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88)화 (88/500)

88화. 축축하게 젖어가는(2)

하지만 말이 쉽지. 나랑 저세상이 어떻게 무대를 장악하겠어?

<[F, 숙련 가능]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바운스를 느껴봐!>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조금 전에 획득한 스킬을 살폈다.

<※ 발동 조건: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기십시오.>

장난하나 싶었다.

흐르는 음악에 어떻게 몸을 맡기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회자를 보며 방긋 웃었다.

“세상이 오빠 말대로 리사가 엄청난 걸 보여 줄게요!”

어찌됐든 획득한 스킬, 한 번 유용하게 써 볼 마음이었다.

나의 외침에 사회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

그렇게 사회자는 과한 리액션을 한 번 취해 준 뒤, 무대에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박수 한 번 더 주세요!”

짝짝짝-!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은데, 내려가면 안 되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리사 친구? 보여 준다는 엄청난 게 뭘까요?”

묻는 목소리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춤이요! 세상이 오빠랑 같이 춤을 출 거예요!”

저세상이 장난하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어쩌라고. 기껏 무대에 올라왔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내려가려고?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저세상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사회자를 쳐다봤다.

“좋아요, 리사 어린이! 혹시 원하는 노래 있어요?”

“으움.”

‘마리아’로 지냈던 세계에서는 아무 뽕짝이나 틀어 달라고 했겠지만…….

“곰 세 마리요!”

내 나이 일곱 살.

트로트에 몸을 싣기에는 무리인 나이였다.

참고로 이 세계에도 ‘곰 세 마리’라는 동요는 존재했다. 내가 알고 있던 가사와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사회자가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무대 아래의 음향 팀에게 손짓했다.

“좋아요! 한 번 가 봅시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대에 설치된 커다란 스피커에서 익숙한 음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먼저 허리에 손을 얹고는 무릎을 까닥이는 거야.

그간 자라나리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을 이번 기회에 마음껏 뽐내려고 했지만.

<각성자, ‘윤리사’가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깁니다.>

빌어먹을 스킬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 잠깐만.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바운스를 느껴 봐!>

시바, 미쳤냐고.

눈앞에 나타났던 시스템 창이 사라지자마자 명랑하기 그지없던 동요의 음률이 미친 듯이 튀기 시작했다.

도저히 동요의 가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향이었다.

이에 사회자가 잔뜩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고는 음향 팀을 내려보는데, 무대 아래의 음향 팀에서 사회자를 향해 두 팔을 ‘X’로 교차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겠지, 이건.

“윤리사, 너……!”

내 스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저세상이 경악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 도로 담을 수는 없겠지.

그 때문에 나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비각성자, ‘저세상’에게 <[F, 숙련 가능]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바운스를 느껴 봐!>가 적용됩니다.】

하지만 혼자 죽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저세상의 몸도 움직이게 하였다.

눈앞에 나타났던 시스템 창이 사라지자마자 저세상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윤리사! 야!”

원해서 저러는 건 아닌 듯싶었다.

저세상이 울부짖었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광장을 꽉 채우는 사운드에 먹히고 말았다.

하하, 세상이 오빠! 우리 한 번 무대를 장악해 보자!

***

“와우.”

장천의는 무대 위에서 있는 힘껏 몸을 털어대고 있는 두 아이를 보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부의 고위 인사와의 만남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곧장 윤사해를 만나러 왔더니…….

“이게 무슨 일이람.”

무대를 꽉 채우고 있는 음악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 그랬는데.

“반달가슴곰이 북극곰이 됐군요. 그것도 아니면 불곰.”

“네?”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장천의의 곁에 있던 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장천의가 그런 비서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나중에 음향 한 번 체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회장님.”

장천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 자리에 있을 누군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장천의는 찾고자 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고객님.”

“잠깐 그 입 좀 닥치고 있게.”

윤사해를 부른 죄밖에 없는 장천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나 윤사해는 장천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대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장천의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지겠군.’

무대 위를 제 집 마냥 헤집고 다니는 아이들이, 윤사해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무대를 구경 중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뭐, 닥치라는데 닥치고 있어야지.’

장천의는 윤사해의 옆에서 아이들의 화려한 춤사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윤리사와 저세상의 격정적인 몸놀림을 보며 장천의는 하나 깨달았다.

동요에도 클라이막스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 귀엽네!

아빠 곰에서 엄마 곰, 엄마 곰에서 애기 곰.

가사를 내뱉는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려 가는가 싶더니.

-으쓱! 으쓱! 잘하네!

마지막 구절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흡사, 불곰이 자신의 가족을 반달가슴곰에게 열렬하게 소개해 주는 것 같았던 음악이 끊겼고.

두 아이는 그에 맞춰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란히 한쪽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퍼버벙-!

동시에 무대에 설치된 폭죽이 화려하게 터지면서 끝을 장식했다.

“와…… 와아아!”

윤리사와 저세상은, 무대를 장악하다 못해 뒤집어 버렸다.

***

시바, 폭죽은 왜 또 터진 거야?

무대를 가렸던 희뿌연 연기가 이내 사라지고.

“와아아아!”

“앵콜! 앵코올!”

사람들이 나와 저세상을 향해 환호했다. 그런데 잠깐, 앵콜 누구야? 장난해?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나도 모르게 번쩍 들었던 팔을 내렸다.

“와아! 리사 친구, 그리고 세상 친구! 진짜 너무 잘 추던데요?!”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잘 출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저세상도.

저세상은 허리를 굽히고선 흘러내린 땀방울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고선 말이다.

“망할! 백정이랑 싸울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음, 들린 말은 무시하자.

사회자는 지친 기색이 만연한 나와 저세상에게 귀엽다느니 뭐니 하면서 우리에게 칭찬을 쏟아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어때요, 리사 친구? 세상 친구랑 한 번 더 추는 건?”

뺨 맞고 싶어요, 아저씨?

나는 사회자를 향해 말없이 방긋 웃어 주었다.

내가 지어 준 웃음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몰라도, 사회자는 앵콜을 외치는 대신 우리에게 경품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애가 두 명인데, 경품 하나만 주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줘라, 우우우!”

하지만 나와 저세상의 춤을 구경했던 관객 분들이 경품을 고를 기회를 지워 버렸다.

대신.

“하긴, 좀 그렇죠? 리사 친구와 세상 친구가 그렇게나 멋진 무대를 보여 줬는데요!”

사회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사회자의 권한으로! 남은 두 상품은 사이좋게 리사 친구와 세상 친구에게 드리겠습니다!”

“와아! 잘한다!”

“그렇지! 그래야지!”

우리의 무대를 구경했던 사람들이 사회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물론, 나와 저세상에게도 잘 됐다면서 손뼉을 쳐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아 있던 두 개의 상품을 사이좋게 품에 하나씩 안게 되었다.

사회자가 나와 저세상을 무대의 정중앙에 데리고 와서는 말했다.

“모두, 마지막으로 박수 한 번 쳐 주세요!”

나와 저세상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뒤로하며 후다닥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뒤늦게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인지,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빠!”

“아저씨!”

우리는 곧장 윤사해에게로 달려갔다. 윤사해가 우리를 보고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미소를 보였다.

효도 한 번 제대로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윤사해가 우리를 향해 지어 준 미소는 찰나의 순간에 그쳤다.

“안녕하십니까, 리사 양? 정말 눈이 즐거운 무대였습니다.”

윤사해를 등지고서 우리를 반긴 남자 때문이었다.

뭐야, 아저씨 누구세요?

남자가 푸른 눈을 둥글게 접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새 많이 컸네요. 그리고…….”

남자의 시선이 내 뒤의 저세상에게로 향했다.

“세상 군은 처음 뵙는군요. 안녕하십니까?”

건네진 인사에 저세상이 물끄러미 남자를 보았다.

그것도 잠시, 저세상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세상이라고 해요, 저세상.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렇게 말한 저세상은 남자를 보며 방긋 웃어 주었다.

우리 주인공님의 보기 힘든 말간 웃음에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에게 보여 주었던 눈웃음은 깔끔하게 지우고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