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축축하게 젖어가는(3)
나와 저세상을 향해 살갑게 인사를 건넨 남자의 정체는 윤사해에 의해 밝혀졌다.
“장천의 회장, 이제 그만 비켜 줬으면 하는데.”
“아, 죄송합니다. 고객님의 자녀분과 맡고 계신 아이가 보여 준 무대가 워낙 인상 깊어서요.”
남자가, 아니.
장천의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몸을 틀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장천의……?”
“하핫, 저인 줄 몰랐었나 보군요.”
장천의가 내 목소리를 듣고서 방긋 웃었다.
“저도 처음에 리사 양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몰라보게 자라셔서요.”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미간을 좁혔다.
“아이한테 아는 척 좀 그만하게.”
“에이,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리사 양이 먼저 저를 찾았다면서요? 아는 척 좀 할 수 있지.”
하지만 윤사해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며 나를 안아들었다. 저세상은 제 뒤로 보내고선 말이다.
우리가 타온 두 개의 경품은 윤사해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기요, 고객님? 누가 보면 제가 아이들을 위협하려고 한 줄 알겠습니다?”
장천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윤사해는 그 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윤사해의 태도에 장천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어휴, 애들 과보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네. 저러다 리사 양이 시집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나 몰라.”
“지금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 했답니다, 고객님.”
장천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방긋 웃고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리오 군과 리타 군은 보이지 않는군요. 어디 가셨습니까?”
“사이좋게 놀고 있을 거라네.”
윤사해가 말을 뱉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콰과과광-!
롤러코스터와 흡사하게 생긴 놀이 기구였다.
윤사해가 지나간 지 오래인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걸 타면서 말이지.”
“하긴, 이곳에는 훗날 나라를 이끌어갈 청소년들께서 좋아할 법한 놀이 기구가 많지요.”
장천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래서 고객님께서 아이들을 맡고 계셨던 거군요? 리오 군과 리타 군에게 자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윤사해는 정답이라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장천의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하고 계시는군요.”
“시끄럽네.”
윤사해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보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저녁때까지 쭉 함께 다니려는데 어떻습니까?”
“거절하겠네.”
윤사해가 장천의를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객님.”
장천의는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들려온 대답에 윤사해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고객님! 같이 좀 다니자니까요?”
장천의가 우리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윤사해는 장천의를 쫓아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겼나 보다.
“그런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리사 양은 제가 안겠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세상 군만 살피십시오.”
“거절하지.”
장천의의 말에 일일이 대꾸해 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장천의와 함께 추구했던 목적지에 다다랐다.
[뽀쟉뽀쟉 볼 풀존]
드러난 간판에 장천의가 입술을 오므렸다.
“오… 그렇죠, 이런 곳도 있었죠. 잊고 있었네요…….”
장천의는 목소리의 끝을 흐리면서 저세상을 흘긋거렸다.
닿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저세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천의가 그런 저세상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방긋 웃으며 윤사해에게 말했다.
“애들 노는 곳으로 잘 선택하셨습니다, 고객님! 내부에 보호자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장천의는 그리 말하면서 우리를 볼 풀존 안으로 이끌었다.
“저희는 여기 앉아서 아이들을 보도록 하죠. 리사 양, 세상 군과 안에 들어가서 즐겁게 노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저세상의 손을 잡고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저세상과 함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간 뒤 그와 대화를 나눴다.
“이상한 아저씨인 거 같아.”
“언제는 삼촌이라며?”
“어떻게 부르든 리사 마음이야.”
저세상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내게 말했다.
“네가 생각한 게 맞아.”
“응?”
“저 아저씨, 이상한 사람 맞다고.”
다소 짜증이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저세상에게 물었다.
“세상이 오빠는 천의 삼촌을 잘 알고 있나 봐?”
“이제는 또 삼촌이야?”
“어떻게 부르든 리사 마음이라니까? 어서 대답이나 해 줘!”
나의 재촉에 저세상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꾹 깨물었다. 이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나 싶었지만.
“잘 몰라.”
저세상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저세상이 고개를 푹 숙이고선 손톱의 끝을 뜯기 시작했다.
“그럴 것 같아서 그런 거야.”
확실히, 내가 읽은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과 장천의는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세상의 저 말은 거짓말이었다.
***
처음에는 볼 풀존, 두 번째는 유아용 트램펄린이 설치된 놀이 기구였다.
그리고 세 번째.
동물 먹이 주기 체험까지 마친 나와 저세상은 윤사해와 함께 윤리오와 윤리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리오 군과 리타 군이 너무 안 오는군요. 길이라도 잃은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
장천의도 같이였다.
그의 말에 윤사해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윤사해의 불안을 덜어 주고자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라도 사용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러게! 처음부터 내가 말한 길로 왔으면 됐잖아, 윤리오!”
“아닌 줄 알았지.”
다행히도 윤리오와 윤리타는 아무 탈 없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는 도중에 윤리오 때문에 길을 잘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장천의가 윤리오와 윤리타를 타일렀다.
“하하, 싸우지 마십시오. 그보다 리오 군과 리타 군도 정말 많이 컸습니다.”
윤리오가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오랜만이에요, 천의 삼촌.”
그 뒤를 이어 윤리타가 장천의에게 인사하며 그에게 물었다.
“저희 중학교 졸업할 때 마지막으로 뵌 것 같은데, 맞나요?”
“맞답니다, 리타 군. 그런 걸 기억해 주시다니 너무 고맙군요.”
“그야…….”
윤리타가 윤사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윤리오가 윤리타가 하려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저희 중학교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주셨었잖아요. 아버지는 오지도 않으셨는데.”
“크흠, 흠.”
윤사해가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장천의에게 눈짓했다. 어서 식당으로 안내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장천의는 윤사해가 원하는 바를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웃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은.
“아무도 없군?”
손님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윤사해의 말에 장천의가 웃는 낯으로 손님이 없는 이유를 말해 줬다.
“하루 통째로 빌렸습니다. 고객님, 잊으셨습니까? 제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했을 텐데요.”
“그렇기는 했다만, 이래도 되나?”
“당연히 되지요.”
하긴, 장천의는 제2 CW 테마 파크의 실소유자니까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부자일 장천의가 우리를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한 뒤 말했다.
“먹고 싶은 것들 마음껏 시키십시오. 제 통장을 거덜 내도 된답니다.”
장천의의 통장을 거덜 낸다니. 과연 이룰 수 있는 일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리타 군, 먹성이 좋군요.”
“성장기니까요.”
윤리타와 함께라면, 장천의의 통장을 거덜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윤리타는 너무 많이 먹었다.
윤사해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이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장천의는 그런 윤사해를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이야기들 나누고 계십시오.”
윤사해가 내 입에 파스타를 말아 넣어 주고는 말했다.
“금연 중인 줄 아는데.”
“아이, 참! 고객님! 한 대 피우러 나가는 거 아닙니다! 애들이 있는데 제가 피우겠습니까?”
장천의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다가 그대로 일어났다.
“리사?”
“화장실 다녀올래.”
내 말에 윤사해가 자리에서 일어날 모양새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랑 같이 가자꾸나.”
윤사해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갈 수 있겠냐고, 그리 묻기만 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때마침 지나가는 종업원의 소매를 붙잡았다.
“언니, 리사랑 같이 화장실 가 주면 안 돼요?”
“어……?”
“같이 가 주신다고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언니.
하지만 윤사해의 과보호를 뿌리치려면 이 방법밖에 없네요.
“윤리사.”
윤사해가 나를 타이르려는 듯이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지만.
“리사는 언니랑 같이 화장실 다녀올게, 아빠!”
“리사!”
내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나는 그대로 고급 레스토랑을 벗어났고, 그 즉시 종업원에게 말했다.
“언니, 돌아가셔도 돼요.”
“그래도 될까?”
“네! 그런데 우리 아빠 눈에는 안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니가 크게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언니를 돌려보낸 후, 나는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제2 CW 테마 파크는 실내에 자리한 놀이 공원이었지만, 군데군데 바깥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천의 삼촌, 담배 피우러 나가는 거 아니라면서요.”
“…….”
장천의가 현재 서 있는 곳이 딱 그런 장소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장천의가 흠칫, 몸을 떨고는 고개를 돌렸다.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구둣발로 비비는 건 덤이었다.
“하핫. 못 본 척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리사 양?”
“천의 삼촌이 하는 거 봐서요.”
나는 장천의를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리사가 저번 주에 엄청 아팠었어요.”
정확히는, 이 주 전이었을 거다.
“열병을 앓았었대요. 리사는 기억 못 하지만. 그런데요, 천의 삼촌.”
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열병을 앓았던 것보다 더 아팠지만, 리사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있거든요.”
양반과 각시의 기억이었다.
나는 두 눈을 낮게 내리깔고선 장천의에게 물었다.
“왔었죠? 향화 언니의 저택에.”
잠깐의 침묵.
그 끝에서 장천의가 답했다.
“무슨 말입니까, 리사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