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축축하게 젖어가는(4)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저런 대답이 나온 이상, 장천의는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지든지 시종일관 모르쇠로 잡아뗄 테지.
그렇기에 나는 장천의를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러게요, 리사가 천의 삼촌한테 무슨 말을 한 걸까요?”
“…….”
장천의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여기요, 천의 삼촌.”
장천의는 나를 ‘탐색’하고 있다는 거였다.
때문에 나는 그의 시선을 돌리고자 손목에 끼고 있던 팔찌를 벗었다.
“저녁 먹기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리타 오빠가 음식 시키는 걸 보고 놀라서 까먹었지 뭐예요.”
나는 그렇게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제대로 작동하도록 고쳐 주세요. 리사가 위험해지면 누군가 금방 달려올 수 있도록.”
장천의가 내가 내민 것을 빤히 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당연히 그렇게 해 드려야지요.”
그러고는 내가 내민 팔찌를 입고 있던 코트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히힛, 감사합니다.”
나는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빨리 돌아오세요. 리타 오빠가 이러다 천의 삼촌 통장을 진짜로 거덜 낼 것 같거든요.”
내 말에 장천의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의 대화는 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장천의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그의 푸른 눈은 여전히 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에 나는 그대로 우리 가족이 식사 중인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장천의는 분명 각시의 저택에 왔었다. 그러니까, 유랑단의 은신처에 잠입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탄생목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요? 못 간다면서요!’
‘그래, 원래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양반의 금제를 풀어 줬을 거다.
그때는 양반 혼자서 어찌하다가 스스로 금제를 풀었나 보구나,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지.
‘꼬마야, 너 진짜 이상한 녀석이랑 엮인 것 같더라.’
희미하게 떠오르는 목소리에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요, 설은 오빠.”
오빠 말대로 이상한 사람이랑 엮인 것 같아요.
***
장천의는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에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똑똑하기도 하지.”
벌써부터 자신을 떠보려고 하다니.
“곤란하네. 아직 해외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인데.”
또한, 윤사해가 후원을 자처 중인 아이.
“저세상…….”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세상이라고 해요, 저세상. 아저씨는 누구세요?’
순진무구하게 자신을 소개하던 아이는, 제가 알던 ‘저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켜 봐야겠지.”
닳고 닳은 인간이 제 속을 감추는 것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
윤리타가 열 개 이상의 그릇을 비울 동안, 장천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 후에 사람을 보내 우리에게 사과를 전했다. 급한 일이 생겨,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난다고.
내가 장천의를 꽤나 동요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나타난 던전과 관련하여 여기저기 손을 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가 보군.”
우리에게 장천의의 소식을 알려준 그의 비서는 어떠한 긍정도 하지 않고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윤사해 길드장님의 가족 분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 하셨습니다.”
“흐음.”
장천의는 나와 나눈 대화로 동요하여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닌, 업무가 바빠 떠난 듯하였다.
“하지만 곤란하군. 아이의 팔찌를 제대로 전해 주지도 못했는데.”
“괜찮아, 아빠! 리사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천의 삼촌을 만났었거든. 그래서 팔찌 줬어!”
“그러니? 잘했구나, 리사.”
윤사해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안아들었다.
“일단 알겠네. 장천의 회장에게 좋은 저녁을 대접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게나.”
“네, 윤사해 길드장님.”
비서가 고개를 꾸벅이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럼, 곧바로 장천의 회장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윤사해가 나를 품에 안은 채 비서의 뒤를 따랐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저세상의 손을 하나씩 잡고는 나와 윤사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이동했을까?
“여기서 편하게 머무시면 됩니다.”
우리 가족은 드디어 장천의가 마련해 준 방에 도착했다.
장천의가 우리 가족을 위해 잡아준 방은 다섯이 충분히 지낼 수 있는 넓은 스위트룸이었다.
“침대 내 거!”
“이 너른 침대에서 너 혼자 자려고? 절대 안 돼, 윤리타.”
윤리오와 윤리타가 방을 구경하는 사이, 장천의의 비서는 윤사해에게 리조트 내 이용 가능한 부대시설에 관해 알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로비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혹시 궁금하신 것 있으십니까?”
“없으니 이만 가 보게나.”
“네, 감사합니다. 윤사해 길드장님. 그럼,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를.”
장천의의 비서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돌려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누군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그러니, 세상아?”
그 누군가는 바로 저세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것 같던데…….”
“아니에요, 아저씨! 엄청 잘 먹었어요. 맛있었고요.”
저세상이 윤사해의 말을 가로막고는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냥 조금 답답해서요.”
“그래?”
윤사해가 저세상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창가로 향하더니.
“조금만 열어 놓으마. 그럼 답답함이 조금 가실 거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보고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제 괜찮은데…….”
“그래도 조금만 열어 놓자구나. 아저씨도 답답하거든.”
윤사해는 그리 말하면서 나를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나는 그대로 이불 속을 파고들며 말했다.
“리사는 추운데.”
“미안하구나, 아가. 조금만 열어 놓자. 아주 조금만.”
윤사해가 두꺼운 이불로 내 온몸을 꽁꽁 싸매 주며 나에게 사과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얼굴이 무기라더니!
저렇게 처연미 넘치는 얼굴로 사과하면 누가 거절하겠냐고!
윤사해의 잘난 외모에 씩씩거리고 있는데, 안쪽 방으로 들어갔던 윤리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빠, 여기에 편의점 있어요?”
“응? 응, 지하 1층에 있다고 하더구나.”
그 말에 윤리타가 얇은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윤리타, 어디 가려고?”
“편의점.”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윤리오가 기가 차다는 듯이 윤리타를 쳐다봤다.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파? 너도 참 대단하다.”
“누가 뭐 먹으러 간데? 그냥 구경 가는 거거든!”
그러면서 하나씩 사겠지. 이건 식후의 달콤한 디저트라면서 말이다.
“리타 오빠! 리사도 갈래!”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내 말에 윤리타가 좋다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상이도 같이 갈래?”
“아니요, 저는…….”
저세상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 대답에 윤리타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저세상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나중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윤리오 통해서 바로 말해.”
“네, 리타 형. 다녀오세요.”
저세상이 인사해 주자, 윤리타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는 순간.
“리타, 리사.”
윤사해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낯선 사람 조심하고, 주변에.”
“스킬이 걸려 있는 흔적이 보이거나 하면 바로 도망가라는 거죠?”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으니 별 다른 말은 안 붙이마.”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오렴.”
“네, 아빠!”
“응! 금방 돌아올게!”
윤리타가 사들인 군것질들을 얼마나 빨리 먹느냐에 귀가 시간이 달라질 것 같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는 그리 답해 주며 윤리타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러기 무섭게 윤리타의 질문이 내게 꽂혔다.
“리사, 오늘 세상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 세상이가 갑자기 내 눈치를 보네.”
윤리타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심드렁하게 답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리타 오빠. 오빠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거든.”
“그럼?”
“으음.”
나는 저세상에 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하다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게 현명한 대답인 것 같았다.
“뭐야, 윤리사. 알고 있는 것 있으면 오빠한테 빨리 말해.”
“싫지롱.”
“윤리사, 너…….”
윤리타가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내게 말했다.
“간식 안 사 준다?”
헉, 안 되는데! 그렇지만 저세상이 숨기고 있는 것들은 입 밖으로 쉽게 꺼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간식은……!
“네가 좋아하는 바나나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발라 먹을 거야.”
망할 윤리타! 치사하게 음식으로 나를 회유하려고 하다니!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간식이냐, 저세상의 비밀 사수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게…….”
하지만.
“사 준다면서! 사 준다고 했잖아, 망할 할배야!”
“한단아, 네 이놈! 당장 일어서지 못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복도 가운데서 대(大)자로 뻗어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은백색의 머리칼을 단발로 가지런히 정리한 아이.
연두색 두 눈을 사납게 찡그리고 있는 여자 아이는.
“단아?”
익히 알고 있는 나의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