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가을에 내리는 비(4)
오랜만에 마음껏 뛰어다녔다.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어 바닥난 체력에 지치기는 개뿔.
나의 정신은 아주 맑았다.
낮잠 시간이라 잠들어야 했는데, 또렷한 정신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가 않은지, 내 주변에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응?”
그런데 한 명이 없었다.
단예와 단아, 둘 사이에서 눈을 꼭 감고 잠들어있어야 할 단이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단이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단이가 보였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단이에게 다가갔다.
단이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리사, 안 자?”
“응, 잠이 안 와. 나도 단이랑 같이 책 읽을래.”
물론, 책을 읽을 생각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나는 단이의 옆에 앉고선 그에게 물었다.
“있잖아, 단이야. 단이는 각성자라고 했지?”
“응, 이상 각성자.”
단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다섯 살이었나? 그때 각성했어.”
“어쩌다가?”
“왜인지는 몰라.”
단이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상 각성자가 된 아이들 대부분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각성한 경우거든. 제대로 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리사.”
“아니야!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다급하게 두 손을 젓고선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단이는 이제 다 나은 거야?”
“응, 아마도? 그치만 스킬이 가끔 컨트롤 되지 않을 때가 있기는 해.”
“그거 괜찮은 거야?”
“당연히 괜찮지 않지.”
하지만 단이는 말했다.
“그래도 곧 괜찮아질 거야. 이상 각성자를 연구하는 기관에 매주 방문하고 있거든.”
“단이가 가진 스킬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
“응, 맞아.”
단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줄곧 혼자서 스킬을 다루려고 했었는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혼자서 다루려고 했다고?”
“스위스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는 그랬어.”
“그때라면, 엄청 아팠을 때 아니야? 단예랑 단아가 그랬었는데.”
내 말에 단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랬지. 오늘 죽나, 내일 죽나. 그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정녕 저것이 일곱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소리랍니까?
내 놀란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단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팠어도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거든. 어쨌거나 내가 가지게 된 스킬이잖아?”
그래서 단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스킬을 다루고자 했단다.
자신으로 인해 남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단이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뭔가 말하니 부끄럽네.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닌데.”
“아니야, 단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단이의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단이는 충분히 자랑해도 돼. 그리고 자랑스러워해도 돼.”
네 자신을.
단이가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리사.”
그러면서 단이는 읽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한 번 볼래, 리사?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에 단이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주위로 산뜻하게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와…….”
자라나리 유치원의 꽃님반이 순식간에 정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향화 언니…? 설은 오빠……?”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각시가 양반의 손을 잡고서 꽃이 만발해 있는 정원을 거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닌, 곱기 그지없는 얼굴로.
양반과 함께 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상대방이 가장 바라는 소망을 환상으로 보여 줄 수 있어.”
그 웃음소리 사이로 단이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께서 L급의 회복 아이템을 구해다 주시기 전, 나는 줄곧 머릿속으로 그렸었어. 내가 가진 스킬을 어떤 식으로 다룰지…….”
단이가 나를 보고는 씁쓸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 스킬을 다루는 게 미숙하네. 리사, 너를 울리다니.”
“아니야.”
나는 황급히 눈가를 세게 닦았다.
“너무 보고 싶었던 걸 봐서 그래. 리사는 괜찮아.”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던 꽃들이 빠른 속도로 저물기 시작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주위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단이가 쥐고 있던 내 손을 놓아 주고는 말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제대로 보여 줄게. 리사. 네가 웃을 수 있는 환상을.”
왜인지 모르게, 그때에도 나는 다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배시시 웃으며 단이에게 말했다.
“기대할게.”
나의 대답에 단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단예와 똑같은 푸른 눈이 둥글게 접히는 것을 보며, 나는 단이에게 물었다.
“단이야, 혹시 가르쳐 줄 수 있어? 머릿속으로 어떻게 상상했는지.”
병원에서 눈을 뜨고 나서, 줄곧 후회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탄생목에서부터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양반의 스킬에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걸어 주었다.
그에 따라 나 역시 그의 스킬인 <[A, 숙련 불가] 설국의 왕>을 사용할 수 있게 됐었지만…….
아무것도 못했었다.
오직, 양반에게 모든 걸 맡겼다.
왜 그랬을까? 같이 싸울 수도 있었는데.
***
‘어려운 건 없어, 리사. 어떤 상황을 가정한 후에, 내가 가진 힘을 어떤 식으로 다루면 가장 큰 효과를 부를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는 거야.’
그것이 방법이라면서, 단이는 친절하게 내게 설명해 줬다.
덕분에 나는 류화홍과 함께 유치원에서 돌아온 직후, 저세상과의 간식 타임을 가볍게 넘겨 버렸다.
단이가 가르쳐 준 방법을 그대로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먼저 머릿속으로 그렸다.
나의 동료가 가지고 있는 스킬 하나에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사용하는 상황을.
스킬이 적용됨과 동시에 나의 동료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힘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동료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힘을 사용하게 되겠지.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까다로운 조건은 스킬이 적용된 상대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내 시야에서 대상자가 벗어나는 순간, 스킬은 해제되고 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건…….
양반과 헤어지기 직전 활성화된 스킬인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을 사용해 보았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발동됩니다.】
【각성자, ‘윤사해’를 인지합니다.】
나의 시야에, 이매망량에서 한창 업무를 보고 있는 윤사해의 모습이 잡혔다.
하지만 나는 윤사해만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방.
스킬을 사용 중인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나의 방이 윤사해의 모습 뒤로 펼쳐지고 있었다.
“눈 아파.”
각기 다른 장소를 동시에 보고 있으니, 눈가에 절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오래지 않아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의 사용을 멈췄다.
“눈의 피로를 어떻게든 이겨내야겠네.”
그래야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 위에 대(大)자로 몸을 눕혔다.
유치원에서 실컷 뛰놀고 온 다음의 피로가 뒤늦게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지마는.
‘하지만, 그렇게 아팠어도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거든. 어쨌거나 내가 가지게 된 스킬이잖아?’
문득 떠오른 단이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단이는 자신의 스킬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원치 않아 스킬을 계속해서 연마했다고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머릿속으로나마 상황을 그려 보면서.
그렇게 자신의 스킬을 다스리고자 했다고 단이는 말했지만.
나의 바람은 단이와는 달랐다.
내가 원하는 건, 나의 스킬로 모두를 구하는 일이었다.
비록,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하고 싶었다.
【<각성, 그 후>의 이야기에 개입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망설임 없이 ‘YES’를 누른 걸 거다.
윤사해뿐만 아니라 죽어나간 수많은 조주연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나는 조막만한 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때린 뒤, 다시 한 번 더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을 사용했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발동됩니다.】
【각성자, ‘윤리오’를 인지합니다.】
이번에 내 눈에 잡힌 사람은 윤리오.
나는 윤리오의 하굣길을 지켜보며 눈의 피로를 극복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은 하나.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발동됩니다.】
【각성자, ‘윤리타’를 인지합니다.】
익숙해지는 거였다. 이 빌어먹을 스킬에.
윤리타가 윤리오와 함께 집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윤리타에게 건 스킬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나보다 작은 남자애에게 스킬을 걸어 보려고 했는데.
“시바…….”
눈꺼풀을 강하게 내리누르는 피로에, 나는 그만 고꾸라져 잠들고 말았다.
망할! 저세상이 뭐하고 있는지 염탐 좀 해 보려고 했더니!
***
그렇게 속절없이 단잠에 빠진 후, 장천의와 약속이 잡힌 토요일 아침.
후두둑, 투둑-!
가을의 장대비가 창문을 시원하게 두들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