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가을에 내리는 비(1)
윤사해의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병원이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도 저세상이 내 곁에 있었다.
“너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어.”
“그렇게나 오래?”
“응, 아저씨랑 형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지? 나는 너 죽는 줄 알았다고.”
저세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몫으로 나온 흰 쌀 죽을 호호 불고는.
“병원 밥인데도 맛있네?”
자기가 먹어 버렸다.
뭐지, 이 새끼?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저세상이 그 순간 내 입에 죽을 밀어 넣어 주었다.
“너도 먹어 봐.”
나도 모르게 하얀 죽을 삼켜 버렸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이 오빠, 미각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리사는 맛없는데.”
“그래도 먹어. 빈속으로 계속 있을 거야?”
그러기는 싫었다. 결국, 나는 불퉁한 얼굴로 저세상이 내민 숟가락을 쥐고서 죽을 떠다 먹었다.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는?”
“학교 가셨지.”
“그러는 세상이 오빠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저세상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걱정돼서.”
“아하, 그렇구나.”
아니, 잠깐.
나는 죽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저세상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혈색이 도는 고운 피부가 보였다.
그와는 대조적인 검은 머리칼은 결이 좋았고, 그와 똑같은 색을 띤 두 눈은 생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세상은 할미의 숲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저세상이 아닌가?”
“뭐라는 거야? 헛소리 말고 빨리 먹기나 해. 곧 아저씨 오실 거야.”
저세상의 말에 나는 잠자코 흰 죽을 먹기 시작했다. 윤사해가 많이 걱정했을 텐데, 아픈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그 때문에 나는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고, 그러기 무섭게 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세상아, 리사가 깨어났다고?”
“네, 아저씨.”
윤사해가 다급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업무를 보다가 급히 온 차림새였다.
류화홍이 데려다준 모양인 것 같았지만, 윤사해의 주변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류화홍은 지금 여기서 중요한 건 아니었고.
“아빠!”
“리사……!”
나는 윤사해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윤사해는 그런 나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윤사해가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선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 역시 윤사해를 있는 힘껏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리사가 미안해.”
“우리 리사가 아빠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을까?”
“리사가 걱정시켰잖아!”
윤사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단다. 몇 번이나 아빠를 걱정시켜도 괜찮아. 하지만.”
윤사해가 내 이마에 얼굴을 맞대고선 빌듯이 간절하게 말했다.
“다치지만 마렴. 아프지도 말고.”
“응…….”
이 순간, 나는 안도했다.
윤사해와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
나는 깨어난 후에도 각종 검사를 받느라 병원에 일주일을 더 입원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윤사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닦달하여 물어볼 만도 하건만, 윤사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길드의 업무는 뒤로 미뤄 두고 나를 간호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윤사해가 길드의 업무를 완전히 미루고 있는 건 아니었다.
급한 일은 서차웅에게서 넘겨받아, 내 병실에서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지금도 윤사해는 서류를 보는 중이었다. 역시, 길드를 운영하기란 쉽지 않은 거였다.
나는 윤리오가 사다 놓은 바나나 하나를 입에 물고선 그 모습을 구경 중이었는데.
‘와씨, 잘났어.’
뉘 집 아빠인지 인물 참 훤칠하구나 싶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몰라도, 윤사해가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내게 말했다.
“내일이면 퇴원이구나.”
“응!”
드디어 퇴원이었다.
“하고 싶은 거 없니? 가고 싶은 곳이라거나.”
묻는 말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꽃.”
“꽃?”
윤사해가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윤사해를 보며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응, 꽃을 심고 싶어. 붉고, 하얀 꽃들을. 그리고 해바라기도 심고 싶어!”
“그래…….”
윤사해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일 아빠랑 같이 꽃을 사러 가자꾸나. 원하는 건 뭐든 고르렴, 리사.”
당연히 그렇게 할 거랍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내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 지긋지긋한 병실 생활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맞이한 다음 날.
다행히도 나는 오전 9시가 되자마자 윤사해와 함께 병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는 근방에서 제일 크다는 꽃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웬 꽃이야?”
저세상도 같이였다.
나는 붉은 장미 모종을 몇 개 고르며 말했다.
“세상이 오빠, 뭘 모르는구나? 기분 전환할 때는 꽃이 최고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저세상의 귀에 꽃 한 송이를 꽂아 주었다.
나와 윤사해, 그리고 윤리오와 윤리타의 두 눈을 똑 닮은 보라색 꽃이었다.
꽃의 이름은 스카비오사.
이름 한 번 더럽게 어렵다 싶었다.
저세상에게 기분 전환에는 꽃이 최고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꽃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보기 좋으면 좋은 거지.
그리고 저세상의 귀에 꽂힌 꽃 한 송이는 무척이나 내 두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아이, 예쁘다.”
저세상이 지랄하지 말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 줄 뿐이었다.
저세상은 내가 보여 주는 웃음이 불쾌하다는 듯이 귀에 꽂힌 꽃을 내다버리려고 했지만.
“잘 어울리는구나, 세상아.”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윤사해의 말에 내가 꽂아 준 그대로 두었다. 정말 속 보이는 자식이었다.
“리사, 꽃은 다 골랐니?”
“아직! 잠깐만 기다려 줘, 아빠!”
“그래, 알겠으니 천천히 고르렴.”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하얀 꽃을 찾기 시작했다.
“야, 윤리사. 잠깐만.”
저세상이 바쁜 나를 멈춰 세우고는 말했다.
“나도 꽂았으니 너도 꽂아.”
그러면서 그는 내 귀에 꽃 한 송이를 꽂아 주었다. 내가 저세상에게 준 꽃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 색을 지닌 꽃이었다.
“얘는 뭐야?”
“아네모네.”
내가 저세상에게 준 것보다는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나는 내 귀에 꽂힌 꽃을 빼들고선 저세상이 가르쳐 준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네모네…….”
문득, 붉은 기와가 놓인 저택의 마당에 피어 있던 꽃들이 생각났다.
온통 붉은 것들뿐이었는데, 왜 갑자기 그 광경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어.”
나는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저세상이 준 꽃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저세상은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저게 더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잠깐만 기다려봐.”
저세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윤사해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리킨 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목련.
하얗게 피어난 꽃 한 송이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얗던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을 닮았다고 할 게 아니라, 꽃을 닮았다고 할 걸 그랬다.
눈은 녹으면 사라지지만, 꽃은 저세상이 말했듯 지고 나서 다시 피는 것들이니.
윤사해가 저세상이 가리킨 목련 모종을 드는 것이 보였다.
“리사, 다 골랐니?”
“응.”
하얀 꽃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윤사해에게 붉은 장미 모종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돌아온 집.
나와 저세상은 곧장 화단을 가꿨다. 윤사해는 내가 쉬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얘네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금방 질 것 같은데.”
“왜?”
“그야 이제 가을이니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여름은 지나간 뒤였다.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제대로 살 수 있을걸.”
윤사해라면, 우리가 가꾼 꽃들이 금방 저무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드장님, 말씀하신 것들 가져왔어요. 그런데 어디다 쓰려고요?”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류화홍이 윤사해에게 붉은 글자가 쓰인 부적 여러 개를 내밀었다.
윤사해는 류화홍의 질문에 답해 주지 않은 채, 그것들을 화단의 곳곳에 놓았다.
류화홍이 그 모습을 보고는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우와, 12공방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피땀 흘려 적은 것을 화단 정비에 써 버리다니.”
웬 부적인가 했더니, 12공방이 만든 아이템이었나 보다.
류화홍은 윤사해를 향해 엄지를 치켜 올렸다.
“길드장님, 진짜 리스펙.”
윤사해는 말없이 류화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의 눈초리에 류화홍은 순식간에 우리 집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 집에 찾아온 사람은 윤리오와 윤리타였다. 찾아온 게 아니라, 돌아왔다고 해야겠지.
“리사! 세상아!”
“윤리사, 돌아왔어?!”
반갑기 그지없는 쌍둥이의 목소리들에 나는 한달음에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오랜만에 온 가족이 다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나는 간만에 윤리오가 차린 진수성찬을 접하게 되었다.
잘 가라, 병원 밥! 다시는 만나지 말자!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에 젓가락을 드는데, 윤리타가 내게 물었다.
“리사,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라거나. 뭐든 사 줄게. 해 줄 거고.”
“맞아, 리사. 가지고 싶은 거라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윤리오가 윤리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내게 물었다.
평소라면 윤리타에게 애 버릇 나빠진다고 그런 말 말라면서 질색했을 윤리오였는데 말이다.
나는 고기반찬을 흰쌀밥 위에 올려두고는 말했다.
“리사는 가지고 싶은 건 없는데,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런데 아빠가 해 줬으면 하는 건 있어.”
윤사해가 무엇을 말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활짝 웃었다.
장천의를, 아니.
“천의 삼촌을 만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