 A급.
첫째 손주인 한단이의 건강을 일시적으로나마 회복할 수 있는 아이템이 나올 거로 여겼다.
DMO에서 던전의 등급을 S급으로 측정했어도, 한태극은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태극은 크게 숨을 내쉬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이건 리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리사? 윤사해 길드장의 딸 말이냐? 그 아이가 왜.’
‘리사가 말하기를 이번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나타난 던전에서 첫째의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남들이라면 아이가 하는 말이라며 무시했을 소리였지만 한태극은 제 둘째 손주가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팔라크의 둥지를 공략하여 그곳에서 회복 아이템을 얻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청 가문과 손을 잡은 것은…….
‘내 실책이었지.’
DMO를 설득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그랬던 것이, 한태극에게 있어서는 잘못된 계책이 되고 말았다.
“L급의 회복 아이템이 나올 줄 알았다면, 청 가문과 그렇게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네.”
잡았다고 하더라도 조건을 하나 붙였을 거다.
던전 내에서 획득한 회복 아이템의 일정 수량을 국가에 헌납 또는 사회에 유통하는 것으로.
한태극.
그는 한단이와 한단예, 한단아의 할아버지이기 이전에 대한애국당의 당 대표를 노렸던 국회의원이었다.
“나랏밥을 먹고 있는 자로,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팔라크의 둥지에서 나오는 회복 아이템이 L급이 아니었다면 가만히 계셨을 분께서 잘도 말하십니다.”
한태극이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한 얼굴을 보였다.
윤사해가 그런 한태극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팔라크의 둥지는 청 가문의 것. 그들은 제 것을 건드리는 자들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머릿속으로 하나뿐인 딸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내 윤사해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손을 잡죠.”
“뭣……?”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어차피 그러자고 저랑 만나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한태극 의원님?”
“그렇기는 했다만.”
한태극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침 식사 때도 그렇고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 사실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윤사해가 미심쩍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한태극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리사가 많이 아팠었습니다.”
윤사해는 막내딸이 하루 동안 실종됐던 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더군요.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아무것도 못한 채로 아이가 떠나갈까 봐.”
이매망량의 힐러인 광혜원도, 그리고 병원의 의사도 아이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타들어가는 제 속도 모르고.
윤사해가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였다.
“아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막내딸의 목소리에 윤사해는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것도 잠시, 윤사해는 표정을 굳히고는 한태극에게 말했다.
“그러니 한태극 의원님. 일이 잘 풀린다면 팔라크의 영약을 하나 얻어가겠습니다.”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한태극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일을 주관할 자는 던전 관리 기구인 DMO의 금이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