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마냥 평화롭지는 않은(1)
“윤리사……?”
바닥에 두 팔, 두 다리 뻗고 누워있던 단아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윤리사!”
그러고는 나를 향해 달려오려고 했는데.
“예끼, 이놈! 어디를 가려고!”
“싫어! 이거 놔, 망할 할배야!”
한태극에게 목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한태극의 손에 붙잡힌 단아가 있는 힘껏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놔! 놓으라고, 망할 할배야!”
단아가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단아의 두 형제자매가 나타났다.
“셋째야, 아직도 그러고 있니?”
“할아버지, 단아 그만 잡으시고 놔 주세요. 제가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요.”
“단이, 이 녀석아. 내가 언제 단아를 잡았다고!”
그러면서 한태극은 나와 윤리타가 있는 쪽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단아 녀석이 ‘윤리사’라고 하던데, 너희 친구 이름이 아니냐?”
“네, 맞아요. 그런데 리사를 갑자기 왜…….”
한태극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단예가 놀란 눈을 보였다.
“리사?”
나는 그런 단예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 단예야. 단이도 안녕.”
“응, 안녕. 리사야.”
단예와 똑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단이가 뒤늦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 순간 버둥거리고 있던 단아가 한태극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잇! 이거 놔!”
“어이쿠!”
우리 단아, 힘도 좋지.
한태극 의원의 손을 뿌리친 단아는 그대로 내게 뛰어와서는 두 팔 벌려 나를 꼭 끌어안았다.
윤리타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말이다.
“윤리사! 야아!”
나는 놀랐지만,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단아를 꼭 끌어안았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단아야?”
아, 잠깐. 질문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기는, 제2 CW 테마 파크에서 진행한 가오픈 행사에 참여할 추첨 인원에 뽑혀서 여기 온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께서 제2 CW 테마 파크의 티켓을 얻으셔서 이렇게 다 같이 놀러 왔어, 리사야.”
단예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 뒤를 이어 단이가 말했다.
“여기서 리사를 만날 줄은 몰랐네. 리사도 티켓을 얻은 거야?”
“응! 어쩌다 보니 얻게 됐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장천의에게 도윤이네 것도 달라고 할 걸 그랬다. 윤사해가 반대했을 게 뻔하지마는.
단예와 단이의 말에 한태극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저 아이가 바로 ‘윤리사’란 말이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냐.”
윤리타도 뒤늦게 나를 따라 고개를 꾸벅이며 한태극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너는 윤사해 길드장의 둘째 아들일 테지. 첫째 아들은 에일린의 머리색을 꼭 빼닮았으니.”
“눈은 안 닮았는데…….”
윤리타의 말에 한태극이 날선 눈초리를 보냈다.
지금 어린놈이 감히 어른의 말에 토를 단 거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뭐야, 한태극. 꼰대였어?
하지만 그런 눈빛도 잠시, 한태극이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윤리타에게 물었다.
“너희 아버지도 여기 있느냐?”
“네? 네, 지금 방에서 쉬고 계세요.”
“그렇단 말이지…….”
한태극이 불안하게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우리를 보며 입을 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리에게 지금 같이 윤사해에게 가자고 하려는 거 같았지만.
“그럼, 지금.”
“할아버지.”
그것을 단예가 차단했다.
단예는 한태극의 손을 꼭 잡으며 방긋 웃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떨까요? 할아버지 피곤하신데 저희 때문에 억지로 나오신 거잖아요.”
“맞아요, 할아버지. 저희가 리조트 내 놀이 시설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나오신 거잖아요.”
단예의 말에 단이가 맞장구를 치며 한태극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단아는 두 형제와는 다르게 뚱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할배는 돌아가고, 우리는 윤리사랑 놀면 안 돼? 할배 버리자.”
단아야…….
단아의 멋진 패륜성 발언에 한태극이 충격을 먹은 듯한 얼굴을 보였다.
단예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고, 단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들에 단아가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왜? 윤리사랑 놀면 안 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단아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한태극의 세쌍둥이 손주들과 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윤사해는 한태극과 만나게 될 거다.
한태극은 팔라크의 둥지와 관련하여 윤사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윤사해는 청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꺼려져 그것을 피하는 것 같았는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청 가문과 얽히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해.’
거주자의 후손들이란 사실에 콧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다.
자신의 소유물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팔라크의 둥지에서 획득할 수 있는 L급의 회복 아이템인 팔라크의 영약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아니, 근데 한태극은 왜 팔라크의 둥지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단이는 이미 몸을 회복했고, 때문에 더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텐데?
의문도 잠시, 나는 단아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단아야, 유치원에서 놀면 되잖아! 그리고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들어가자!”
“그치마안!”
“셋째야.”
단예가 소리 없이 다가와서는 단아의 팔을 잡았다.
“첫째가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놨단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자꾸나. 리사는 그만 곤란하게 하고.”
단예의 말대로 단이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여러 개가 쥐어져 있었다. 도대체 언제 편의점에 다녀온 거래?
단아는 울상을 지은 채로 나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알았어…….”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살짝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잘 가, 얘들아! 월요일 날 유치원에서 보자!”
단아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려 주던 단이가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리사. 월요일 날 보자.”
단예는 내게 손을 흔들었고, 나 역시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쌍둥이의 할아버지인 한태극은.
“흠.”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우리에게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거라.”
그렇게 그는 세쌍둥이 손주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향해 윤리타가 황급히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윤리사, 너도 인사해야지!”
“네에.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나는 멀어지는 한태극의 뒤를 향해 배꼽 인사를 한 뒤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인사했는데, 내일 만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부디 한태극이 손주들을 데리고 일찍 이곳을 떠나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윤리사, 우리도 간식 사 들고 이만 돌아갈까? 다들 기다리고 있겠다.”
“응.”
나는 윤리타의 손을 잡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편의점 안에서 윤리타는 과자류를 싹쓸이했고, 그가 사 들고 온 과자에 윤리오는 골치 아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리타는 식탁에 앉아 만찬을 즐길 뿐이었지만.
그리고 나는…….
“리사, 그게 정말이니? 한태극 의원을 만났었다고?”
“응! 단예랑 단아랑, 그리고 단이랑 같이 계셨어!”
윤사해에게 이곳에 한태극이 있음을 일러바쳤다. 내 말에 윤사해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망할 영감이 왜 이곳에… 아니, 잘 된 건가……?”
뭐가 잘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윤사해의 말을 못 들은 척 해 줬다.
***
고급 리조트의 스위트룸에서 맞이한 아침은 색다르기는 개뿔.
“룸서비스 부르면 되잖아! 왜 아침 먹으러 가야하는데? 잠 와 죽겠는데!”
“이왕 이렇게 됐는데, 여기 자랑거리를 구경해 봐야지. 그러니까 그만 좀 투덜거려, 윤리타!”
지금 우리 가족은 사이좋게 아침을 먹으러 고급 리조트의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곳의 자랑거리는 하늘을 코앞에 두고 즐기는 식사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직접 가서 즐겨야 알 수 있을 거라나, 뭐라나.
그리고 식당에 도착한 직후, 나는 그 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와……!”
“와아……!”
언젠가 접한 적이 있던 우유니 사막의 풍경이 떠올랐다.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바닥에 나는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그런 우리가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웃음소리에 저세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세상이 오빠, 부끄러워?”
“시끄러.”
그렇게 말하는 저세상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부끄러운 모양인데.
수줍음 많으신 우리 주인공님을 어떻게 놀릴까 고민하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리사!”
“단아야?”
잘못 들은 건가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단아였다.
“한단아? 쟤가 왜 여기 있어?”
저세상도 놀란 눈으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저세상에게 속닥거렸다.
“리사가 어제 단예랑 단아, 그리고 단이 만났다고 했잖아!”
“그래도 만날 일 없을 줄 알았단 말이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쌍둥이의 할아버지인 한태극이 워낙 바쁜 인간이어야 말이지.
그렇게 저세상과 속닥거리고 있는데, 단아의 뒤로 누군가 나타나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리사야. 세상이 오빠도 안녕하세요. 그리고…….”
단예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윤사해를 보고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사해 길드장님.”
“어어… 그래…….”
단예는 윤사해에게 인사한 뒤에 윤리오와 윤리타에게도 고개를 꾸벅거리며 인사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윤사해에게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단예라고 해요, 한단예. 이쪽은.”
“한단이요. 그리고 얘는 막내인 한단아고요. 단아야, 아저씨께 인사 드려야지. 형들한테도.”
단이의 뒤에 숨어 있던 단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선 고개를 까닥거리기만 했다.
그에 단예와 단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데, 누군가 다가와 단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네, 윤사해 길드장. 우리 막내 손주가 수줍음이 좀 많아서 말이네.”
한태극이었다.
한태극의 목소리에 윤사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는 달리 한태극은 기분 좋게 웃는 낯이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아침이라도 들지.”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