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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82)화 (82/500)

82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6)

살았으면 했다.

나를 위해 준 각시와, 그런 각시를 사랑한 양반이.

지은 죄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살아 줬으면 했다.

그렇게 바랐다.

***

하얀 거목이 쓰러진 공간.

백정은 자신이 깔끔하게 벤 탄생목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망할.”

빌어먹을 양반 새끼와 장단을 맞추다가 탄생목을 베어 버릴 줄이야.

백정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하나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는 점은, 탄생목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였다.

“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 안 가 다시 자라겠지.”

대신 탄생목이 나뭇가지를 온 사방에 뻗을 때까지, 각시는 태어나지 못할 거다.

백정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선 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백정.”

부네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지. 양반 그 개새끼가 같잖은 재주를 부린 것 같지만, 움직일 만해.”

백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양반의 검에 찔렸던 어깨 부근을 매만졌다.

아까까지만 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듯했지만, 착각이었던 듯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백정이 어깨를 한 번 돌리고선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선비 새끼를 족치러 가고 싶은데 말이야.”

“양반은요?”

“알아서 죽을 거야. 지금쯤 숨이 끊어졌겠군.”

백정이 키득거렸다. 그 정도의 상처로 살아남기란 쉽지가 않을 거다.

“그보다 각시님은 어쩌셨나?”

“제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온몸이 얼어붙더니 이내 조각나 부서지더군요.”

부네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그 조각들을 조금이라도 챙길 걸 그랬네요. 아니다, 저렇게 나무가 망가져 버렸으니…….”

부네가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백정이 배를 움켜쥐고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크흑, 흐, 하하하!”

“백정?”

부네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백정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그가 정신계 스킬에라도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정이 그런 부네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웃는 낯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아, 괜찮아. 양반 새끼가 너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 웃은 것뿐이야.”

백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밑동만 남은 탄생목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새끼. 탄생목이 죽어가는 나무라고? 그래, 그 말이 맞지.”

그러고는 탄생목에게 다가가, 하얗게 죽어가는 나무에 손을 얹었다.

“각시가 태어남에 따라 살아나고, 죽어감에 따라 죽어가는…….”

백정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각시와 한 몸이나 다름없는 나무니 말이야.”

그런데 그 나무를 베어 버렸으니.

“각시님께서 멀쩡하시겠어?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양반은 제 손으로 각시를 죽였다는 말이었다.

그런 그를 마음껏 조롱한 백정이 돌연 분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백정이 사납게 욕설을 지껄이고선 걸음을 돌렸다. 부네가 그 뒤를 따르며 나긋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아이는 놓치셨나 보네요, 백정.”

“각성자니 뭐니 하더니,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더라고.”

“그 아이가 각성자라고요?”

“그래.”

백정이 목 언저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어린 나이에 각성자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뭐 그런 거겠지.”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에는.”

“오래 살지 못하지. 금방 죽어 버릴 것처럼 비실비실한 것이 특징인데.”

백정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애새끼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지? 윤사해의 따님이라서 그런가.”

“흐음.”

“어쨌거나 아쉽게 됐어.”

부네가 백정의 말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백정은 그런 부네를 보며 키득거렸다.

“윤사해가 그토록 아끼는 자식을 이용해 그의 속을 뒤집을 작정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속이 뒤집어졌던 것은 백정이었다.

‘빌어먹을 양반 새끼 때문에.’

그래도 그는 위안으로 삼았다.

제 속을 긁어댄 양반을 죽였다는 것에.

그 양반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은 건지도 모르고.

***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뚝뚝 떨어졌다. 저세상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울음을 참으며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 보람도 없이,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다시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게 다가왔다.

“잊어, 윤리사. 네가 뭘 본 건지 모르겠지만.”

저세상이 말을 멈추고는,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잊어.”

“잊을 수 없으면?”

“덮어.”

돌아온 대답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세상은 내 머리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기억으로 덮으면 돼. 나는 그렇게 하거든.”

“그게 안 되면?”

“너, 진짜…….”

저세상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마뜩찮은 얼굴로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기억하든가. 잊지도, 덮지도 않고 날 것 그대로 네가 본 것을 똑바로 기억해 봐.”

들리는 말에 나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대로 갚아 주는 거야. 너한테 그런 기억을 새긴 사람을.”

나에게 건네는 저세상의 말은, 그가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다른 기억으로 덮으면 돼. 나는 그렇게 하거든.’

거짓말이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읽었던 『각성, 그 후』에서의 저세상은 그랬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잃고 괴로워하던 기억을, 다른 누군가를 구해내며 덮어 버렸던 주인공.

그랬던 그는 나를 달래며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윤리사,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저세상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윤리사, 아저씨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나도 모르게 그쳤던 눈물이 두 눈에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엄청.”

나는 말을 잠깐 멈췄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엄청 많이 보고 싶어.”

그리고 그 품에 꼭 안기고 싶었다.

“그래, 가자.”

저세상이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침이 찾아온 이른 시간.

거리에는 나와 저세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는 말이야. 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리오 형이랑 리타 형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어.”

내가 숨죽여 우는 가운데서 저세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형들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야? 집 주변에 펼쳐진 아이템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시더라고.”

그게 새벽의 일이었다며 저세상은 웃었다.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선 물었다.

“세상이 오빠는 두고?”

“형들은 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을 걸. 그래서 몰래 나왔어.”

너를 찾으려고.

저세상은 그런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것 같았다.

“어쨌든, 내 방에 들어와서 형들이 그러시더라.”

“뭐라고?”

“윤리사, 너를 금방 데려올 테니 좋은 꿈 꾸고 있으라고.”

기껏 닦아낸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리려고 했다.

“네 오빠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저세상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네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너를 위해 나서는 사람들.”

저세상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내가 아니라 네가 사라졌어도 그렇게 움직였을 거라고.

윤사해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하지만 울음을 참느라 나는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저세상은 숨죽여 우는 나의 모습을 못 본 체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건 아저씨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윤리사.”

내 손을 잡고서 걸어가던 저세상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나서려고 하지 마.”

당부하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저세상의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검은 두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윤사해의 따님? 그리고 너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는 키즈 카페의 내부 모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랑야가 보였다.

랑야가 나를 보고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두 팔에 얼굴을 묻은 윤사해의 발끝을 톡톡 건드렸다.

그에 초췌한 낯의 윤사해가 고개를 홱 들었고.

“아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리사.”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이, 윤사해는 그렇게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선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빠! 아빠아!”

나는 그대로 윤사해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윤사해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고선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단다.”

라고.

뒤늦게 알게 된 거지만, 내가 탄생목에 바쳐지기 위해 유랑단의 은신처로 사라졌던 기간은…….

고작 하루였다고 한다.

***

윤사해에 의해 엉망으로 어질러진 키즈 카페의 바깥에서 저세상은 멀뚱히 서 있었다.

안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오직 울음소리만이.

무서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내뱉는 말은 없었다.

아이는, 윤리사는 그저 윤사해의 품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을 뿐이었다.

저세상은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아, 싫다.”

진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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