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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84)화 (84/500)

84화. 가을에 내리는 비(2)

쨍그랑-!

저세상의 손에서 떨어진 플라스틱 컵이 식탁을 시끄럽게 울렸다.

“괜찮니, 세상아?”

“네? 네… 괜찮아요…….”

저세상이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픈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윤리오가 저세상이 흘린 물을 닦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닦을게요.”

하지만 윤리오는 꿋꿋하게 물을 닦아 주었다.

“리오 형, 저는 정말 괜찮은데.”

“가만히 있어. 옷은 안 버렸지?”

“네? 네…….”

“그러면 됐어.”

윤리오가 그렇게 말하고는 저세상이 흘린 물을 모두 닦아내었다.

윤리타는 저세상이 떨어뜨린 플라스틱 컵을 싱크대에 넣고선, 다른 컵을 저세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죄, 죄송해요.”

저세상이 우물쭈물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윤리오와 윤리타가 자리에 도로 앉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세상아.”

“맞아, 컵 좀 놓칠 수 있지.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저세상의 고개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말했듯, 아파 보이지는 않았고.

내가 꺼낸 ‘장천의’라는 이름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왜지?’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은 단 한 번도 장천의와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 도대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하지만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윤사해가 나에게 물었다.

“리사, 그 인간을… 아니, 천의 삼촌은 갑자기 왜 만나고 싶다는 거니……?”

『각성, 그 후』에서 윤사해는 장천의와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장천의를 ‘삼촌’이라고 부른 건데, 호칭을 제대로 선택한 것 같았다.

나는 윤사해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손목을 보여 주었다.

손목에는 연보라색의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정중앙에 토끼 한 마리가 그려진, 앙증맞은 팔찌가 말이다.

윤사해가 내가 보여 주는 팔찌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왜…….”

“고장 났어. 리사가 몇 번이나 토끼를 눌렀었는데.”

언제 어디서 팔찌에 그려진 토끼를 눌렀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윤사해는 내가 언제 어디서 그 팔찌를 이용하려 했는지 알았다는 듯이, 짐짓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리사. 천의 삼촌과 약속을 잡아 보마.”

윤사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세상은 한 번 더 물을 쏟고 말았다.

아니, 저 자식이 진짜 왜 저래?

장천의는 저세상의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전에 실종된 상태였다.

즉, 저세상과 장천의는『각성, 그 후』에서 서로 접점이 없던 사이었다는 말.

그렇기에 저세상이 장천의에게 보이는 반응은, 확실히 수상쩍은 것이었다.

***

해가 저문 지 오래인 늦은 밤인데도 장천의의 집무실은 불이 환하게 켜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고객님, 리사 양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장천의가 그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바로 폈다.

윤사해의 갑작스런 전화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의 딸이 자신과의 만남을 자처하고 있단다.

장천의의 질문에 그에게 연락을 넣었던 윤사해가 대꾸해 주었다.

-그래, 우리 딸아이가 자네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더군.

윤리사가 들었더라면 그 정도는 아니라면서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을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 윤리사는 없었고, 그렇기에 장천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윤사해에게 물었다.

“리사 양이 저는 왜 보고 싶어 한답니까?”

윤사해가 그 질문에 답해 주기도 전에 장천의가 입을 나불거렸다.

“혹시, 이번에 새로 발매한 7세 아동용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원한다면 하나 보내 주겠다고, 장천의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려던 순간이었다.

-그건 모르겠고, 자네가 리오에게 줬던 팔찌 말이네.

능청스레 말을 이으려던 장천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윤리오에게 준 팔찌는 윤리사의 소유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이를 알고 있는 장천의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서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네, 갑자기 그건 왜…….”

-고장 난 것 같더군.

괜히 들었던 긴장감이 맥없이 풀리는 느낌이다.

장천의가 바로 폈던 허리를 그대로 소파에 기대고서는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럼 가져와 주십시오. 아니면 사람을 보낼 테니 고장 난 팔찌를 그분 편으로 주시겠습니까? 고쳐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새로 하나 만들어 주겠다는 그 말을, 장천의는 하지 못했다.

-장천의 회장.

윤사해가 그의 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자네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더군.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세.

그 말에 장천의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윤사해의 막내 딸, 윤리사.

일곱 살 난 그의 아이가 돌연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사실은 암암리에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장천의는 윤리사가 왜 입원을 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윤사해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식사를 대접해 준다고 했었지? 이번 기회에 그래 주면 고맙겠군. 애들도 다 같이 데려가겠네.

평소라면 환영했을 제안이었다.

그야, 식사를 핑계로 윤사해가 보호 중인 저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으니.

하지만.

‘이거 불안한데.’

장천의가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장천의 회장?

“네, 고객님. 잠시 일정을 확인 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장천의는 불안하더라도, 윤사해의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할 생각이었다.

대신.

“만날 장소와 일정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네가 원하는 대로?

“네, 고객님. 오랜만에 고객님의 자녀분들을 만나는 건데…….”

장천의가 저세상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방긋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근사하게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어떻습니까?”

장천의가 그렇게 묻고는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윤사해에게서는 금방 답이 돌아왔다.

-좋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그에 장천의는 안도했다.

***

맞이한 아침.

윤사해는 우리에게 장천의와의 만남이 성사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 주말에 천의 삼촌이랑 만날 거라는 거죠, 아버지? 송파구의 제2 CW 테마 파크에서.”

“그런데 아빠, 거기 이번에 새로 지어진 테마 파크 아니에요? 아직 개장 안 했을 텐데.”

윤리타의 말에 윤사해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에 가오픈을 하는데, 그때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는구나.”

“진짜요? 앗싸!”

윤리타가 환호했고.

“아버지, 정말이에요? 가오픈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은 추첨제로 뽑힌 천 명뿐이라고 들었는데……!”

윤리오는 놀라워했다.

윤리오의 말에 윤리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윤리오. 거기 가오픈하는 거 알았어?”

“응, 리사랑 세상이 데려가려고 응모했었는데 떨어졌었거든.”

“나랑 아빠는? 추첨되면 리사랑 세상이만 데려갈 생각이었어?”

“아버지라면 몰라도 너는 안 데려갈 생각이었어.”

“윤리오, 너무해!”

윤리타와 윤리오가 시끌시끌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세상은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었다.

윤사해가 건네준 소식이 그에게는 불행인 모양이었다.

나는 저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윤사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빠, 천의 삼촌이랑 주말 언제 만나는데?”

“토요일과 일요일 둘 모두.”

저세상이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말이다.

나는 저세상이 보여 준 표정 변화에 질색했다가 윤사해를 보며 물었다.

“어디서 자는데? 근처 호텔?”

“테마 파크 내에 리조트가 있는데, 예약을 잡아 준다더구나. 가장 좋은 방으로.”

“우와! 천의 삼촌 대박!”

윤리타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윤리사, 가서 재미있게 놀자!”

그 말에 윤리오가 미간을 좁혔다.

“세상이는?”

“당연히 세상이도 같이 가지!”

윤리타는 저세상을 다른 한쪽 팔로 안아 들고는 해맑게 웃었다.

“윤리타, 그러다 애들 놓치면…….”

“걱정도 팔자셔! 애들 안 놓칠 테니, 윤리오 너는 청해진한테 자랑이나 해 줘!”

“오케이.”

윤리오가 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윤리타의 말대로 청해진에게 자랑할 모양새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우정이네.

그나저나.

「“손익을 철저하게 계산하는 놈이었지. 장사치가 따로 없었단다.”」

『각성, 그 후』에서 윤사해는 장천의를 ‘손익을 철저하게 계산하는 장사치’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왜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윤사해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우리에게 미소를 보여 주면서도 말하는 내내 이 상황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어쨌든.

‘팔찌 하나 고장 났다고 이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만약 그랬으면, 진작 새로운 팔찌를 내게 선물해 줬을 거다. 만나자는 연락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그런데 장천의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켕기는 게 있나 본데.

윤사해가 아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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