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5)
【<[S, 숙련 불가> 설국의 왕】
양반은 눈앞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보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각성자였네. 그것도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각성자.”
아이가 떠나면, 다시 A급의 스킬로 변할 줄 알았건만.
‘여전히 S급.’
하지만 양반은 알았다. 이것이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란 것을.
그렇기에 스킬이 해제되기 전에.
“양반……!”
백정을 쓰러뜨려야 했다.
또한, 함께 무너뜨려야하는 것이 있었으니.
양반은 죽어가고 있는 하얀 거목을 흘긋거렸다.
그 순간 백정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서 양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양반은 맞서는 대신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콰과광!
조금 전까지 양반이 있던 자리에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쏴아아-
양반을 놓친 백정이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갈며 그를 향해 자세를 취했다.
“졸래졸래 피하는 건 아주 쥐새끼 같군, 그래?”
“내가 쥐새끼라면 너는 고양이인가 보네? 먹이 하나 제대로 못 무는 늙은 고양이.”
“하하!”
백정이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
백정이 인지할 새도 없이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 와 양반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윽……!”
한 자루의 검은 막을 수 있었으나, 또 다른 검이 양반의 옆구리를 찔렀다.
몸을 틀어 급소는 가까스로 피했지마는, 하필 찔린 곳은 비장이 위치한 부분.
양반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역한 피를 토해내고선 제 앞의 백정을 노려보았다.
백정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잘도 설쳤겠다?”
“아직…….”
양반이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백정의 또 다른 검에 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더 설칠 수 있거든.”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백정은 살갗에 내려붙는 서리를 눈치채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쿨럭……!”
옆구리에 찔렸던 검이 단번에 빠져나가자, 양반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양반은 찔린 곳을 얼려 버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오래 두면 괴사할 테지만.’
지금은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싸워서는 안 됐다.
백정에게서 ‘윤리사’란 이름은 잊힌 지 오래였다. 지금 그에게 있어 당장에 급한 일은 눈앞의 양반을 죽이는 일.
‘윤사해의 애새끼가 각성자라면, 도로 잡아다 와도 제물로 바칠 수가 없다.’
또한.
‘그러지 않더라도 잡아 죽이면 되지만, 이미 윤사해의 손에 들어갔을 테니.’
때문에 백정은 윤리사를 쫓기보다는 양반을 향해 검을 들었다.
자신을 방해한 어리석은 양반의 목을 베어 넘기기 위해.
양반은 그 모습에 웃으며 검을 들었다.
“한때의 동료가, 이렇게 적이 될 수도 있구나.”
“우리가 언제 동료였던가? 수장님의 명령만 아니면 함께 움직일 일도 없는 사이잖냐.”
백정이 그런 말을 하며 양반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반은 다가오는 백정을 향해 검을 치켜들며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등을 지고 서 있는 탄생목을, 제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
다행히도 조금 전에 찾아낸 방법이 있었다.
양반은 작게 숨을 내쉰 뒤, 백정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휘몰아치는 눈보라의 세력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양반은 움직였고, 백정은 막았다.
백정에게 막혔던 검이 가볍게 휘둘러져 허공을 베었다. 백정은 날아든 검을 날래게 피하고선, 양반을 향해 강하게 움직였다.
양반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제 목을 겨눈 검을 피해냈다.
백정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 양반은 피할 수 없었다.
오른쪽 어깨가 허전하다는 감각과 함께 우지끈, 커다란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거세게 내리던 눈이 멈추었다. 양반은 가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 하하하!”
생명이 빠르게 꺼져가고 있는 몸에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탄생목이 깔끔하게 베어져, 고여 있는 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망할…!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된 일이기는? 보다시피, 네가 탄생목을 벤 거지.”
양반이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쪽 어깨를 얼려 출혈을 막았다. 그러고는 백정을 보며 히죽거렸다.
“어차피 죽어가는 나무였잖아. 애새끼들을 바치면서 억지로 살리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 잘 베어 넘겼다는 소리였다.
“내가 베기에는 너무 버거운 나무였는데, 역시 힘 하나는 무식해. 아니다, 주변을 살피지 않아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숨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양반은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우리 각시님이 ‘마지막’이 되겠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백정이 분을 참지 못하고서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양반은 제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
뒤바뀐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유랑단의 은신처를 벗어나 바깥으로 왔음을.
선비와 함께 이동한 곳은 할미에게 몸이 떠밀렸던 그 장소였다.
키즈 카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여명에 감싸였던 도시의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찾아온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무척이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반가움을 느낄 여유 따윈 없었다.
저세상의 익숙한 목소리에 인사를 건네는 것 역시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윤리사……?”
“잠깐만 그대로 있어 줘, 저세상.”
내뱉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를 향해 달려오려던 저세상이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그런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 스킬 적용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멈췄으면 했다.
내 눈앞에 비춰지는 모든 광경의 시간들이.
이대로 멈춰 주기를 바랐다.
***
“크윽……!”
백정은 어깨 부근을 파고든 검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검을 내리치려는 그 짧은 순간에 양반이 몸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보다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거다.
다 죽어가는 몸에 자신을 향해 반격을 가할 힘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그 힘이 많이 남아 있던 것은 아닌 듯, 백정의 어깨를 찌른 검은 곧바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한 거냐, 양반!”
찔린 어깨에서부터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묻는 목소리에 양반은 눈웃음을 지었다.
“글쎄, 별 짓은 안 했어.”
힘겹게 내뱉은 말에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죽어도, 네가 얼어붙을 수 있게 만들었을 뿐.”
백정을 조소하는 웃음기가.
양반의 말이 끝마치기 무섭게 백정은 얼굴을 사납게 찌푸리고선 검을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서 있는 양반의 목을 단번에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백정은 양반의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백정의 검이 양반에게 닿기도 전에 양반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양반의 목덜미를 잡아챈 남자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비……!”
“실례하겠습니다, 백정.”
선비는 그 말을 남기고선 양반과 함께 순식간에 몸을 감췄다.
백정이 둘을 놓칠세라, 재빠르게 검을 움직였지만 벤 것은 허공뿐이었다.
“아아악! 빌어먹을 새끼들!”
쓰러진 하얀 거목 앞에서 백정은 그렇게 분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
백정이 노하여 길길이 뛸 때에 선비와 함께 사라졌던 양반은 붉은 기와가 놓인 각시의 저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컥, 흑…….”
양반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피를 뱉어내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흐릿해져가는 시야에 보이는 것은 제가 직접 가꾼 꽃들이었다. 하나같이 각시를 닮은 붉은 꽃들.
“향화는.”
양반은 습관적으로 은애하는 각시를 찾았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붉은 기와집에서 그녀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가물어지는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평소 각시가 곱게 차려입었던 붉은 한복이었다. 고운 비단으로 맞춘 의복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옷 주변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살굿빛의 조각들이 보였다.
양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를 놓으며 힘겹게 목소리를 뱉었다.
“향화한테 갈래. 향화는 어디 있어? 우리 각시님은.”
“당신 걸음으로 다섯 보만 앞으로 걸으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선비는 양반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그를 놓아주었다.
양반은 그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정확히 다섯 걸음.
“향화…….”
양반은 그대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앉아 각시의 옷자락을 끌어 잡았다.
“윤리사는 무사히 제 아버지한테 보내 줬어. 진짜 각성자였더라고.”
웃고자 내뱉은 말이었으나 왜인지 울음이 차올랐다.
“그 작은 애가 재미난 스킬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에 양반은 각시의 붉은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마지막으로 남을 수 있게 했어.”
또 다른 각시가 태어나지 않도록.
네가 새로 태어난 각시에 잡아먹힐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향화…. 향화야…….”
일어나 내게 잘했다고 해 주련.
양반은 뒷말을 삼키고선 몇 번이나 제 각시의 이름을 불렀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알면서도.
“나의 혜향화야…….”
그렇게 가슴에 새길 듯이 제가 지어 준 각시의 이름을 불렀다.
***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의 적용 대상, 각성자 ‘설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해제됩니다.】
동정하지 말라고 했다.
각시는 자신을, 그리고 양반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랬지마는.
저세상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윤리사.”
울컥 차오르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 감정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